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의 시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저녁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
_ 정규웅
박용래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대 초반 어느 해 가을 ‘한국시인협회’가 마련한 세미나를 취재하기 위해 경주행 열차에 올랐을 때였다. 세미나에 참석하는 시인들이 열차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빈자리를 찾아 앉고 보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박용래 시인이었다. 같은 자리에 앉았던 시인들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대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왜 대전에서 곧바로 경주로 가시지 않고 서울에서 열차를 타셨느냐’고 묻자 ‘이문구도 만날 겸 어제 서울에 올라왔다가 열차를 탔다’고 대답했다.
열차가 출발하고 객차 안은 소란스러웠지만 박 시인은 창가에 앉아 바깥만 내다보고 있었다. 기자도 책을 펼쳐 읽고 있었는데 무심코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건너다보니 살며시 감은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옆자리에 앉은 시인에게 눈짓으로 묻자 귓속말로 ‘원래 저렇게 눈물이 많은 양반이니 모른 체하라’고 말했다. 경주 가는 내내 그는 그렇게 툭하면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 박 시인에게 종이컵에 술을 따라 권했는데 한 모금 마시고는 눈물을 흘렸고, 또 한 모금 마시고 눈물을 흘렸다. 기자의 눈에는 몸 안에 들어간 술이 곧바로 눈물이 되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뒤 청진동의 ‘한국문학’ 편집실을 드나들면서 박용래 시인을 이따금 만날 수 있었다.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이문구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자주 ‘한국문학’에 들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술자리를 가져 기자도 여러 차례 동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별 이야기도 없이 늘 술만 마셨는데, 이따금 박 시인이 술상 위로 이문구의 손을 마주잡고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은 ‘전생에서 서로 지극히 사랑했으나 맺어지지 못한 연인들이 이승에서 해후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어느 날 이문구에게 ‘박용래 시인의 눈물’에 대한 사연을 물었다. 이문구의 이야기가 이랬다. 박용래는 1925년 충남 강경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워낙 늦은 나이에 그를 낳았기 때문에 그는 열 살 터울의 누나 손에서 자랐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공부도 잘하고 씩씩했다. 성적은 늘 1등을 다투었고, 그림을 잘 그렸는가 하면 정구 선수로 활약할 만큼 스포츠에도 능해 여러 모로 재주가 많았다.
통솔력도 있고 목소리도 우렁차 강경상업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그에게 대대장을 맡길 정도였다. 성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그를 키우다시피 한 누나가 강 건너 마을로 시집을 가면서부터였다. 그가 열여덟,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연말 누나가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박용래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누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에게 누나이기에 앞서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의 전형이었을 것이다.
“워낙 정이 많은 양반이기도 하지만 죽은 누나를 생각하기만 하면 그렇게 눈물이 난다더구먼. 누나가 돌아간 뒤 두어 해 동안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이젠 더 나올 눈물이 없겠거니 했는데 평생 잘도 쏟아져 나오더라고 자랑하던 걸. 그 양반, 한 직장에 오래 배겨 있지 못한 것도 그놈의 눈물 탓이야. 은행이고 학교고 늘 사람들과 마주해야 하는 직업인데 하구 한 날 그렇게 눈물만 흘리고 있으니 일이 되겠어? 그러니 시 쓰는 일만이 제격일 수밖에.”
이문구의 말대로 박용래는 43년 고등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한 뒤 조선은행 서울지점에 입사하고, 해방 뒤에는 여러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지만 어느 곳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다행히 그의 아내가 평생 간호사로 일해 먹고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신 집안 살림은 그의 몫이었다. 집안일 외에 오랜 세월 동안 그가 할 일이라고는 방에 들어앉아 누나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끼적이는 게 전부였다. 박용래는 서른한 살에야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했고, 첫 시집 ‘싸락눈’을 상재한 것이 마흔넷이던 69년이었다. 그 뒤 세 권의 시집을 더 내고 80년 쉰다섯 나이로 타계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박용래는 평생을 그리워한 누나의 시집가는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누님은 만혼이었다./ 스물여덟이던가, 아홉. 선창가 비 뿌리던 날, 강 건너 마을로 시집갔다./ 목선을 타고/ 목선에 오동나무 의걸일 싣고 그 무렵 유행하던 하이힐 신고 눈썹만 그리고 갔다.
어느 날 박용래
_ 고은
술 먹은 박용래가
대전 유성온천 냇둑
술 먹은 고은에게 물었다
은이 자네는
저 냇물이 다 술이기 바라지? 공연스레 호방하지?
나는 안 그려
나는 저 냇물이 그냥 냇물이기를 바라고
술이 그냥 술이기를 바라네
고은이 킬킬 웃어대며
냇물에 돌 한개를 던졌다
물은 말 없고
그 대신 냇둑의 새가
화를 내며 날아갔다
박용래가 울었다 안주 없이 먹은 술을 토했다
괜히 새를 쫓았다고 화를 냈다
은이는 나뻐
은이는 나뻐
박용래가 울었다 고은은 앞서가며 울지 않았다.
박용래 시 / 백창우 곡 / 겨울밤
"백창우, 시를 노래하다" 음반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