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스러운 졸업식 축사
졸업 시즌이다. 우리 집에도 두 명이 졸업했다. 첫째는 대학 졸업, 막내는 중학 졸업. 며칠 간 온 가족이 졸업식 쫓아다니느라 바빴고 꽃 값, 짜장면 값도 꽤 들었다.
졸업식에 가면 학교장과 동창회장 등의 인물이 축사와 격려사를 한다. 그중 빠지지 않는 것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졸업생 여러분, 졸업을 축하합니다. 지난 몇 년간 여러분이 열심히 노력하였기에 오늘 좋은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졸업생들은 이제부터 더 큰 세상으로 나가게 되니 더욱 분발하여 학교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중학교 졸업식이 떠오른다. 그 당시는 개근상이나 우등상으로 사전을 많이 주었다. 주로 국어사전이나 영한사전이었는데,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조악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받아도 전혀 기쁠 것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족들의 선물 역시 주로 학용품이었다. 만년필이나 또 사전이다. 그런 것 역시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렇고 그런 중에서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하나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막내 외삼촌이 주신 두툼한 영한사전 맨 앞장에 적혀 있던 다음의 문구이다.
‘Commencement means another start!’
Commencement라는 단어가 어려워 외삼촌께 무슨 뜻이냐고 여쭸더니,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그 단어는 두 개의 의미를 갖고 있어. 하나는 ‘졸업, 학위 수여식’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시작’이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졸업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말이지. 그러고 보면 영어의 Commencement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어.”
설명을 듣는 순간 재미는커녕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지금 막 몇 년간의 지옥 같은 학교생활을 마쳤는데, 그것이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니...... 더 큰 세상에서의 더 큰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니......
나는 속으로 외삼촌을 의심하고 또 원망했다. 이분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렇지 않다면 왜 굳이 graduation이라는 쉬운 걸 놔두고 이상한 단어를 찾아와서 나를 괴롭히는가?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그런 의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새로운 시작’이란 말은 졸업식이 아니라 입학식이나 개학식에 걸맞지 않은가? 사회로 치자면 ‘종무식’이 아니라 ‘시무식’에 적합할 테고. 그러니 졸업식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마치 ‘종무식’에서 ‘내년도에는 더 열심히 뛰자’고 닦달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걸 누가 좋아하겠나?
회사에서도 종무식 후에는 단 며칠이라도 쉰 후에 다시 시무식을 갖는다. 제발 학생들도 그렇게 대해 주자. 성인들도 종무식과 시무식을 동시에 하지 않듯이, 졸업식에서만은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다시 뛰기 시작하라’고 다그치지는 말자. 그건 너무 잔인하다. 졸업 축하 말씀으로는 "그 동안 정말 애썼다!"로 족하다. 더 이상의 사족은 필요없다.
졸업생의 부모, 친지들께 끝으로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학용품은 됐으니 졸업식 날만큼은 제발 짜장면에 군만두나 충분히 추가해 주시기를. 탕수육이면 더욱 좋고. 내가 몇 번 먼저 경험해 보니 졸업식 날 내 마음이 꼭 그렇더라는 것이다. 여러분 자녀들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7. 2.17.)
(경남대 김원중)
첫댓글 교수님 건강하시죠? 정말 맞는 얘기 인것 같습니다.
교수님, 담백하면서도 정곡을 '콕' 찌르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봄볕이 좋으니 호두랑 산책이 잦아지겠네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