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봉 포도밭, 청룡사 가는 길
충청남도 성거, 입장에 맞닿은 안성 서운면은 알이 붉은 검붉은 빛의 거봉 포도의 주산지로 청룡사 가는 길은 온통 포도밭 천지다. 한여름 탱탱하게 잘 익은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풍경이 장관이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청룡저수지 안쪽으로 올망졸망한 논과 밭과 함께 청룡마을이 있고 청룡사는 버스 종점, 마을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늠름히 마을 입구를 지키는 느티나무 두 그루,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사적비, 언제나 졸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맑은 계곡물, 낮게 쌓은 돌담, 울 밑에 정성껏 가꾼 총 천연색 꽃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한여름 청룡사를 회상함
안성 서운산 깊숙이 자리잡은 청룡사는 이글이글 태양이 작렬하는, 포도송이 알알이 익는 한여름 오후가 제격이다. 서운산 청룡사란 현판을 눈여겨 찾지 않으면 예의 유서깊은 양반 가옥쯤으로 착각할 대문간 같은 일주문이다.
성서로운 구름 위를 청룡이 노니는 곳, 고려 말 나옹 스님이 청룡사를 중창하면서 한 마리 푸른 용이 오색 찬란히 빛나는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는 이름을 서운산(瑞雲山) 청룡사(靑龍寺)라 했다 한다.
여느 절과는 달리 청룡사 일주문 사천왕상이 있을 자리에 조그만 쪽방이 달려 있다. 대갓집의 행랑채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부유하던 먼지도 문살에 내려앉아 오수를 즐길 것 같은 한낮, 너무 차분해서 발소리조차 내는 것이 미안하다.
정면에 자리 잡은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측면이 한 칸 더 많은 흔치 않은 건물이다. 작지만 어느 한곳 빈틈없이 아주 당차다. 당찬 대웅전의 대웅전의 묘미는 정면이 아니다.
절정의 역도선수 팔뚝에 불거진 근육 같은 기둥의 울퉁불퉁 휘어짐이 가히 장관이다. 떡 주무르듯 나무를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 없이는 감히 선택조차 할 수 없는 기둥들이다.
온 몸의 에너지를 모아 바벨을 들어 올린 절정의 역도선수, 그 팔뚝에 불거진 근육, 대웅전 기둥은 그 절정의 순간에 멈추어져 세월을 순간으로 매어 두었다. 비뚤어지고 휘어지고 울퉁불퉁한 기둥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절정의 아름다움을 표한 도편수.
떡 주무르듯 나무를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 없이는 감히 선택조차 할 수 없는 기둥들이다. 굳이 줄을 맞추지도 않았다. 모두 같아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태어난 모습대로, 생긴 모습대로 필요한 곳에 가서 필요한 기둥이 되어 그 자리를 지키면 그 뿐이다.
법당 안에는 최근(2000년) 보물로 지정된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편편하지 않은 바닥에 그무끼(그무개)를 이용해 나무를 가다듬어 기둥을 세우는 것을 그렁이질이라고 한다. 조선 땅 어디서든 흔하디 흔한 화강암을 생긴 모양 그대로 주춧돌로 삼은 후 나무를 돌 모양에 맞게 기둥을 세운다.
그무끼(그무개)라구 그것두 이마적에 그무끼지 그전에는 그거 없어. 나무 조각을 이렇게 모루 이어 가지구는, 서푼이면 서푼, 너푼이면 너푼, 쓸만큼 이어 가지구는 한쪽을 반듯허게 밀었으면 거기다 먹칼을 대구는 족 긋는 거야. 지금은 쉽게 하느라구 그무끼 쓰지. 그건 먹칼을 대지 않아두 한쪽에 송곳 모양으로 쇠촉이 붙어 있단 말이야.
그래 그걸루 족 밀면 나무에 쇠가 페인 자욱이 남지, 그러면 고대루 쓸어 버리지. 그것두 왜놈 나오구 생겼지. 그전에는 촌목이라구 죄 나무루 맨들어서 먹칼루 대구 그었는데 그게 더디걸랑. 그무끼 그거는 이렇게 맞추어 가지구설랑은 고대루 족 밀기만 허면 되지만 이건 먹칼루 대구 허는 거는 먹을 자꾸 찍어서 그어 나가니깐드루 더디지.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2, 조선 목수 배희한의 한평생, '이제 이 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에서
오래 전 남사당패가 걸어 넘었을 그 산, 서운산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절의 허드렛일을 거드는 불목하니로 겨울을 난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던 남사당패. 지금도 청룡사 개울 건너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
그 남사당패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 안성 출신 바우덕이(김암덕)다. 안성에서 태어나 청룡사에 맡겨졌던 바우덕이는 최초이자 최후의 여자 꼭두쇠(남사당패 우두머리)를 맡아 삼남(三南)에 이름을 날렸다. 고종 2년인 1865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기예를 뽐내 흥선대원군에게 정3품 당상관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받아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민요에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구절이 심심찮게 나올 만큼 명성을 얻었던 그녀는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했다. 바우덕이의 시신은 어려서 자랐던 청룡사 부근에 묻혔다 한다. 몇 년 전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가묘를 만들고 안내문을 세웠다.
청룡사 앞 개울을 따라 수십명 남사당패가 자신의 기예를 뽐낼 악기를 등에 메고 넘었을 서운산 중턱 좌성암을 향한다. 앵초, 참꽃마리가 무리지어 피어 있고, 때 이른 더위로 할미꽃은 벌써 하얀 머리를 풀어헤친 채 홀씨가 되어 부유할 채비를 하고 있다. 성환, 성거, 입장 충청도 마을을 넉넉하게 품은 안성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꽃피는 춘삼월이든, 장대비 내리꽂는 장마철이든, 흰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이든 떠남은 늘 설렘을 동반한다. 하지만 꼭 그 계절에 그곳에 가야 제대로 분위기를 음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가지에 소복이 쌓인 눈으로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며 더 큰 삶을 준비하는 법흥사의 적송을 만나러면 한겨울에 떠나야 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연보라의 흐드러진 으름꽃이 피는 5월에는 무조건 안성 세곳 절집이다. 칠장사, 청룡사, 석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