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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3일 미디어 사역팀 시무예배(주일연합) 설교: 김성현 감독
미디어 사역과 교회의 미래
(고린도전서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오늘 이 시간에는 연합 예배를 ‘미디어 사역팀 시무 예배’와 겸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미디어 사역’이라는 것은 조금 후에 더 자세히 설명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AI를 비롯하여 SNS를 통한 다양한 나눔이 활발해지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원동력과 그 핵심적인 엔진 요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귀로 듣고 눈에 보이는 것, 매일의 삶의 거의 대부분이 미디어 사역팀이 하는 일의 성격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미디어를 통해 하는 일들을 어쩌면 매일, 거의 매시간, 직장에 나가는 분들은 거의 매시간 접하고 있는 셈입니다. 미디어 시대는 이미 도래한 지 한참 되었습니다. 이제는 바로 미디어가, 미디어의 어떤 성격의 활동들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미디어가 갖는 우리의 삶에서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락교회,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가 미디어 사역을 갖고 서로 얼굴 볼 때마다 확 떠오르고 반짝반짝하긴 하는데, ‘뭘까? 어떻게 갈까?’ 하고 서로 주저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아직 열어보지 않은 귀한 열매들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대단한 감격과 기대 속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이 미디어 사역팀의 예배,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함께 꿈꾸고 있는 것들은 단순한 개인의 꿈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꿈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가능한 한 많은 마음을 나누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각자 맡겨진 역할이 있지만, 미디어 사역팀은 우리 전부를 하나로 묶어 미디어 사역이라는 옷을 입히고 미래로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만큼 효율적이고, 이만큼 강력한 전도 방법도 없습니다. 오늘날 전도 방법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기관이 오늘 시무 예배를 드리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문제를, 우리 성도들의 고민을, 그리고 실제적인 헌신을 통해 만들어 가는 과정을 우리가 함께 조력하고 이해하며 함께 달려가야 합니다. 이 시간은 어쩌면 짧게 지나갈 수 있지만, 우리의 번영하는 미래를 미리 얘기하는, 놀라운 예측력을 가진 예배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이끄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모든 이방인들도 포함하여 주의 나라를 구성하시겠다는 뜻을 밝히셨습니다.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인류를 구원하는 계획에 전념하십니다. 마치 미디어 사역팀이 전념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전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분이시고, 영원히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제자들을 길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을 만한 제자 열한 명을 남기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이렇게 하라.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라.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을 전파하라. 온 세상으로 나아가라. 내가 곧 다시 올 것이다. 너희의 수고를 내가 기억하고 보상할 것이며, 너희는 내 아버지 집에 있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을 따라 우리도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주의 제자들로서, 또 다른 별칭으로 불리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로열 스테이터스(royal status)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가장 감동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직속 제자들로부터 직접 주님의 가르침을 전수받았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신 명령을 그대로 이어받아,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가르치고 전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성경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성경의 범위와 성격 안에 완전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교와도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규명할 수 있는 모든 자료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하는 일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영혼 구원.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구원을 얻는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설교단에서 누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 하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주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누가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생명을 주신 분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그가 정해 주셨고, 구해 주셨고, 준비해 주셨으며, 영원한 나라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구원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름대로 근사하게 거룩한 삶을 만들어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신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사명, 다윗 왕을 통해 주신 사명, 그것도 다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오셔서, 친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단순히 죽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너희가 내 일을 하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나의 존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으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주님께서 명하신 사명에 여러분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높이거나, 명예를 높이거나, 기회를 얻거나, 거룩하게 보이거나, 공력을 쌓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그것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땅에 남겨두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다음 제자들에게 계속 전하라” 하셨고, 그 말씀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손의 상처와 옆구리의 상처를 가지신 그분을 우리 앞에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영광이며,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쓰러지고, 문드러지고, 찢어지는 것.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버려지는 것. 그렇게 버려져야만 저 하늘에서 기억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다 기억하고, 다 칭찬받고, 다 위로받고, 다 얻을 것을 얻었다면, 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한 걸 보니 정말 네 자신을 내주지 않은 것 같다.”라고 분명히 판정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죽고, 아무도 모르게 고생하다가 혼자 코피 터지다가, 코피 나는 병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비참하다고 보겠지만, 그것은 세상의 시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릅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육신이 병들고, 노화되고, 망가진다 할지라도, 그 영혼은 귀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나신 이후에, 주를 위해 쓰임 받은 영혼은 귀한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의 것입니다. 주의 의를 위해 고난받고, 의를 위해 핍박받고, 의를 위해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 이들은 천국에 합당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전해줄 것입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신앙은 여러분과 나, 모두가 같은 신앙 노선을 가야 합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의무를 가지고, 같은 개념과 분명한 정의를 가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나와 개념이 다르면 안 됩니다. 잠시라도 좌로나 우로나 벗어난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과 나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것이고, 나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으며, 지옥에 갈 것이냐, 주님 품에 들어갈 것이냐의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맡기신 일, 그가 우리에게 시키신 일을 평생, 죽도록 감당해야 합니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포괄적인 하나님’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우리 힘을 다해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그들이 신앙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의 자부심과 전통을 우리의 유니폼으로서 가지고 그 전통을 키워가고, 노하우를 전수할 때 우리가 강력한 모습을 만들어갈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알아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 이 모든 것은 주님과 무관하게 내 생각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우리의 목숨, 우리가 맞이할 미래,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인생의 경험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할당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위한 삶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내 삶이 내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난 이후로 우리 삶이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주님을 배반하는 자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꿈꾸는 자라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만난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나는 지옥에 갈 자였구나. 저주받은 자였구나. 어둠 속에서 멸망으로 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져야 합니다. "날 구원하신 것을, 평생 동안 전하며 살겠습니다. 그의 은혜를 선포하며 다니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도와주십시오. 나를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나의 생각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게 해 주십시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나를 지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도록 싸우지 않으면 망합니다. 사람들만 있을 뿐, 아무런 영력도 없고, 천국에 속한 위력도 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천국의 그 엄청난 능력, 죽은 자를 살리고, 하늘까지 올리며, 세상을 불 속에 던질 때도 영광 중에, 영원한 행복 속에 살아남는 파워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버릴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망을 가지고, 꿈을 키워왔고, 애타게 기회를 바라던 이 세상을 우리는 노폐물처럼 여길 수 있을 정도로 근본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우리의 심령 속에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뭘 해야 합니까?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주님이 시키신 대로, 모든 효율성을 동원해 죄를 박멸하고 죄와 싸우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며 빠르게 전도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을 재촉하시며 “곧 돌아오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몇 달 안에, 혹은 늦어도 몇 년 안에 오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함없습니다. 전도입니다. 영혼입니다. 구원을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의 효력, 그가 십자가에서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전하는 것, 이것이 곧 영혼 구원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전도를 통해 성도들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영혼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계속 양육해야 합니다. 원래 우리는 마귀의 소굴에서 살던 자들이었기에,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연약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저주받은 마귀의 세상에 있지만, 영혼은 하늘의 음식으로 먹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양육은 필요하지만, 우리의 본 역할은 전도입니다. 전도하고,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성도들만 돌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나빠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기대감도 엄청나게 떨어졌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천주교나 불교보다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많지만, 엉터리들도 너무 많습니다. 성락교회는? 그 교회들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교회를 완전히 흙탕물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은 전도입니다. 앞으로의 미래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이라는 불필요한 장애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의 전국 어디서든 들을 사람이 있다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단이라고 비판받을 만한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과거에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설교를 하지 않은 지 거의 10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나는 주 예수께서 100% 기뻐하실 말씀만 전했습니다. 완전히 정통 신학의 흐름을 따라왔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한국에서도, 주님의 라인을 따라온 가장 굵은 메인 스트림의 말씀만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이단이라고 지탄받을 일은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십시오. 혹시나 한 마디라도 이단적인 말을 했는지. 지난 6~7년간을 보십시오. 단 한 마디도 정통 신학에서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나란히 앉아서 그들과 똑같은 말씀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단이라고 욕먹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단적인 말씀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늘나라의 말씀으로 양육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오명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 묻은 흔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화상을 입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걱정거리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전 세대는 우리와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으로 전부 쓰러뜨리고, 전부 녹여버리면 됩니까? 그렇게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이미 말씀을 들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자들이 교회를 부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교회를 속이고, 나를 속이고, 교회를 고소하고 고발합니다. 여기 있다가도 세상이 좋다고 나가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이렇게 전하면, 세상 사람들이 전부 흐물흐물해져서 들어오고, "여기 아니면 못 살아!" 하게 될까요?
우리는 주의 제자로서, 주의 제자 교회로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우리 교회에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충실한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최고의 신앙을 가지고, 정말 진실하고 충실하게 주님을 따르며, 조금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거룩한 양식으로 양육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힘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전해야 합니까? 구원 사역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미래를 걱정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계속 가는 것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회가 한때 부흥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생각, 이제는 그런 사고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옛날에 어떻게 전도했습니까? 부흥하고 성공하던 때, 개인들이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한 여성이 신앙을 갖고 교인이 되면,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남편 몰래 다녀야 했습니다. 남편에게 들키면 맞았습니다.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눈이 퉁퉁 부어 나타나곤 했습니다. 당시 남자들은 손찌검을 많이 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아내들이 맞고 울면, 전도사님들이 뒤에서 같이 울어주었습니다. 어디에서? 부엌에서. 부엌에 쪼그려 앉아서, 아궁이 앞에서 함께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자라면서 교회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 몰래라도 보내 주었습니다. 남편이 깊이 잠든 사이에, 아이들은 교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가면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리프레시(Refresh)된 모습으로 교회에서 돌아왔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신앙을 가지면, 남편들도 결국 설득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 가는 걸 좋아하니까, 아버지에게도 “아빠, 교회 가! 왜 안 가?” 하며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들은 처음에는 "으음… 갈 거야." 하면서 버텼지만, 결국에는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들이 “여보, 이제 교회 한 번 가요.”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싸우다가, 3년째가 되면 남편들도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서 전형적으로 이루어진 전도 과정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갈 곳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지만, 여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자들도 함께 술을 마셨습니까? 교회는 도피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갈 곳이 많습니다. 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쇼핑몰이 많고, 갈 곳이 많습니다. 시간 보낼 곳이 너무 많습니다. 나라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백화점에 가 보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물건을 삽니다. 돈을 너무 많이 써서 문제일 정도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돈이 없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들을 구원해 와야 하는데, 그냥 온다고요? 그냥 왜 옵니까? 아직도 옛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도층에 기성세대들이 남아 있으니, 그들이 계속 옛날 방식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것입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빠르게 변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유튜브 시대, AI 시대, SNS 시대입니다. 선택지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이 굳이 교회에 와서 "내 구원, 내 인생을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삶을 맡기고 "내 미래, 내 영혼, 내 운명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욕구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디든 갑니다. 돈이 있어야만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갈 곳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매력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를 교회에 데려와서, 말씀을 듣게 하고, 말씀으로 쓰러뜨리고, 그러면 교회에 다니게 될까요? 옛날처럼 찬양을 불러서 될까요? 억지로 사람을 데려왔는데, 수십 년 전에 유행하던 음악 장르의 찬양을 부른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질감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메시지를 한 번 들어봐." 해서 메시지를 전하면, 세상 사람들도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식 수준도 높습니다. 대충 좋은 말 몇 마디 던진다고 전도가 될까요? 그것은 과한 욕심입니다.
코로나가 닥친 이후,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언택트(Untact)’ 시대라고 하죠. ‘컨택트(Contact)’의 반대 개념으로, 이제는 대면 접촉을 최소화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꼭 교회를 다녀야 하나?’라는 듯이 종교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처럼, 돗자리만 깔아놓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예배드리던 시대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돗자리에서 신발을 잊어버려 가며 예배드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돗자리를 깐다고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교회에 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넘어서“왜 꼭 교회를 가야 하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교회에 직접 가지 않아도 마음이 그 어떤 참여자로 연결해주는 이 라인이 교회를 지켜왔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확대 돼 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은 교회자체보다 오히려 교회가 다루는 테크니컬한 미디어적 역량에 더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교회도 코로나 이후로 침체될 것 같았지만, 오히려 미디어 사역이 너무 잘되었습니다. 세상은 코로나 때문에 위축되었지만, 우리 미디어는 성도들을 살려냈습니다. 성도들의 사기를 살리고, 메시지가 살아 있도록 연결했습니다. 시대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뭔가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자꾸 우리 교회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때 조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조명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배 때 정말 하늘나라를 체험하는 것처럼 해 보자." 해서 조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니 다른 교회들도 모두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제일 먼저 했던 것 같습니다. 허허허, 착각일 수도 있지만. 다른 교회들은 "성락교회 이단이다." 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르는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찬양을 다른 교회들도 따라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요즘 정신이 이상해졌나? 잘 모르겠지만, 찬양도 잘 골라서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이제 그런 점을 평가합니다. 옛날의 고전적인 교회들도 있습니다.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이름을 가진, 근엄한 분위기의 교회들 말이죠. “(근엄한 목소리로) 목사님 나오십니다.” “누구 장로님께서 태초부터에 대한 기도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 하나님! 전~~능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락교회는 과거에 완전히 신흥 부흥교회였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당시에는 굉장히 앞서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그때의 틀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70년대, 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 시절의 성공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로망이 되어, 그때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 다음 세대가 교회를 이끌어야 할 시대가 왔습니다. 5년, 10년 동안 준비해 왔다면 이제는 직접 나서야 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기를 주지 않고, 전투하라고 하면서도 “무기 해제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나가야 합니다. 빠르게, 적극적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 MZ 세대, 그들은 이미 우리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철학은 지금부터 영원히 개척시대에 맞춰서 가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 저보다 똑똑하고, 더 에너지가 넘치고, 아이디어도 많고, 신앙도 더 강렬하게 폭발할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처럼 빛나는 모습이에요. 그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여! 주님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주님의 꿈이 내게도 이루어지리이다!” 이미 준비된 이들이 “감독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mz 세대에 대해 “너희가 인생을 좀 아느냐? 뭘 좀 알까?”라고 하는데, 저는 과거에 살던 사람이고, 그 영혼들은 지금 자신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들의 시간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그들의 시간입니다. 이들은 정서에 와 닿지 않으면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치가 맞아야 하고, 솔직해야 하며, 정직해야 되고, 정의에 맞아야 합니다. 높은 가치 있는 일에만 설득되며, 고귀한 일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요즘은 춤도 출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춤을 못 추면 직장에서도 적응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아유, 춤을 춰”라고 볼 게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춤을 추며) 감독님, 오늘 안녕하셨습니까? 오늘 잘 지내셨습니까?”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고 “얘, 무슨 병에 걸렸나?”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메시지를 넣어주실 것입니다. 각 영혼에게 말씀을 주시고, 각 영혼에게 헌신할 것을 명하실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가정이 있고, 자녀가 있고, 그들에게 딸린 다음 세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가장이, 또 엄마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음 세대로 준비되고 있는데?” 하고 나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게 “그냥 어르신들이 하던 대로 따라 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성락교회를 대표할 자들입니다. 이 한국 교회에서 성락교회를 부흥시킬 자들입니다. 우리의 오명을 씻고, 우리의 꺾이고 잃은 명예를 다시 세울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직속, 직계 제자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초창기에 부흥한 이유를 단순히 메시지 때문이라고만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 시절 우리 교회는 CCM과 복음성가를 엄청나게 불렀습니다. 우리 교회는 굉장히 세련된 교회였습니다. 이야기하자면 길어지지만, 우리는 그 시대에 가장 앞선, 가장 세련된 교회였습니다. 복음송을 너무 많이 불렀죠.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 노래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부른 교회 중 하나가 우리 교회였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 노래도 다 복음송이었습니다. 또 설교 중에도 “내게 강 같은 평화~” 이런 찬양을 계속 불렀습니다. 복음송이 넘쳐나는 교회였습니다. 예배 전에도, 예배 후에도 복음송을 너무 사랑하는 교회. 그 다음에는 온 나라가 복음송을 사랑하고. 그때 성락교회는 여러 가지로 세련됐습니다. 세상에서도 멋지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교회를 살린 것이지, 단순히 메시지만으로 부흥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틀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교회에서 CCM을 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교회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설명이 길어질 수 있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CCM이 부흥했던 시절에는 성락교회가 전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흥을 도왔던 CCM을 스스로 억제하면서 교회의 성장이 멈춘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제가 여러 교회를 다녀봤습니다. 건물은 크지만, 그 안에 노인들만 10명 정도 앉아 있는 곳도 많았습니다. 어디에 정착할지 고민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했지만, 어떤 곳은 정착하고 싶지 않더군요. 어둡고 졸린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예배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콘텐츠가 풍부한 교회도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 활기가 넘치고, 서로 교류하며 나누는 장이 마련된 곳. 아이들이 와서 어른들과 함께 노래하고 어울리는 패밀리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이거 좋다.’ 그래서 저도 그곳에서 오랫동안 봉사하며 활동했습니다. 활기찬 분위기가 있었죠.
그런 교회의 분위기 덕분에 옥스퍼드 교수들, 방송인들, 재력가들도 많이 왔습니다. 그들은 거기가 자기 수준에 맞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머리 하얀 할머니들만 앉아 있다면, 밖에서 보던 사람들이 “저도 함께 예배드리겠습니다.” 하며 들어올까요? 그렇지 않죠. 사람들은 자신보다 수준이 높거나 맞아야 관심을 갖습니다. 어느 교회든 가보면, 수준이 높으면 ‘아, 여기 뭔가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면, 수준이 낮거나 침체되어 있다면, 그 교회에 가고 싶을까요?
지금 이단 문제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가 정리된 후, 우리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마냥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현재 상황 때문에 당장 뭘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문이 꽉 닫혀 있었지만, 지금은 성락교회의 메시지와 콘텐츠가 미디어를 통해 확산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정보가 개방되어 있어, 사람들이 스스로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실력이 없으면 성락교회의 미래도 없습니다. 교회 건물은 이렇게 크지만, 거기에 걸맞은 기술과 실력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준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mz세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다음 세대가 어떻게 불릴지는 모르지만, ab세대든 cd세대든, 교회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전도도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의 오명을 씻어야 합니다. 승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승부하겠습니까? 교회가 세련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교회가 나보다 더 세련됐구나.’라고 느껴야 옵니다.
여러분이 성락교회에 대해 자부심과 기대, 자신감을 갖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보지 않는 동안에도 성도들이 엄청나게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자 있는 자리에서 헌신했지만, 특히 미디어 사역에 힘쓴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다’라고 믿고, 정말 죽을 고생을 하며 헌신해 왔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분들도 “오늘 시무 예배가 있다니까 가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지쳐 있는 영혼들이 와서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도 와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차갑고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부르신 자들이며, 주께서 사용하실 당신의 제자들, 아들딸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팠던 시간도 있습니다. 저 역시 많은 기억이 있습니다. 과거에 성락교회는 신앙 정신과 영적인 인성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교회를 위해 일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을 때, 얼마나 많은 거절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명해지기 전에는 교회에 머물러 있다가, 조금 유명해지면 “목사님, 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꼭 돌아올게요, 약속할게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지 말라”고 강요할 수 없었기에 “알았습니다.”라고 하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 축복이 다르게 사용되었다면, 그 사람의 운명을, 가정을, 앞으로 50년을 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며 축복 기도를 받아 떠났습니다. 내가 축복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보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손으로 축복하는 것 같아도, 내가 하는 축복은 다릅니다. 나는 그 차이를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많습니다. 사회에서 지위가 높아지면 교회에서도 그를 배려하며 “너무 바쁘시면 교회 자주 안 나오셔도 됩니다. 이 자리를 잘 유지해 주세요.”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축복했습니다. 축복을 하니 정말 그의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포지션이 굉장히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교회를 떠나갑니다. 우리가, 교회가 걸림돌이라도 되는가 봅니다.
또, 음악이나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이 생기면 떠납니다. 특히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매까지 데리고 갑니다. “금방 돌아올게요.”라고 해놓고 결국 돌아오지 않고, 다른 교회에 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 하나님을 뵙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사람들이죠. 세상에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정말 주님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은 5%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10%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무너질 때, 그들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 주님의 기이한 은혜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핍박했던 자들이 오히려 핍박을 당하고, 멸망할 것입니다. 반대로, 핍박받았던 자들이 영광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모두가 기이히 여기리라’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눈에는 그리스도가 직접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미래, 우리의 운명,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생명,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살려야 합니다. 살려주십시오.
나는 여러분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역사를 느낍니다. 미디어 사역을 통해 우리는 모든 소리를 듣고, 눈으로 보고,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집에서 교회 콘텐츠를 보고, 고구마를 까먹으며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는 땀과 정성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글씨 하나, 폰트 하나 넣는 것조차 신중하게 결정됩니다. 광고 하나 제작하는 것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에너지와 정성이 들어갑니다.
여기 쓰고 있는 마이크조차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돈이 들고, 노력이 들어갑니다.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직장을 포기하고,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헌신을 보고 “허튼 짓”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허튼 일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망할지라도, 우리는 주의 나라를 위해 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기억하시리라는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의 신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정하신 우리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과 위치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것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나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내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고, 주님의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미디어 사역팀을 인정하고, 그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격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들은 단순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우리 전체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목사를 속이고, 기회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이용해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이 자기 삶을 내어놓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서로 감동을 나누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2025년을 시작하는 시무예배를 드립니다. 2025년 한 해도 이와 같이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 우리 교회를 돌봐 주십시오. 교회를 대표하는 우리 모두를 지켜 주십시오. 필요한 자원을 허락해 주시고, 모든 재원과 능력을 공급해 주십시오. 믿음을 공급해 주시고, 행복을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와 함께하시고, 역사하여 주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들은 우리 교회 성도들 모두를 감동하시고, 또 도와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성락교회를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때 비록 시련의 기한들이 있고, 이렇게 아픔의 시간들도 있지마는, 또 더 소망의 시간이 있고 또 일어날 때가 있고, 또 성공할 때가 있는 것을 간절히 알고 우리 하나님이 이제는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저 미디어 사역팀 통하여서도 우리가 어려울 때도 이렇게 용기를 얻어왔고, 새로운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정말 앞서가는 우리 참 뭇 영혼들,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아직 냉랭하고 또 이렇게 여전히, 그러나 생명이 없는 저들을 구원할 수 있는 우리의 여건, 모든 환경, 모든 기술적 능력 다 구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가 이 마지막 세대에 주의 나라를 위해서 성락교회가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께 또한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많은 사역자들, 다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가 협력하여 주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며,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