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야 새야 파랑새야, 동학혁명의 진원지를 찾아서 - 고부
글 사진 이형권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달리는 길은 언제 가보아도 정겹다.
그 땅을 처음 밟아보는 나그네일지라도 결코 위압하거나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며 고향처럼 감싸 안아 준다.
산자락도 그 생김새를 뽐내거나 우람한 어깨를 치켜세워 내려다보지 않는다.
마치 한가로운 산조음악을 듣는 것처럼 시정이 넘쳐흐르는 것이 이 땅의 미덕이다.
기름진 들판과 붉은 살을 드러낸 황토언덕. 그리고 푸른 소나무밭과 주름투성이의 얼굴들 ……
이 풍요롭고 다정다감한 산하는 일찍이 한반도의 곡창지대로 나라를 먹여 살린 곳간이었으며
판소리나 풍물패의 신명난 가락을 길러낸 예술의 텃밭이기도 했다.
그러나 축복받은 대지 위에 버림받은 세월이라고나 할까.
이 땅의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의 이면에는 눈물 자욱이 더 많다.
고부, 지금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이 땅은 호남평야의 여러 고을에서도 가장 번성했던 곳이다.
김제만경을 연결하는 넓은 들판과 그 주변 스물여덟 개의 촌락을 거느렸던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미곡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서해로 흐르는 동진강을 끼고 백산평야 팔왕평야 배들평야가 펼쳐져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줄포 동진 사포 등의 포구로부터
해산물까지 넘쳐나는 천혜의 낙토였다.
그러나 이 땅은 풍요로운 만큼 탐관오리에게는 수탈의 최적지로 이름이 높았으니
자식을 낳아 벼슬아치가 되면 호남의 고부 땅에 부임하기를 소원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왕조 500년의 운세가 낙조처럼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나라에서 세금을 걷어 들이던 수취제도인 삼정은 백성의 피를 빠는 빨판처럼 악랄해졌고
양반은 물론 관직까지 팔고 사던 봉건왕조의 말폐가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타락했다.
그러한 때 1892년 5월에 악명 높은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해왔다.
조병갑은 부임 초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농민들의 재산을 수탈하여 야욕을 채우는 일에만 열중했다
수탈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고부읍 동쪽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 동진강으로 흘러가는 지점에
민보(예동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만석보를 새로 수축하고
추수기에는 수세명목으로 700여 섬의 쌀을 거둬들였다.
또 황무지를 개간하면 세금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애써 농토로 만들어 놓으면 세금을 징수하기가 일쑤였다.
무고한 농민들을 붙잡아 들여 음탕이니 불효니 사문난적의 동학교도니 하는 죄목으로
옥에 가두고 돈을 가져오면 풀어주곤 했다.
뿐만 아니라 태인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고부군민에게 1천 냥의 기부금을 부과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조병갑의 탐학에 견딜 수 없었던 고부 농민들은
먼저 관청에 연명으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등소운동을 벌였다. 그
러나 도리어 장두들이 붙잡혀가 치도곤만 당하게 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자 고부 농민들은 스스로 나서서 싸우는 방법밖엔 도리가 없음을 알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거사를 모의하게 된다.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사랑방에 모여든 지도부는
사발통문을 만들어 고부 군내 각 마을의 이장과 집강들에게 띄우고
‘모든 군민이 일제히 봉기하여 조병갑을 처단하자’는 행동강령을 정했다.
사발통문이란 주모자를 구별할 수 없도록 사발을 엎어놓고 원을 그려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인데
그 내용이 첫째 고부성을 혁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할 것,
둘째 군기창과 탄약고를 점령하고 무장할 것,
셋째 조병갑에게 아부하여 군민을 괴롭힌 아전들을 징벌할 것,
넷째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곧바로 서울로 직할 것 등 단순한 민란의 차원을 넘어서
혁명의 회오리를 예고한 것이었다.
1894년 1월 10일, 드디어 봉기의 횃불이 타올랐다.
이평면 말목장터에 모여든 500여 명의 농민들이 읍내로 들어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옥문을 부숴 억울하게 잡혀온 죄인들을 석방하는 한편
군기고를 접수하여 무장을 강화했으며 창고를 열어 곡식들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원성의 상징이었던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다.
조병갑은 그날 밤 농민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평민으로 변장하여 허겁지겁 전주감영으로 도망간 후였다.
고부성을 점령한 농민들은 민군을 조직하여 군사적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이 든 사람이나 어린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힘세고 날쌘 장정들로만 조직을 개편하여
진영을 교통의 요지인 말목장터로 옮기는 한편 장기전에 대비하여 백산에 성을 쌓았다.
말목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에는 편리한 곳이었으나
민가가 가깝고 관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지형이 불리했기 때문이다.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농민군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고 전투조직을 갖추어 장기전 태세에 돌입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변장한 군사들을 잠복시켜 내부사정을 정탐케 했고
이를 예측했던 전봉준이 지략으로 색출해내자 농민군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전주감영은 물론 조정에서도 크게 우려하여
농민군을 무력으로 해산시킬 구상을 하는 한편 회유책을 강구했다.
조병갑을 고부군수에서 파직시키고 전라감사 김문현을 감봉시켰으며
새로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지역 계엄사령관격인 안핵사로 파견했다.
박원명은 그동안 폐단을 시정하겠고 약속하고 군민들에게 잔치를 베풀며 해산을 설득했다.
어느 한 사람의 선정으로 당시의 부패한 실상이 개선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순박한 농민들은 거기에 희망을 걸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로는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를 제거하고자 했던 자신들의 목표가 성공한 것으로 판단되었고
봉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던 향촌의 세력가들도 더이상의 투쟁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심이 동요하자 농민군 지도부는 눈물을 머금고 해산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점이 종래의 민란과 성격을 같이했던 고부봉기가
더 이상의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 한계였다.
그런데 박원명의 설득으로 농민군이 해산하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눈치만 살피고 있던 이용태가 고부 땅에 난입해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원명을 협박하여 봉기에 참가한 농민들을 찾아내 닥치는 대로 살육했고
민가에 방화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들의 분노는 다시 하늘을 찌를 듯했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한 전봉준은
무장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망 높은 동학 접주 손화중과 연대하여 다시 투쟁의 불길을 타오르게 한다.
이것이 호남 농민들에게 모두 일어서 싸우자는 창의문을 선포한 무장기포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서막이 되었다.
<이하 줄임>
첫댓글 이것도 민주항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