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땐, 책』
김남희
에필로그_
나는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80일간의 세계일주』
여행의 힘, 책의 힘을 믿는 여행작가 김남희
우리를 겸손하고 강인하고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내 인생의 필수품 두 개를 고른다면 여행과 책이다.
근사한 집이 없어도,
든든한 통장이 없어도, 다정한 연인이 없어도,
독서와 여행이 가능한 삶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에게 여행과 독서는 다르지 않다.
여행은 몸으로 읽는 책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기에.
책도, 여행도 더 넓은 세계를 열어주는 문이다.
문 너머에 어떤 만남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어 책을 펼 때도,
여행을 떠날 때도 매번 심장이 쫄깃해진다.
책과 여행을 통해 나는 타인의 마음에 가 닿고,
지구라는 행성의 신비 속으로 뛰어들고,
인류가 건설하거나 파괴한 것들에 경탄하고 분노한다.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 본문 중에서
심하게 낯을 가리는 내가
처음 만난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 흘릴 때,
내 안의 신전에 반짝 불이 들어온다.
편식이 심해 집에서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음식을
최고의 진미인 양 감사하며 먹을 때,
나는 조금 더 착해진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의 사소한 것들―
뜨거운 물 샤워, 운동 후의 달콤한 디저트,
마음이 내키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가족 같은―
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달을 때마다 겸손해진다.
산티아고에서 내가 찾은 건
내 안의 더 선한 존재였다.
꼭 끌어안아 주고 싶은,
감사할 줄 알며 나눌 줄 알며 겸손하기까지 한 나.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문득 반짝이며
제 의미를 키우는 순간이
내게는 영적인 순간이었다.
27쪽
리스본에 가기 전이나 리스본에 다녀온 후면
늘 리스본에 관한 책을 찾아 읽었다.
리스본의 매력을 잘 드러내면서도
그 너머의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역시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삶을 바꾸는 한 번의 여행에 관해
이토록 진지하게 파고든 책은 없었기에.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와 같은 고전의 세계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온 남자 그레고리우스.
매일 아침 8시 15분 전이면 학교로 향하는
시계추 같은 삶을 살아왔던 그가
우연히 마주친 포르투갈 여성과
어쩌다 손에 들어온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포르투갈어 책으로 인해
평생 살아온 도시를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책 속 문장에 꽂힌 그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67쪽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제 삶의 무게를 껴안고 살아간다.
때로는 찰나의 희열에 젖기도 하지만,
일상의 대부분을 우리는 외로워하거나
상처를 주고받으며 흘려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것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자매들처럼
누구의 탓도 하지 않으며
매 순간을 충실히.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타인의 온기에 기대어,
그렇게.
네 자매의 아버지처럼 우리 또한 어떤 순간에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그 마음 하나만은 끝내 지켜낼 수 있기를.
130쪽
불빛이 비치는 서점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드넓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슬며시 서점 안을 둘러보며
주인의 취향을 가늠해볼 때면
나쁜 짓이라도 하는 듯 심장이 두근거린다.
시류에 호응하는 책들 사이에 놓인 비주류의 책이
고집스러운 주인의 취향을 은근히 드러낼 때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소중히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취향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빼내 손에 들 때면
묻어 있는 먼지조차 사랑스럽다.
맨 뒷장을 넘겨 몇 쇄를 찍은 책인지
슬쩍 확인할 때면
안도와 슬픔이 동시에 치민다.
이 좋은 책을 읽은 이들이 겨우 이것뿐이라니.
이 책을 발견한 사람은
75억 인구 중에 고작 수천 명.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들과 나는 그 순간,
작은 비밀을 나눈 것 같은 관계가 된다.
137쪽
끝을 알지만 멈출 수 없어 달려가는 순간에야 드러나는
자신 안의 낯선 얼굴을 우리는 모두 마주한 적이 있다.
우리의 삶 또한 죽음이라는 결말을 알면서도
달려가는 기차에 불과하다.
인생의 레일 위에 서 있는 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단지 조금 덜 외로운 죽음과 조금 더 편안한 죽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사계절이 있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무성해지다가
마침내는 시드는 날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갈 수 있는 곳까지 묵묵히 걸어가기.
끝을 알면서도 감당해내는 태도가
결국 성장의 증거가 아닐까.
내가 인생에 대해 아는 유일한 사실은
삶의 길목 어딘가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냉혹한 진실뿐인데도
나는 삶을 감당한다.
여행의 끝은 결국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나는 늘 다시 떠난다.
한 번 떠났다 돌아올 때마다
집은 조금 더 아늑해지고 일상은 더 애틋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은
조금씩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166쪽
겹겹의 모순이 쌓인 장소일수록 한 권의 책이
몇 번의 여행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
소설은 계급과 정치, 종교라는 거대한 것들이
연약한 이들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작은 것들의 신”에게 기대어 버텨오던 일상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를 심장이 죄어들 만큼
생생하게 묘사한다.
174쪽
예스24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