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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5일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27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입니다.
성경 출3:1-15절(구84)입니다.
성가대 찬양입니다.
제목: 떨기나무(스네)의 하나님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의 목적은 성령세례입니다(행1:5). 거룩하신 하나님이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영원히 거주하십니다(요14;23). 고전3:16-17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3:17)의 예를 웃사의 사건(삼하6:1-7)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기럇여아림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할 때, 웃사가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몰았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날뛰기에 웃사가 언약궤를 지키려고 손을 뻗어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사 치시므로 웃사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는 웃사가 거룩한 언약궤를 손으로 잡았기 때문입니다(민4:17-20, 사6:1-5).
성도 여러분, 이처럼 거룩과 세속(세상, 평범), 그리고 정함과 부정함의 경계선이 빛(생명)과 어둠(사망)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창조(율법)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3:17).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중에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잠깐 보았을 때의 반응입니다. 사6:5절입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여기서 이사야는 실제가 아닌 환상 중이며, 그것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잠깐 보았을 뿐인데, ‘그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라고 탄식하며, 그 이유를 부정한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룩하신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잠깐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 하나님과 새 언약(복음)의 열매를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모세 소명의 역사적 상황인 2:23-25절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그)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여기서 ‘그 하나님’(23)은 아브라함 언약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탄식과 부르짖음의 원인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가 반복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난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들이 이처럼 오랫동안 고난을 받고 있을 때 그 언약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그들과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여기에 ‘미완료 동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여러 해 후(동안)’(23)에 그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서 그들의 고통 소리를 계속 들으셨고, 그 언약을 계속 기억하셨고, 그들을 계속 돌보고, 기억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모세가 평소와 같이 장인의 양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을 때(1),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임재하신 여호와 자신을 가리키며(4, 14:19), ‘불’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창15:17, 19:18).
성도 여러분, 마른 광야에서 ‘떨기나무(스네)’는 매우 열기에 약해서 불이 붙자마자 즉시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 상식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한 것(2)은 매우 이상한 광경이었습니다.
모세가 돌이켜 가서 그것을 보려고 했을 때(3-4a), 여호와께서 ‘그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시면서도(4b),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5a)고 경고하시고, 그 이유로 ‘그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라’(5b)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부정한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께 가까이할 수 없는 분명한 경계선(율법)이 있는데, 모세가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룩한 땅에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그 길을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그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 신발을 벗으라’(5c)고 그 길을 알려주십니다. ‘네 신발을 벗으라’는 단순 명료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내용 자체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제시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부정한 우리가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 언약, 즉 창조(율법) 언약을 십자가 죽음(심판)으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오직 믿음(은혜)으로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주권적(일방적)으로 아브라함과 세우신 아브라함 언약(창12:1-3)도 이것에 속한, 즉 하나님의 은혜 언약입니다.
그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네 조상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십니다. 6a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런데도 모세는 그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6b).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언약의 하나님(6)이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으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2:23-25절을 반복하는 7-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내(그 하나님)’가 애굽에서 고난과 부르짖음 가운데 있는 ‘내(하나님) 백성’을 그 언약에 따라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면, 왜 그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으로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셨을까요? 이는 광야의 떨기나무가 애굽에서 고난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는 연약한 이스라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사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시면, 그들도 거대한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의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10절입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것이 모세의 소명입니다. ‘내(하나님)’가 모세를 통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하게 하신다는 것(10),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롬15:18-19). 그렇다면, 그 떨기나무는 모세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 자신이 떨기나무와 같다는 철저히 알아야 했기에 8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사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습니다. 11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40년 전에 히브리 사람을 도우려고 애굽 사람을 살인하였다가 발각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자였으며(2:15-15), 장인의 양들을 치는 80세 노인이었으며(1), 자신에 대한 백성의 신뢰를 전혀 믿지 못하였으며(4:1), 하나님의 지팡이를 받고서도 선뜻 나서서 지도력을 과시할 말재주도 없었습니다(4:10-11). 그러므로 그는 그 소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의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약속하시면서, 떨기나무와 같은 모세가 그 소명을 감당하도록 끝까지 요구하십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증거(표)인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떨기나무와 함께할 수 없는 불이 그것과 함께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하사 그를 통하여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즉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말할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13). 그러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흐에 아쉐르 에흐에)’라고 대답하십니다(14). 여기서 보다시피, 첫 글자(에흐에)와 마지막 글자(에흐에)는 동일합니다. 가운데 ‘아쉐르’는 두 단어를 연결하는 관계사입니다. ‘에흐에’는 ‘~이다, 있다’라는 뜻을 지닌 ‘하야(영어 be)’ 동사의 일인칭 단수 미완료형 입니다. 이것이 15절에서는 ‘여호와(예호와)’로 표현되었으며, ‘여호와’는 ‘하야’의 3인칭 단수 미완료로 변형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거에는 ‘예흐에’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나는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에 이르기까지 계속 존재하는 분’, 즉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확신을 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의견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즉 아브라함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 백성이 영원히 부르며, 대대로 기억할 하나님의 칭호(15)인 그 이름(14)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꽃으로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며(1-6), 애굽에서 언약 백성의 고난과 부르짖음과 그 언약에 따라 그들의 구원을 모세에게 말씀하시며(7-9), 그에게 그 사명을 주시며(10),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끝까지 설득하시는 문맥(11-12)의 결론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역의 의미로 이해하여,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분’, 즉 그 언약에 따라 떨기나무와 같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시내 산에서 언약 백성이 되게 하시는 언약과 구원의 하나님 이름(12b), 또한, 그것을 미래의 의미로 이해하여,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과 같이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모세와 함께하실 임마누엘(12a)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순절 성령강림의 목적은 성령세례입니다(행1:5).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떨기나무 가운데 거대한 불이 함께 하는 것과 같이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창조(율법) 언약을 다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한 새 언약(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같이 믿음(은혜)으로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3:17).
그런데도 아브라함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난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과 같이 새 언약 백성인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 중에서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욥이 고통 중에 절절하게 외친 것처럼 우리 인생 그 자체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욥7:1절입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새 언약의 사람이지만,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가는 여정에서 이 땅의 힘든 노동(창3:17-19)이 상징하는 여러 가지 고난을 경험하는 연약한 떨기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떨기나무 가운데 꺼지지 않은 불,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떨기나무와 같은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 같이 그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떨기나무와 같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새 언약(복음)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천지가 흔들려도 떨기나무와 같은 우리에게 새 언약대로 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의 고난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습니다(롬8:28).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난들을 통하여 연약한 떨기나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는 주님의 제자훈련(성화 구원) 과정에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약할 그때, 강함입니다(고후12:10). 이것이 새 언약(복음)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시편 기자처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새 언약(복음)에 근거하여 항상 고백하시며,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사 우리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자랑하기 바랍니다. 특히 고난 중에서 더욱 그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새 언약(복음)대로 우리에게 이루시는 떨기나무(스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찬송 336장을 부르시고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