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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해방 후 60만 명의 동포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김효순/前<한겨례> 대기자, 아이들이 태어났고 차별과 설움 속에서 성장했다. 성장한 아이들은 모국 유학을 선택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방송: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는 학원침투 간첩단 2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김기춘/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 오던 북괴간첩 일당 21명을~
해설: 불법 연행과 고문, 그리고 한국 사회의 외면 속에서 젊은이들은 죄인이 되었다.
오사카(大阪),
김효순: 맞네. 이/민으로 되어 있네, 李 LEE/MIN 閔
이철: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먼 길을~
민향숙: 고맙습니다.
김효순: 문패 보니까 이가 먼저 있고 민이 뒤에 있더라고 민을 먼저 위로 올리고
이철: 내가 거꾸로 붙여 버렸네
김효순: 장모님이 계산을 잘못하셨네 이렇게 우리 딸 고생시킬 줄 생각 안 하시고
해설: (이철/1975년 체포) 이철의 아버지는 경북 의성에서 일곱 살 때 일본에 왔다.
주오대학교(中央大學校) 도쿄,
구마모토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2세 이철은 1967년, 주오대학 이공학부에 입학했다. 주오대학에는 코리아문화연구회라는 동포학생 모임이 있었다. 선배의 권유로 모임에 나갔다가 이철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포 학생들은 모두 한국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이철: 학생증부터 고쳐야겠다 싶어 학적과에 가서 나는 이런 이름이 아니고 사실은 이철이라고~~ 후회하지 않냐? 후회 안한다고~~ 그때부터 학생증의 이름을 고쳤을 때부터 한국인으로서, 조선 사람으로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첫번째 행위였죠, 그 순간 이었죠.
해설: 대학을 마친 이철은 한국 유학을 결심했고 1973년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유학생활 중 숙명여대생 민향숙을 만나 연인이 되었다.
이철: (남편에게 다정하게 팔장을 끼고) 에잇 이 사람아~
민향숙: 제가 한번씩 이렇게 장난 하거든요, 그러면 부끄럽다고~ 저하고 데이트 하면 양복도 깨끗이 입고 와야 하는데~ 순수하게 바지 끝이 다 헤어진 걸 입고~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이철: 나뭇잎 냄새 나네~
민향숙: 이 흙을 만지면서 이것이 조국의 흙이다 라고 말하기에 그때는 제가 흙 가지고 저러나 생각했어요.
해설 이철은 대학원을 졸업하는 1976년 3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생각지도 못한 운명이 찾아왔다.
김기춘/중앙정보부: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 오던 북괴간첩 일당 21명을 검거하여~
이철: 나는 끌려간 곳이 남산인 줄도 몰랐어요. 무조건 때렸어요. 결정적인 것이 너 약혼녀 있지?약혼녀 하고 장모하고 데리고 와서 발가 벗기고 네가 보는 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범할까? 너 북한에 갔다 온 거 맞지? 네, 갔다 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네, 갔다 왔습니다. 몇 번 갔다 왔어? 두번 갔다 왔습니다. 세번 갔다 온 거 아냐? 네, 세번 갔다 왔습니다. (이철과 민향숙이 명동성당에서)
해설: 이철은 혀를 끊어 자살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허위자백으로도 약혼녀를 지킬 수가 없었다.
1977년 3월, 이철은 대법윈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약혼녀 민향숙은 방조죄로 3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민향숙은 사형수인 약혼녀의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뛰어들었다.
민향숙: 저렇게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한테 조국을 알기 위해서 온 청년한테 저렇게 순수한 사람한테 사형을 줄 수 있나? 어떻게 해서 사형을 줄 수 있나? 정말 저는 이해가 안 갔어요. 이제 부터는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기다려 보겠다고~ 그런 마음을 먹고~
해설: 이철은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 되었고 1988년, 13년의 감옥생활 끝에 특사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지 20여일 후 명동성당에서 이철과 민향숙은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김수환 추기경이 혼배성사를 집전해 주었지만 이철의 부모님은 일본에서 오지 못했다. 사형선고에 충격을 받은 부모님은 수감기간 동안 세상을 떠났디.
이철: (재일한국 양심수동우회 1970~80년대에 체포된 재일동포 정치범들의 모임), 그날이 온다 (CD), “조국이 버린 사람들”을 쓰신 김효순 작가가 오셨습니다. 여러분, 박수로 환영합니다.
김효순: (일본어로) 제가 이 모임에 처음 온 것이 5년 반 전 입니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관해서 책을 써달라고 부탁 받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주저하고 있었어요. 여기 와서 오랜 감옥생활을 한 재일동포 정치범 외에도 일본인 지원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며 이 이야기는 내가 반드시 써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조국이 버린 사람들] 김효순 著~
강종헌/1975년 체포: 김효순씨가 [조국이 버린 사람들]의 기록을 남겨서 많은 사람이 우리를 기억할 수 있어 기쁩니다. 아버지는 열세 살 때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 오셨고~아버지가 늘 하던 이야기가 너는 뭐든 좋으니까 1등을 해라! 일본 사회에서 우리가 인정받으려면 뭐든 좋으니까 1등을 해야 한다. 공부도 좋고 싸움도 좋으니까 1등을 해라.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한국인에 대한 편견 멸시 차별은 굉장히 뿌리가 깊었습니다. 그 속에서 내가 기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일본 사람들한테 지지 말아야겠다는 의식도 어릴 때부터 생기는 거예요. 다 있을 겁니다.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교토
해설: 젊은 시절 의사를 꿈꾸었던 강종헌은 일본에서 뒤늦은 공부를 마치고 평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강종헌: 일본의 헌법은 절대 평화주의로 평가 받습니다.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만들었는가? 제국주의 시절 군부를 중심으로 천황제 아래에서 전쟁의 피해를 일본인들이 심하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해설: 강종헌은 열네 살이 되던 해 재일 한국인의 현실에 눈을 떴다.
강종헌: 그 당시 법률로 열네 살이 되면 지문 날인을 해야 합니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그 순간에 내가 받은 수치감보다 분노의 마음이~ 그날 집에 가서 교과서나 공책에 있던 이름 전부 지웠어요. 나가시마라는 일본 이름을 전부 지우고 본래 성인 강으로 썼죠. 그때 나이로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 알았다. 내가 조선 사람으로 살겠다.
해설: 강종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4월, 조국 땅을 처음 밟았다. 1년간 재외국민연구소에서 한국어를 베운 후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조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인생을 꿈꾸었다.
강종헌: 서울대 전체 체육대회를 관악캠퍼스에서 해요. 1975년 10월에 의대에서 100m, 200m 선수로 뽑혔어요. 그래서 1들을 했어요. 그걸 보고 사범대 체육과 선생님이 의대생이 왜 그렇게 잘 뛰냐고~ 일본에서 좀 했었다고 하니까, 내년 봄에 전국 국립대 체육대회가 있는데 너 꼭 뛰라고~ 내가 그때 부르겠다고~ 근데 제가 다음 대회부터 못 나갔죠.
해설: 1975년 11월 28일, 강종헌은 보안사로 연행되었다.
강종헌: 혐의 내용이 자꾸 커져 가는 거에요. 혐의 내용이라는 게~ 사건을 크게 만들려면 평양에 갔다 왔다~노동당에 입당했다~ 지하조직을, 서울대 의대 내에 통혁당 조직을 만든다~ 그게 그 사람들의 제일 큰 목적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사건이 커지니까 그것을 하기 위해 물고문이 있고, 전기 고문이 있고 정해진 코스입니다.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어요. 나는 공포심 밖에 없고 그래도 내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인지, 때릴 때 머리는 때리지 말아 달라, 손은 다치게 하지 말라고 그 부탁만 했어요~~하하~~ 그렇게 이야기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건데~
-11.22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45주년 집회 오사카,
강종헌: 우리 정치범들이 그 가혹한 감옥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코로나 19에 질 수 없다는 고집으로 오늘 모였습니다. (마스크를 벗으면서) 얼굴 인사로 한번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해설(슬라이드): 민족일보를 창간한 조용수 라는 재일 동포입니다. 5.16 군사정변 이틀 후에 체포되어 일본에서 총련과 북한의 영향을 받았고 그 비밀 자금으로 이 신문을 발간한 북의 스파이라는 날조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그해 12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2008년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만 이 31세의 뛰어난 언론인이 어떤 심정으로 저와 이철씨가 언제 끌려갈지 몰라 겁냈던 그 서대문 형무소 사형집행장으로 끌려 갔을지~~어떤 심정으로 조국의 마지막 하늘을 올려 봤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해설; 25살에 사형수가 되었던 강종헌은 13년이 넘는 감옥생활 끝에 가석방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강종헌은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해설: 감옥 가기 전에 뜻은 있어도 제대로 한 것도 없고 친구들한테 폐만 끼쳤고 학생운동사에 엄청난 부담을 준 거 아닙니까? 무엇보다 사형수로 있을 때 내 앞에서 많은 분이 먼저 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분들이 못다한 뜻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하지 않나?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과제를 푸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으면 내 감옥살이가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먼저 가신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인간적인 도리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교토(京都),
김효순: 이, 차네
이종수/1982년 체포: 일부러 교토까지 오십니까?
김효순: 아, 이선생 보러 온 거죠.
해설: 교토에서 나고 자란 이종수는 일본식 이름으로 일본 학교를 다녔고 학교의 친구들은 성격 밝은 이종수가 재일한국인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이종수: (강의학원에서) 오늘은 84페이지~
해설: 일본인 행세를 하는 삶은 늘 거북했다. 한국사회를 직접 몸으로 경험해야 한국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일본의 대학을 그만두고 고려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82년 11월 6일, 스물네 번째 생일에 하숙집으로 보안사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이종수: (일본에서) 제가 아시다시피 총각이라서 별로 대접할 게 없습니다.
김효순: 이 위원님은 혼자서 오래 살아서 살림이 너무 깔끔해요.
이종수: (귀에다 보청기 끼움)~~
해설: 보안사 지하실에서는 물고문과 전기 고문에 이어 성고문까지 더해졌다.
이종수: 진짜 엄지 손가락에 전선을 하나 묶고 성기에도 또 하나를 묶어 버려요. 갑자기 전기 스위치를 누르니까 성기가 찢어지는 줄 알고~ 이북에 갔다 왔다고 했어요. 어디서 배 탔냐? 오사카만에서 탔습니다. 그랬더니 수사관들이 오사카만에 이북에 가는 배가 있나? 자기들끼리 수근수근 이야기 하더라고요. 너 혹시 오사카만이 아니라 니가타 라고 아냐? 웃기는 이야기인데~ 네, 맞습니다. 니가타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그렇지~~ 어디서 내렸어? 어디서 내렸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너 혹시 원산이라고 안 들어봤냐? 들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래~ 그래~
해설: 이종수는 일본의 가족도 알지 못한 채 38일간 보안사에 불법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고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종수: 검사가 그러더라고요, 극악비도한 이종수를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야 합니다. 극악비도한~ 저 자신이 아주 초라하게 느꼈습니다.
해설: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었고 저항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젊은이들의 인생이 짓밟히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증인이 사카이(堺)에 살고 있다.
김효순: 안녕하세요, 김병진 선생댁 아닌가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해설: 그는 보안사에서 직접 참여한 간첩수사 과정을 폭로했다.
김병진: 보안사를 건드린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고 죽을 각오가 없으면 못했어요.
해설: 연세대 국문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재일동포 3세 김병진은 1983년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되었다. 김병진의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탐낸 보안사는 통역요원으로 일하라고 강요했다.
김병진: 협박을 했어요. 네 마누라는 윤락녀로 떨어뜨리고 100일도 안된 아기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게 해서 고아원에 보내겠다~
해설: 김병진은 2년간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통역으로 일했고 1986년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일본에서 보안사 요원들의 추적을 피해 숨어 살며 1년간 책을 썼다. 그의 책 <보안사>는 재일동포 간첩조사의 실상을 기록했다.
김병진: 보안사 수가2계는 각대학의 유학생 명단을 파악합니다. 그 중에서 적당히 고르는 거에요. 뚜렷한 혐의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첩은 잡는게 아니라 만드는 거에요. 만드는 것도 어설프게 만듭니다. 실제로 재판을 하면 앞뒤가 안 맞고 조작이라는 게 탄로가 나는데 그 당시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였어요. 사법부가 보안사 눈치를 보면서 재판하는 모양새였습니다. 교포로서 잡힌 사람들 수없이 많지만 이런 말 하면 죄송하지만 운이 안 좋았다~그렇게 밖에 얘기를 못합니다.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가 2년 동안 지켜본 교포간첩들 중에서 진짜 간첩은 하나도 없었어요.
김승홍: 우리 동생은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지원 덕분입니다. 동생을 대신해서 형인 제가 감사 인사 드립니다.
해설: 김효순씨와 김승홍씨가 악수를 한다.
이철: (김승홍씨에게) 김효순씨가 일본어 능통하니까 일본어로 하세요.
김효순: 동생 김승효씨가 제 대학 후배예요.
김승홍: (김효순씨에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김효순: 78세 입니다.
김승홍: 건강하시네요.
교토(京都), 김승효/1974년 체포,
해설: 김승효는 리쓰메이칸대학 철학과를 중퇴하고 1874년 3월, 서울대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조국에서의 대학생활을 시작한 지 두 달 후 중앙정보부에 강제연행되었다. 징역 12년을 선고받았고 1981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어 일본의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놓쳐버린 정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김승홍/김승효의 형: 어머니 아버지가 많이 우셨어요.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동생 걱정을 했어요. 한국가서 이상한 일에 말려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본인도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고 갔으니까 체포되었다는 이야기에 믿을 수가 없었어요.
김승효: 나는 한국에 가서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안 했어요. 신문을 봐도 티브를 봐도 내용을 알 수 없었어요. 한국 학생들과 정치 이야기를 한 적도 없어요. 죄가 될 어떤 말도 한 적이 없어요. 중앙정보부가 체포해서 고문을 많이 했어요.
기자: (일본어로) 재판할 때 내용을 이해했나요?
김승효: (일본어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자기들 마음대로 일본말로 재판을 진행했어요. 나는 박정희를 매우 매우 매우 원망했어요.
김승홍: 석방할 때 정보부 사람이 일본에 가서 고문에 관해서 말하면 한국으로 다시 끌고 올 거라고 했대요. 그래서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요.
기자: 협박당한 건가요?
김승홍: 그 협박이 머릿 속에 박혀서 지금도 밖으로 안 나가요.
해설: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갔던 동생, 부모 형제가 유학 자금을 마련해 한국으로 보냈다. 정신분열증과 간첩의 낙인을 안고 돌아온 김승효는 21년 동안 정신병동에서 생활해야 했다. 조국은 김승효의 청춘도 정신도 모두 빼앗았다.
김승효: (어눌한 발음으로) 한국이 싫어요, 한국이 싫어요, (김효순을 향해) 광주교도소에서 당신 이름을 들은 적 있어요. 젊은 사람이 수감되어 있다고 들은 적 있어요. 김효순 이라는 학생이 수감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김효순~, 확실히 기억 났어요.
김효순: 그랬을 가능성이 있어요 (김효순이 김승효를 포옹한다).
김효순/前<한겨레>대기자.
해설: 1970년대, 북에서 내려오는 간첩이 줄어들자 정보기관은 일본을 경유한 우회침투에 주목했다.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어항 속의 물고기였다.
이철: 한국에 유학을 가는 아들한테는 부모님이 은근히 기대했어요.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오면 우리 집안의 인물이 되겠구나~
해설: 정보기관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재일동포 여학생들에게도 간첩혐의가 씌워졌다. 한국 물정에 어두웠던 여학생들은 밀실에서 야만적인 폭력을 당했다. 수감생활이 끝난 여학생들은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연락을 끊고 사라져 버렸다.
히가시오사카(東大阪),
해설: 한국의 법원도, 언론도 외면했던 재일동포 젊은이들, 그들을 위해 일본인들이 움직였다.
김효순: 몸이 점점 나빠지는 건가요?
다무라: 추워져서 몸이 나쁜 것도 있지만 해마다 굳어져요. 그래도 여기까지 잘 버틴 거죠.
해설: 다무라 고지는 1970년대 재일동포 정치범들의 구원활동에 뛰어들었다.
히가시오사카 국제공생네트워크,
지난 10년간 히가시오사카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다무라: 외국계 주민들이 공평한 행정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모국어로 된 서류제작을 시청에 요구했습니다.
해설: 학생운동을 하던 다무라는 대학을 중퇴하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재일동포 여성 노동자와 결혼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재일동포 노동자의 형이 한국에서 구속되자 시민들과 노동조합의 힘을 모아 구원운동을 전개했다.
다무라: 조국에서 모국어를 배우고 민족성을 획득해서 일본에서의 민족차별을 타개하려고 했던 청년들을 군부정권은 불법적으로 연행하고 가혹행위를 해서 유죄판결을 내린 것에 우리는 분노했던 거죠.
해설: 노동자와 시민들은 각지에서 구원회를 결성했다. 집회와 서명운동 그리고 단식투쟁을 전개했고 외교적 해결을 요구하며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현수막: 한국 박정권은 전정치범을 즉시 석방하라!)
재일동포 정치범들의 출신학교 동문들도 움직였다. 일본 전역에서 동문들이 구원회에 합류했다.
이시이히로시/이철의 고교후배: 면회하러 자주 갔어요. 한국에 250회 정도 갔어요. 감옥에서 잊혀진다는 게 가장 괴로우리라 생각했어요. 사형판결을 받고 무너져 있는 상태였기에 결코 당신을 잊지 않는다고 전해야 했어요.
마쓰모토 유리/김오자 후원회: 김오자씨의 재심을 걱정했는데 본인이 가서 법정에 설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해설: 구원회에 결집한 일본인들은 한국에 연고가 없는 재일동포 젊은이들을 위해 법정에 함께 들어갔고, 수감생활을 뒷바라지 했다. 구원회는 지금도 이어져 한국에서의 재심을 지원하고 있다.
이철: 우리 활동까지 소개해 주셔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영광입니다.
해설: 스파이라는 낙인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김효순: 1993년에 제가 한겨레 신문 도쿄 특파원일 때 어머님을 한번 만났어요. 이건 큰 기사에요. 믿었던 조국에서 간첩 날벼락 이라는 기사예요. 기사의 반이 손유형씨 이야기에요.
해설: 1981년 4월,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손유형은 한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었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기자: 사형 판결에 어떤 심정이었어요?
부신화/손유형의 아내: 숨이 막히는 줄 알았어요. 애가 다섯이나 있으니까, 정신 줄을 놓지 않으려고~ 그때는 눈물도 안 났어요. 지금 말하려 하니까 가슴이 미어져요.
손명홍/손유형의 아들: 민단에 도움을 청하러 갔더니 당신들은 스파이 가족이라면서 냉대하고 제주도의 친척들도 마을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했고 친척들도 오지 말라고 선을 그었어요. 일본에 있는 친척들도 등을 돌렸다.
해설: 가족도 간첩 방조죄로 발표되어 면회 조차 갈 수 없었고 손유형은 17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병든 몸으로 돌아왔다. 사업가로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스파이의 낙인을 안은 채 2014년 생을 마감했다. 가족은 4년전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기자: 어머니는 재심을 어떤 기분으로 기다립니까?
부신화: 남편의 죄를 없애주고 싶어요. 죄없는 영혼으로 보내면 좋겠어요. 사형수의 기록이 남았잖아요. 그 기록은 세월이 지나도 남는 거잖아요. 그 기록을 지우고 싶어요. 아들 딸도 손자들도 있는데~아버지 할아버지가 스파이로 사형선고 받았다는 기록을 지울 수 있길 바랍니다.
오사카(大阪),
해설; 간첩죄는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멍에였다.
김효순: 안녕하세요
해설: 최지자는 4년전,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 온 걸 처음 알았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인데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최지자: 늘 이상했던 게 오빠가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고생했다. 나를 돌보지도 않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없었던 시기가 있었구나 싶었어요. (최창일),
해설: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지질학과 강사로 취직한 재일동포 2세 최창일은 1974년 4월,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
가나가와현 후지사와,
해설: 6년의 수감생활 후 최창일은 가족을 데리고 한국인이 드문 후지사와에 정착했다.
기자: 아버지는 아주 고독한 삶을 사신 듯 해요.
최지자/최창일의 딸: 누구랑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한국인이 없는 곳을 찾아서 살았어요. 한국인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해설: 최창일은 후지사와에서 보습학원 강사로 일했고 뇌종양으로 57년의 생을 마감했다. 한국에서 만난 아내는 지금도 후지사와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고 있다.
최지자: 엄마가 아직도 한국을 무서워해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한국에 안 갔어요. 사실은 내가 아버지 재심을 준비한다고 하니까 불같이 화를 내셨어요. 살해당할 거라고~ 한국의 국가권력이 우리를 없애버릴 거라고~
최지자: (일본학교 직장에서) 장애인 수첩을 발급받으면 어떤 혜택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최지자: 어머니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이삼일 잠을 못 자고 집에서 날뛰는 상태가 되니까 오빠는 엄마 앞에서 아버지 이야기 꺼내지 말라고 공포에 여전히 갇혀 있고 오빠도 아버지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스무살 무렵부터 우울증에 빠져서 일도 하지 않았어요. 가족 모두가 트라우마를 안고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이제는 슬슬 끝내고 싶어요. 이번 재심 재판으로 먼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해서 엄마도 오빠도 멈춰진 인생을 다시 살기를 바라고 저도 이제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고 싶어서 재판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유영수/1977년 체포: (식당운영) 오늘은 파격적으로 시간 무제한! 뭐든 있으니까 마셔!
손님: (농담) 무료로 주는 거야?
유영수: 석방되어 35년! 완전히 할아버지가 되었어, 하지만 마음도 청춘, 한국에서 체포되었을 때 시간이 멈췄어~ 육개장 두개~
해설: 리쓰메이칸 대학을 졸업한 유영수는 부산대 대학원 화학과로 유학을 갔다.
유영수: 볼살 불고기 맛이 어때요?
손님: 맛 있어요.
유영수: 한국여행 갔다 와도 우리 집이 더 맛 있다고 해~ 이건 내 과찬이고~ 죄송합니다.
해설: 조국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 뜨거운 청년이었다. 유영수는 같은 동포 유학생의 친척인 광주보병학교 교장을 찾아가 남북한의 군 당국이 판문점에서 협상해야 한다는 내용을 적은 편지를 건넸다.
유영수: (교장이) 권총을 꺼내서 제 이마에 대고 “꼼짝 마!” 그래서 그냥 끌려간 거죠. 신문발표를 보고 제가 많이 반성했어요. 이렇게 이용하는구나. 내가 모자란 거죠. 나 하나로 그치지 않았구나. 내가 어리석었죠. 그 후회가 지금도 남고 교도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제 고민은 그것이었습니다.
해설: 함께 조국 유학 중이던 친동생과 동생의 친구들도 모두 엮어서 간첩단 사건이 만들어졌다. 유영수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고문의 후유증보다 후회와 미안함으로 수감생활 내내 고통스러웠다.
유영수: (식당에서) 배추김치는 다 떨어지고 양배추 김치가 남았어요. 이것도 맛 있어요. 내가 광주교도소에 들어갔는데 우리는 거기서 만났어요.
손님: 부인을?
유영수: 아내도 사실은 불쌍한 사람이에요. 한국은 남북이 갈려 있잖아요. 원래 한 나라였어요. 분단으로 생이별을 했던 친척이 북에서 찾아왔는데 신고를 안 했다는 죄에요. 만나기만 해도 죄가 돼요. 일본에서는 없는 법이에요. 우리 나쁜 사람 아니야! 오해하면 안돼! 큰 사촌 오빠가 비밀리에 찾아왔답니다. 세 명이 북에서 내려 왔는데 세 명 중 한 사람이 사촌 오빠를 포함해 두 명을 죽이고 자수했다고 그래요. 거문도에 비상이 걸리고 가족이 다 잡혔다고 그래요.
방송: (거문도 간첩사건/1976년 9월): 중앙정보부는 前북한괴뢰노동당 정치공작원 김용규씨가 자수했다고 발표 했습니다. 김용규씨는 지난 9월 17일 북한괴뢰 공작선 편으로 전라남도 거문도로 침투해 동료 간첩 두명을 사살하고 귀순했으며~~ (김용규씨의 기자회견장에서)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김영희/유영수씨의 아내: 마지막 날에 저도 사촌 오빠 일행을 봤어요. 우리 집을 떠난 지 10분 쯤 지나 총소리가 났어요. 그래서 엄마가 아이고 우짜꼬 이제 우리 다 죽나 보다. 교도소 가기 전에 서울구치소에서 재판 받으러 왔다 갔다 하잖아요. 면회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앞방에 긴급조치 위반학생들이 먹을 거를 나눠 주잖아요. 못 먹고 다 모아 놓았다가 재판 받는 날 엄마 줘야지 아버지 줘야지~
해설: 김영희는 3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1980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김영희: (묘지로 가는길) 유영수씨가 저보다 4년 후에 나왔거든요. 나와서는 결혼해 달라는 거예요. 이 아저씨가 나사가 하나 빠졌나? 감옥 안에서 몇번 봤다고는 하지만~ (손녀에게~ 할아버지의 엄마 아빠가 여기 잠들어 있어~)
유영수: (손녀에게) 시우도 여기서 절한 적 있지?
김영희: 결혼식 때 유영수씨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서 읽는 거에요 영희는 자기가 책임지고 데려간다고~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끌려 대한해협 건너는 게 아니라 행복을 안고 데려갈 테니까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잠 드시라고~
김영희: (집에서 식사하면서) 잘 먹겠습니다.
유영수: 건배해야지, 늘 하잖아? 평상시처럼 똑같이 해야 돼!
김영희: 부끄러워서~
유영수: 같은 비극을 겪은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 그게 사명이라기 보다도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김영희씨를 택했죠. 좀 부끄러운데~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은 130여 명이다. 2010년부터 재심이 시작되었고 재심을 신청한 36명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재인/대통령 오사카 교포간담회 방문(2019년 6월 27일), 이철, 이종수, 강종헌 등과 악수,
문재인: 독재권력의 폭력에 깊이 상처 입은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분들과 가족분들께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효순; (김승효를 향해) 한국도 이제는 완전히 변했어요. 이제 안심하고 한국에 오셔도 됩니다.
김승효: ??
해설: 2020년 12월 26일 새벽 김승효는 심부전으로 숨을 거두었다.
김승홍/김승효의 형: 동생도 이런 삶을 살 줄은 몰랐을 겁니다. 한국에 갈 때는 꿈을 안고 떠났어요. 이렇게 되리라고는~ (관을 잡고)어머니 아버지 보러 가자~ 이제 겁내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랑 쉬어!
스파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재일동포 양심수-고난과 희망의 길
엄혹했던 권위주의 통치가 자행되던 1970~1990년대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수감돼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남북을 가르는 물리적 분단선이 없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일본 사회 풍토에 익숙했던 이들은 수십 일에 걸쳐 완전 고립된 밀실에서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며 ‘자백’을 요구 받았다. 구체적 물증없이 간첩혐의가 들씌워진 이들에게 징역 10년형은 그야말로 보통이고 사형, 무기의 중형까지 가차없이 선고됐다.
끈질기게 벌어진 국내의 민주화 운동을 위축시키려는 의도로 엮어내던 재일동포 관련사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유학생 사건이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 행정기관에 불려가 외국인 등록 명목으로 지문을 찍어야 하는 등 유-무형의 구조적 차별에 절망했던 이들은 정체성 혼란기를 거쳐 자의식을 깨치자 미지의 활로를 모색하려고 모국 유학길에 올랐다. 본국인들의 삶 자체가 팍팍했던 그 시절 유학생들은 동포의 따듯한 손길을 느껴보기는커녕 어느 날 갑자기 공안기관에 끌려가 강압수사를 받았다.
극형을 선고받고 길게는 거의 20년에 이르는 기간을 철장 안에서 썩어야 했던 이들의 청춘~~~중단~~~(KBS 다큐인사이트 79회 스파이에서 정리).
① 해방 후 60만 명의 동포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차별과 설움 속에서 성장했다. 성장한 아이들은 모국 유학을 선택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는 학원침투 간첩단 21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 오던 북괴간첩 일당 21명을~ 불법 연행과 고문, 그리고 한국 사회의 외면 속에서 젊은이들은 죄인이 되었다. 이철은 1975년 체포 되었다. 재일동포 2세 이철은 1967년, 주오대학 이공학부에 입학했다. 주오대학에는 코리아문화연구회라는 동포학생 모임이 있었다. 선배의 권유로 모임에 나갔다가 이철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포 학생들은 모두 한국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이철은 학적과에 가서 나는 사실은 이철이라고~~ 후회하지 않냐? 후회 안한다고~그때부터 학생증의 이름을 한국인으로, 조선 사람으로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였다, 대학을 마친 이철은 한국 유학을 결심했고 1973년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유학생활 중 숙명여대생 민향숙을 만나 연인이 되었다. 이철은 대학원을 졸업하는 1976년 3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생각지도 못한 운명이 찾아왔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끌려간 곳이 남산인 줄도 몰랐다. 무조건 때렸다. 결정적인 것이 너 약혼녀 있지?약혼녀 하고 장모하고 데리고 와서 발가 벗기고 네가 보는 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범할까? 너 북한에 갔다 온 거 맞지? 네, 갔다 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네, 갔다 왔습니다. 몇 번 갔다 왔어? 두번 갔다 왔습니다. 세번 갔다 온 거 아냐? 네, 세번 갔다 왔습니다. 이철은 혀를 끊어 자살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허위자백으로도 약혼녀를 지킬 수가 없었다. 1977년 3월, 이철은 대법윈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약혼녀 민향숙은 방조죄로 3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민향숙은 사형수인 약혼녀의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철은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 되었고 1988년, 13년의 감옥생활 끝에 특사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지 20여일 후 명동성당에서 이철과 민향숙은 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김수환 추기경이 혼배성사를 집전해 주었지만 이철의 부모님은 일본에서 오지 못했다. 사형선고에 충격을 받은 부모님은 수감기간 동안 세상을 떠났디.
② 재일한국 양심수동우회 1970~80년대에 체포된 재일동포 정치범들의 모임, “조국이 버린 사람들”의 저자 김효순 작가, 제가 이 모임에 처음 온 것이 5년 반 전이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관해서 책을 써달라고 부탁 받았지만 주저하고 있었다. 여기 와서 오랜 감옥생활을 한 재일동포 정치범 외에도 일본인 지원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며 이 이야기는 내가 반드시 써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조국이 버린 사람들]을 출간, 강종헌(1975년 체포) 강종헌은 열네 살이 되던 해 재일 한국인의 현실에 눈을 떴다. 그 당시 열네 살이 되면 지문 날인을 해야 했다. 그때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그 순간에 내가 받은 수치감보다 분노의 마음이~ 그날 이후 나가시마라는 일본 이름을 전부 지우고 본래 성인 강으로 썼다. 그때 나이로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그것뿐이었다. 그래 알았다. 내는 조선 사람으로 살겠다. 강종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4월, 조국 땅을 처음 밟았다. 1년간 재외국민연구소에서 한국어를 베운 후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조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인생을 꿈꾸었다. 그런데 1975년 11월 28일, 강종헌은 보안사로 연행되었다. 혐의 내용이 자꾸 커져 가는 거다. 혐의 내용이라는 게~ 사건을 크게 만들려고 평양에 갔다 왔다~노동당에 입당했다~ 지하조직을, 서울대 의대 내에 통혁당 조직을 만든다~ 그게 그 사람들의 제일 큰 목적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사건이 커지니까 그것을 하기 위해 물고문이 있고, 전기 고문이 있고 정해진 코스다.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나는 공포심 밖에 없고 그래도 내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때릴 때 머리는 때리지 말아 달라, 손은 다치게 하지 말라고 그 부탁만 했다. 그렇게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건데~11.22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45주년 집회가 오사카에서 열렸다. 재일 동포 조용수는 5.16 군사정변 이틀 후에 체포되어 일본에서 총련과 북한의 영향을 받았고 그 비밀 자금으로 민족일보를 발간한 북의 스파이라는 날조 사건으로 그 해 12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8년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 31세의 뛰어난 언론인이 어떤 심정으로 서대문 형무소 사형집행장으로 끌려 갔을지~어떤 심정으로 조국의 마지막 하늘을 올려 봤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25살에 사형수가 되었던 강종헌은 13년이 넘는 감옥생활 끝에 가석방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강종헌은 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사형수로 있을 때 내 앞에서 많은 분이 먼저 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분들이 못다한 뜻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겠다.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과제를 푸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으면 내 감옥살이가 무의미하지 않겠다. 그렇게 사는 것이 먼저 가신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인간적인 도리가 아닌가 싶었다.
③ 이종수는 1982년 체포되었다. 교토에서 나고 자란 이종수는 일본식 이름으로 일본 학교를 다녔고 학교의 친구들은 성격 밝은 이종수가 재일한국인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일본인 행세를 하는 삶은 늘 거북했다. 한국사회를 직접 몸으로 경험해야 한국 사람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일본의 대학을 그만두고 고려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82년 11월 6일, 스물네 번째 생일에 하숙집으로 보안사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보안사 지하실에서는 물고문과 전기 고문에 이어 성고문까지 더해졌다. 진짜 엄지 손가락에 전선을 하나 묶고 성기에도 또 하나를 묶었다. 갑자기 전기 스위치를 누르니까 성기가 찢어지는 줄 알고~ 이북에 갔다 왔다고 했다. 어디서 배 탔냐? 오사카만에서 탔습니다. 그랬더니 수사관들이 오사카만에 이북에 가는 배가 있나? 자기들끼리 수근수근 이야기 하더라고요. 너 혹시 오사카만이 아니라 니가타 라고 아냐? 웃기는 이야기인데~ 네, 맞습니다. 니가타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어디서 내렸어? 어디서 내렸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너 혹시 원산이라고 안 들어봤냐? 들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래~ 이종수는 일본의 가족도 알지 못한 채 38일간 보안사에 불법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고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검사가 이종수는 극악비도해서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었고 저항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젊은이들의 인생이 짓밟히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증인이 있었다. 김병진씨다. 그는 보안사에서 직접 참여한 간첩수사 과정을 폭로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재일동포 3세 김병진은 1983년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되었다. 김병진의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탐낸 보안사는 통역요원으로 일하라고 강요했다. 김병진에게 협박을 했다. 네 마누라는 윤락녀로 떨어뜨리고 100일도 안된 아기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게 해서 고아원에 보내겠다~ 김병진은 2년간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통역으로 일했고 1986년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일본에서 보안사 요원들의 추적을 피해 숨어 살며 1년간 책을 썼다. 그의 책 <보안사>는 재일동포 간첩조사의 실상을 기록했다. 보안사 수가2계는 각대학의 유학생 명단을 파악한다. 그 중에서 적당히 고른다. 뚜렷한 혐의가 있는 사람은 없다. 간첩은 잡는게 아니라 만드는 거다. 만드는 것도 어설프게 만든다. 실제로 재판을 하면 앞뒤가 안 맞고 조작이라는 게 탄로가 나는데 그 당시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였다. 사법부가 보안사 눈치를 보면서 재판하는 모양새였다. 교포로서 잡힌 사람들 수없이 많지만 운이 안 좋았다.
④ 김승효/1974년 체포, 김승효는 리쓰메이칸대학 철학과를 중퇴하고 1874년 3월, 서울대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조국에서의 대학생활을 시작한 지 두 달 후 중앙정보부에 강제연행되었다. 징역 12년을 선고받았고 1981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어 일본의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놓쳐버린 정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김승홍 (김승효의 형)은 어머니 아버지가 많이 우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동생 걱정을 했다. 한국가서 이상한 일에 말려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본인도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고 갔으니까 체포되었다는 이야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김승효는 나는 한국에 가서 아무 것도 안 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안 했다. 신문을 봐도 티브를 봐도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한국 학생들과 정치 이야기를 한 적도 없다. 죄가 될 어떤 말도 한 적이 없다. 중앙정보부가 체포해서 고문을 많이 했다. 석방할 때 정보부 사람이 일본에 가서 고문에 관해서 말하면 한국으로 다시 끌고 올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간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갔던 동생, 부모 형제가 유학 자금을 마련해 한국으로 보냈다. 정신분열증과 간첩의 낙인을 안고 돌아온 김승효는 21년 동안 정신병동에서 생활해야 했다. 조국은 김승효의 청춘도 정신도 모두 빼앗았다. 1970년대, 북에서 내려오는 간첩이 줄어들자 정보기관은 일본을 경유한 우회침투에 주목했다.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어항 속의 물고기였다. 한국에 유학을 가는 아들한테는 부모님이 은근히 기대했다.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오면 우리 집안의 인물이 될거라고~ 정보기관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재일동포 여학생들에게도 간첩혐의가 씌워졌다. 한국 물정에 어두웠던 여학생들은 밀실에서 야만적인 폭력을 당했다. 수감생활이 끝난 여학생들은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연락을 끊고 사라져 버렸다. 히가시오사카(東大阪), 한국의 법원도, 언론도 외면했던 재일동포 젊은이들, 그들을 위해 일본인들이 움직였다. 다무라 고지는 1970년대 재일동포 정치범들의 구원활동에 뛰어들었다. 히가시오사카 국제공생네트워크, 지난 10년간 히가시오사카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늘어났다. 외국계 주민들이 공평한 행정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모국어로 된 서류제작을 시청에 요구했다. 학생운동을 하던 다무라는 대학을 중퇴하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재일동포 여성 노동자와 결혼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재일동포 노동자의 형이 한국에서 구속되자 시민들과 노동조합의 힘을 모아 구원운동을 전개했다. 조국에서 모국어를 배우고 민족성을 획득해서 일본에서의 민족차별을 타개하려고 했던 청년들을 군부정권은 불법적으로 연행하고 가혹행위를 해서 유죄판결을 내린 것에 분노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각지에서 구원회를 결성했다. 집회와 서명운동 단식투쟁을 전개했고 외교적 해결을 요구하며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현수막: 한국 박정권은 전정치범을 즉시 석방하라!
⑤ 구원회를 결집한 일본인들은 한국에 연고가 없는 재일동포 젊은이들을 위해 법정에 함께 들어갔고, 수감생활을 뒷바라지 했다. 구원회는 지금도 이어져 한국에서의 재심을 지원하고 있다. 스파이라는 낙인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1981년 4월, 작은 공장을 운영하던 손유형은 한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었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손명홍(손유형의 아들)이 민단에 도움을 청하러 갔더니 당신들은 스파이 가족이라면서 냉대하고 제주도의 친척들도 마을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했고 친척들도 오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일본에 있는 친척들도 등을 돌렸다. 가족도 간첩 방조죄로 발표되어 면회 조차 갈 수 없었고 손유형은 17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병든 몸으로 돌아왔다. 사업가로 다시 일어서지 못했고 스파이의 낙인을 안은 채 2014년 생을 마감했다. 가족은 4년전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최지자는 4년전, 아버지(최창일)가 감옥에 갔다 온 걸 처음 알았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인데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지질학과 강사로 취직한 재일동포 2세 최창일은 1974년 4월,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었다. 6년의 수감생활 후 최창일은 가족을 데리고 한국인이 드문 후지사와에 정착했다. 최창일은 아주 고독한 삶을 살았다. 누구랑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없는 곳을 찾아서 살았다. 한국인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최창일은 후지사와에서 보습학원 강사로 일했고 뇌종양으로 57년의 생을 마감했다. 한국에서 만난 아내는 지금도 후지사와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고 있다. 가족 모두가 트라우마를 안고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번 재심 재판으로 먼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해서 엄마도 오빠도 멈춰진 인생을 다시 살기를 바란다.
⑥ 유영수는 1977년 체포되었다. 리쓰메이칸 대학을 졸업한 유영수는 부산대 대학원 화학과로 유학을 갔다. 조국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 뜨거운 청년이었다. 유영수는 같은 동포 유학생의 친척인 광주보병학교 교장을 찾아가 남북한의 군 당국이 판문점에서 협상해야 한다는 내용을 적은 편지를 건넸다. 그런데, 교장이 권총을 꺼내서 제 이마에 대고 “꼼짝 마!” 그리고 그냥 끌려갔다. 신문발표를 보고 내가 너무 순진했고 모자랐고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이용하였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재앙을 당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그게 후회가 남고 교도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고민이었다. 함께 조국 유학 중이던 친동생과 동생의 친구들도 모두 엮어서 간첩단 사건이 만들어졌다. 유영수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고문의 후유증보다 후회와 미안함으로 수감생활 내내 고통스러웠다. 유영수는 아내를 감옥에서 만났다. 분단으로 생이별을 했던 사촌 오빠가 남파되어 비밀리에 찾아왔다. 세 명이 북에서 내려 왔는데 세 명 중 한 사람이 사촌 오빠를 포함해 두 명을 죽이고 자수했다, 거문도에 비상이 걸리고 가족이 다 잡혔다, 1976년 9월, 중앙정보부는 前북한괴뢰노동당 정치공작원 김용규가 자수했다고 발표했다. 김용규는 지난 9월 17일 북한괴뢰 공작선 편으로 전라남도 거문도로 침투해 동료 간첩 두명을 사살하고 귀순했으며~ 마지막 날에 사촌 오빠가 김영희씨 집을 찾아왔다. 집을 떠난 지 10분 쯤 지나 총소리가 났다. 김영희는 3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1980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유영수는 김영희를 택해 결혼했다.
⑦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은 130여 명이다. 2010년부터 재심이 시작되었고 재심을 신청한 36명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스파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재일동포 양심수-고난과 희망의 길=엄혹했던 권위주의 통치가 자행되던 1970~1990년대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수감돼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남북을 가르는 물리적 분단선이 없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일본 사회 풍토에 익숙했던 이들은 수십 일에 걸쳐 완전 고립된 밀실에서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며 ‘자백’을 요구 받았다. 구체적 물증없이 간첩혐의가 들씌워진 이들에게 징역 10년형은 그야말로 보통이고 사형, 무기의 중형까지 가차없이 선고됐다. 끈질기게 벌어진 국내의 민주화 운동을 위축시키려는 의도로 엮어내던 재일동포 관련사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유학생 사건이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 행정기관에 불려가 외국인 등록 명목으로 지문을 찍어야 하는 등 유-무형의 구조적 차별에 절망했던 이들은 정체성 혼란기를 거쳐 자의식을 깨치자 미지의 활로를 모색하려고 모국 유학길에 올랐다. 본국인들의 삶 자체가 팍팍했던 그 시절 유학생들은 동포의 따듯한 손길을 느껴보기는커녕 어느 날 갑자기 공안기관에 끌려가 강압수사를 받았다. 극형을 선고받고 길게는 거의 20년에 이르는 기간을 철장 안에서 썩어야 했던 이들의 청춘~~중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