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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장 31-33절.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갔음
31절.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 God and Father of the Lord Jesus, He who is blessed forever, knows that I am not lying.
주 예수의 아버지—하나님이--아시느니라.
ὁ Θεὸς καὶ Πατὴρ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οἶδεν,
the God and Father of the Lord Jesus has known
‘아시느니라’(οἶδεν)는 완료형으로서(has known) 이미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영원히 찬송할
ὁ ὢν εὐλογητὸς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the (One) being blessed to the ages
직역하면 ‘영원토록 찬송 중에 계시는’이란 뜻입니다.
‘찬송할’에서 동사(ὢν)는 현재분사로서(being) 현재 찬송 중에 계시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ὅτι οὐ ψεύδομαι.
that not I do lie
동사(ψεύδομαι)는 현재형으로서(I do lie) 현재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이 말씀은 자기를 알아줄 사람은 없으나, 하나님은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이해해 줄 사람이 그다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을 보증인으로 삼고 자기가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 것을 증언합니다.
2.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면서 다메섹 도상에서 처음 예수 믿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다가, 부끄럽게도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벽을 벗어나 유대인들에게서 도망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이처럼 바울은 연약한 도망자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로써 오늘날까지 사도로서 사역을 계속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을 맹세의 형식으로 증인처럼 내세우면서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이야 바울 사도의 말이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다들 믿고 의심하는 사람이 없지만, 막상 바울 당시에는 바울을 거짓 사도, 바울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불신하는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이렇게 맹세 형식으로 말한 것은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의심했기 때문입니다(1:12-14).
4. 지금 고린도후서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라는 추천서도 받아 가지고 오지 않은 거짓 사도요, 바울은 두 번 심방하겠다고 약속해놓고서 한 번 밖에 심방하지 않은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바울이 두 번째 고린도 교회를 심방하지 않는 것은, 바울을 반대한 반바울파 사람들과 범죄자들을 책벌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고후 1:16-18, 23)
그러나, 일단 바울을 거짓말쟁이라고 계속 의심하려고 한다면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경험한 사건들은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의 말이나 행위에 대한 진실성을 호소하는 수단 중 가장 강하게 사용하는 ‘맹세 용법’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고 밝혔던 것입니다.
5.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란 표현은 전통적으로 유대교인들의 찬양문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성전 예배 시에나, 회당 예배 시에나, 심지어 신약시대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예배할 때도,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바로 주 예수의 아버지시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이 에베소서 1장 3절에는 이렇게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찬송해야 할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시고, 이 하나님이 곧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입니다.
안 믿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였던 바로 그 예수의 아버지가 바로 유대인들이 예배해오던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도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 유대인들이 조상 적부터 섬겨온 그 하나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5. 이처럼,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섬겨온 그 하나님이 이제 기독교인들이 섬기는 주 예수의 아버지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4절에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왕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다니엘이나 에스라 느헤미야 등이 섬겨온 그 하나님이, 때가 차매, 당신의 아들인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모든 인간의 죄, 유대인의 죄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죄도 다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셔서, 죄 용서를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으로 양, 염소, 송아지들을 이끌고 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지만, 이제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완전한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약시대와는 달리 죄 용서받으려고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끌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 유대인 신앙의 선조들이 섬겨온 하나님이 바로 신약시대 우리 이방인이 섬기는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6.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할 필요도 없고, 사마리아 그리심 산에서 예배할 필요도 없고, 이제는 어느 곳에서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제사장이나 왕 앞에 가서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두세 사람이 모여서 예배하더라도 그 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7. 그래서, 주일에는 교회에 와서 예배하고 설교 말씀을 듣지만, 금요일에는 구역에서 구역 식구들끼리 예배하고, 가정에서는 가족들끼리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섬겨온 하나님이 바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서로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 당시에는 기독교인의 예배에서나 기도회에서,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란 표현이 널리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바울을 배척하는 고린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에게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거짓말 아니 하는 것을 입증합니다.
32절.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n Damascus the ethnarch under Aretas the king was guarding the city of the Damascenes in order to seize me,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ἐν Δαμασκῷ ὁ ἐθνάρχης Ἀρέτα τοῦ βασιλέως
In Damascus the governor of Aretas the king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ἐφρούρει τὴν πόλιν Δαμασκηνῶν
was guarding the city of the Damascenes
‘지켰으나’(ἐφρούρει)는 미완료과거로서(was guarding) 계속 지키고 있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나를 잡으려고
πιάσαι με,
to seize me
‘잡으려고’(πιάσ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seize) 반드시 확 잡으려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32-33절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이 처음 예수 믿고, 다메섹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죽음을 당할까봐 도망한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처음 예수 믿을 때부터 늘 이렇게 복음 전도를 위해서 살아온 것과, 이러한 복음 전도사역에는 항상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지금도 고린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요 거짓말쟁이요 헌금을 횡령해 먹는 도둑놈으로 몰아서 죽이려 하는 것이 생소한 것이 아니고, 바울에게는 예수 믿은 처음 시작부터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모함 때문에 바울이 복음 전도시에 온갖 죽을 고난을 당한 것을 거짓말로 간증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복음 전도와 심각한 고난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메섹에서 안 믿는 유대인이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이나, 지금 고린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을 이단으로 매장하려 한 것이 동일한 맥락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도 이러한 수모를 당하면서 주님과 성도를 위해 충성했으니, 오늘날 우리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2. 둘째로 32-33절은 바울이 처음 예수 믿고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을 말한 것인데, 여기서도 자기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곧바로 다메섹 성에 들어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을 때, 바울은 담대하게 순교를 각오하지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즉,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밤에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을 통해, 성벽을 넘어 도망갔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창피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만일 바울이 떳떳하게 목숨을 내놓고 예수님을 전도했더라면, 하나님의 종으로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리 타고 도망간 바울의 모습은 어디다 내놓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사라는 것입니다.
마치 마가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옷을 벗고 도망간 것처럼 부끄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막 14:52)
이처럼 바울은 밤에 광주리를 타고 몰래 도망간 것을 자신의 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드러내놓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33절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3. <아레다 왕>은 나바데아(Nabataea) 왕국을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나바데아 왕국은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오래된 왕국이었습니다.
<아레다>란 말은 나바데아 왕국의 전통적인 왕을 가리킵니다.
즉 애굽의 왕을 바로, 로마의 황제를 가이사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4. 그리고 다메섹은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읍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다메섹이 아람 나라의 수도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당시에는 이 다메섹이 이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 있었으나, 나바데아인들의 반자치 구역으로 허용되어, 아레다 왕의 방백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7. 이 <방백>(ἐθνάρχης)이란 다메섹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 장관>(ethnarch, goveror)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9장 23-24절을 볼 때, 이 행정 장관은 유대인 출신으로 다메섹의 유대인을 담당해서 다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휘하의 경비병들도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8. 다메섹의 방백이 바울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은 사도행전 9장 23-25절을 볼 때, 단순히 체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잡아 죽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23-25,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9. 그런데, 다메섹의 방백이 아레다 왕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역사적으로 실제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마태복음 14장과 마가복음 6장과 누가복음 9장에 나옵니다.
세례 요한을 죽인 사람은 갈릴리 지방을 다스린 분봉왕 헤롯 안디바였습니다.
이 헤롯 안디바의 본부인은 원래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나바디안 왕국의 공주, 즉 아레다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 안디바는 로마 황실에 가서 다시 분봉왕의 권세를 얻어오려고 북쪽으로 여행하다가, 이복형인 헤롯 빌립 1세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가 대단한 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가 서로 보는 순간에 전기가 짝 통하고, 서로 참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날 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서로 각각 남편과 아내를 버리고, 결혼하자고 약속까지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는 로마에 가서 더욱 강한 왕권을 받아가지고 온 후로, 본부인인 아레다 공주를 버리고, 헤로디아는 남편 헤롯 빌립을 버리고, 안디바와 헤로디아가 서로 결혼했습니다.
그러자, 나바디안 왕국의 공주였던 본부인은 자기의 고향인 나바디안 왕국으로 도망가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나바다인 왕국의 아레다 왕은 무지하게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로마 때문에 직접 공격하지 못하고, 헤롯 안디바를 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본부인을 버리고 제수를 빼앗아 아내 삼은 헤롯 안디바의 죄악을 세례 요한이 탄핵했습니다.
그러자, 헤롯 안디바는 마음이 아파도 그 책망을 달게 받고 있었는데, 그 아내인 헤로디아는 기회만 있으면, 세례 요한을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가 재혼할 때, 전 남편의 자식인 딸을 데리고 왔는데, 그 이름이 살로매였습니다.
이 살로매도 엄마를 닮아서 미인이었고, 춤 솜씨가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지방과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는 헤롯 안디바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왕과 백성의 귀빈들이 제2의 왕궁인 마케루스( 사해 동편에 있음)에 모여서, 생일잔치를 했습니다.
이 때, 살로메가 나와 왕과 귀빈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왕도 살로메에게 매료되어, 살로메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것은 그날 밤 왕이 살로매에게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다는 것과 그 댓가로 무엇이든지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살로메가 엄마에게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허락하는 대신에, 세례 요한의 머리를 잘라다 주라고 요청하도록 말했습니다.
그래서, 마침 마케루스 성채의 지하 감방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의 목이 잘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심판이 이 헤롯 안디바에게 내려졌습니다.
AD 37년에 로마의 황제 디베료(티베리우스: Tiberius)가 죽고, 후임으로 갈리굴라 (Caligula)황제가 즉위했습니다.
이 혼란기를 기회로 삼아, 복수를 노리고 있던 나바디안 왕국의 아레다 왕이 헤롯 안디바를 죽이기 위해 갈릴리 지방을 침공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헤롯 안디바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북쪽 지방으로 추방되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헤롯 안디바의 악행이 역사적으로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헤롯 안디바가 나바디안 왕국의 아레다 왕에게 침공당하고 죽은 것은 의로운 세례 요한을 죽인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 우리는 여기서, 오늘 성경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이 역사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이고, 바울의 다메섹 도망 사건도 틀림없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 사실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서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러분은 이렇게 잘 믿으시니 얼마나 복되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십니까?
예, 여러분은 복된 성도님들이십니다.
언제나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시고, 끝까지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끝까지 변치 말고 믿음 생활 잘하셔서, 영생 복락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3절.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 was let down in a basket through a window in the wall, and so escaped his hands.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καὶ διὰ θυρίδος ἐν σαργάνῃ ἐχαλάσθην διὰ τοῦ τείχους
and through window in basket I was let down through the wall
‘내려가’(ἐχαλάσθην)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I was let down) 과거에 확실히 자기가 스스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내려가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καὶ ἐξέφυγον τὰς χεῖρας αὐτοῦ.
and I escaped the hand of him
‘벗어났노라’(ἐξέφυγον)는 부정과거로서(I escaped) 과거에 확실히 벗어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전도하다가 다메섹 왕의 고관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성도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성벽 창문으로 내려가서 도망을 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능력의 종이었다면, 하나님의 기적으로 아레다 왕의 손에서 벗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핍박을 피해서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적적으로만 돕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그가 형제들의 도움을 입음으로 극적으로 탈출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형제의 도움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 자랑하려면,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푸셔서 나를 잡고자 하는 사람들이 엎드러지고, 나는 무사히 걸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적인 자랑을 못 하게 하시기 위해서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2. 그렇지만, 밤에 광주리를 타고 도망간 그 사건이 바울에게는 오히려 자랑거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랑’이란 바울이 약하고 부끄럽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오히려 자랑거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약한 것이 자랑이 되는 이유는 바울 인간이 약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이 힘 있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약한 바울을 들어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약한 자기를 들어 위대한 사역을 이루신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은 어떤 약점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약점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만큼 능력있게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문제점을 안고 살아가십니까?
그 문제점 때문에 주의 일을 못하겠다고 회피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문제점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침돌 없이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단지 약점과 허물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약점 때문에 더욱 겸손하여 열심히 기도하면서, 더욱 열심히 하나님 의지하면서, 주의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약점을 가진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놀랍게 나타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5. 여러분이 허물과 약점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러므로, 문제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6. 사도 바울에게 사단의 사자, 육체의 가시를 주신 가운데서도 동행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문제 가운데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낙심하고,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가 어떠한 문제일지라도 주님과 동행하시면서, 전진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는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3장 5절에서 주님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않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고, 낙심 말고, 끝까지 주님 의지하고, 말씀을 붙잡으면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님들과 동행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사용해주시고, 축복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