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의 제기: Coram Deo 신앙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 (행 4:13-22)
- 들어가는 말씀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까?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와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님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이미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가 예수를 이단으로 결정내렸습니다. 따라서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또 다시 예수의 이름을 꺼낸 것은 목숨을 걸고 말한 것입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변증을 하는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줄줄 인용해 가며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용기 있게 증거하자, 이들을 심문하던 자들은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병이 나은 앉은뱅이도 증인처럼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으니, 심문하는 자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친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시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 무리는 더 이상 민간에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가르침이 퍼지지 않도록 베드로와 요한을 협박했습니다.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예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마시오.” 당시 이 종교재판을 진행한 자들은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판결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는 부활하셨으며, 그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자신들의 신념으로 “예수님을 부인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감수하고 예수를 따를 것인가?”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이 신앙고백은 사람들 앞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것입니다. 그것이 『Coram Deo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앞에서'라고 말합니다. (행3:19절)
1. 행전 3장20절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이 말은 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목숨을 걸고 하는 말입니다. 원래 이들이 이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아예 예수님을 버리고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잡이를 떠나 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베드로는 대제사장이나 공회원들, 로마군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옆에 같이 구경하던 힘없는 하인들, 어린 여자 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본문의 상황은 그 당시의 최고의 권세를 가진 공회원들이 “너희들 다시는 예수 이름을 들먹거리고 예수에 대하여서 가르치고 전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살벌한 상황입니다(17-18절).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용기있게 19절 '하나님 앞에서', 20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이렇게 용기있고 담대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람들로,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결단입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의 결단
그들은 주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망쳤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큰 능력을 체험하고도 주님을 떠나갔던 자들입니다. 옛날 물고기 잡던 본래 직업으로 낙심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한 21:12)고 하셨습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 일로 속상하여 야단을 치고 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자녀들에게 맨 먼저 하는 말이 '어서 밥부터 먹어라'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이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담대하고 용기있는 사도들로 변했고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본문 20절 자신들을 잡아 죽이려는 살벌한 공회원들 앞에서도 담대히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8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9절. “하나님 앞에서” 이 말을 ‘코람 데오’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 듣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재판정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담대히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하나님! 제가 지금 하나님앞에 서 있습니다.”
사람 앞에 서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당할 때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았습니다. 거기 보좌에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 『Coram Deo 신앙』이 없을 때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사람 앞에서』사는 자가 되고 맙니다. 할말을 못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아니오' 해야 할 때에 '아니오' 하고 '예'할 것은 '예' 해야 합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을 보세요.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습니다.(20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기탄없이 외칩니다. '그들의 위협' 앞에 있는 것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Coram Deo 신앙』입니다.
재판장의 자리 앉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자들입니다(요 18:12-24). 그러나 그들 앞에서, 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기탄없이 자기의 할 말을 다 하는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3. 하나님 주권 사상
시편 16:2절에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주권 사상』이란 바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내 주인이요, 나는 그 주인의 소유인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은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소유도, 자신의 권리도, 자신의 소망도, 자신의 계획도, 자신의 생각도, 자신의 삶도 없습니다. 그뿐인가.... 자신의 영광도, 자신의 기쁨도, 자신의 즐거움도 없습니다. 다만 주인의 영광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뿐입니다(마 25:21).
이처럼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로, 나의 소유주로, 나의 주인으로 알고, 그 앞에서『Coram Deo 신앙』으로 종으로서 섬기며 살아가는 신앙 자세가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주권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입니다. 오직 한 길입니다.결코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고 했습니다(막 12:29).
『Coram Deo 신앙』으로 『하나님 주권 사상』을 가지고 살기에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고백합니다(약 4:15).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합니다(롬 14:8).
결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가 창조 목적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즐거워하십니다. 우리 성도 또한 그 하나님의 즐거움에 함께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사나 죽으나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입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도 자신의 평안과 안일을 원했다면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던가 아니면 타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창조 목적'을 버릴 수 없고, 더욱이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 사명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소리 높여 기탄없이 외칩니다. 이것이 'Coram Deo 신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앞서 간 증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Coram Deo 신앙』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때 세상이 저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채찍으로 쳐도, 돌로 쳐도, 톱으로 켜도, 칼로 죽여도, 짐승의 가죽을 입혀도, 굶기고 매질을 해도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승리는 항상 이렇게 『Coram Deo 정신』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 맺음
한국의 전통적인 새해는 오늘 0시를 깃점으로 2026년 1월1일(음력)입니다. 설날이라고 합니다.
새해에는 새해의 소망이 있습니다. 새해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기 좋은 날입니다. 주님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고 했습니다.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주 안에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