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때 만들어진 문무왕비에서는 王이 다섯 번, 大王이 한 번 기재되어 있고 성덕대왕신종에서는 전부 大王으로 기재되어 있고 진성왕 때 만들어진 낭혜화상비에는 王이 다섯 번, 大王이 열세 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상태는 아니지만, 태종무열왕릉비와 헌덕대왕릉비의 파편에도 大王이라는 표현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왕도, 왕화, 왕손 등의 관용어구는 생략한 숫자입니다.)
이 금석문들 내에서 王과 大王이 동등하게 혼용된 것으로 볼 때 大王은 일반명사가 아니며 大王의 大자는 신라 군주 공식 칭호인 王을 수식하는 단순한 미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무왕비와 낭혜화상비에서는 직접적으로 당의 황제를 신라의 군주 보다 상위개념으로 분명히 기재하였고 성덕대왕신종에서도 간접적이지만, 그러한 흔적이 보입니다.
寡人과 朕, 太子, 世子, 敎를 혼용하는 등 한문화의 미숙함을 보여줬던 삼국시대(진흥태왕 순수비, 중원 고려비, 광개토태왕비) 때와 달리 당이 중심으로 있는 동아시아 세계에 속해 있던 당시의 신라는 문무왕비나 낭혜화상비 등을 볼 때 詔와 敎를 분명히 구분하고 그리고 朕이 아닌 寡人, 皇太子와 世子를 분명히 구분하는 등 어느 정도 한문화에 익숙해진 상태였습니다.
특히 낭혜화상비 같은 경우 찬자가 유학자 최치원이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 인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종주국과 제후국의 엄격한 용어구별과 진덕왕을 진덕여군이라고 임의로 기재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문무왕비에도 엄격한 용어구별이 있었고 최치원을 찬자로 임명한 주체가 진성왕이라는 것으로 볼 때 최치원이 임의로 저런 용어들을 기재했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 낭혜화상비에서 진덕왕을 유독 진덕여군이라고 기재한 이유에 대해서는 추후에 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라 내부에서도 신라의 王=大王은 당의 皇帝보다 하위개념으로 여겼던 것이 보편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는 있습니다. 성덕왕 연간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王=大王=帝=大帝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王=大王이 기재된 이유는 이것이 당시 신라의 일반적인 군주 칭호였기 때문이고 帝=大帝가 기재된 이유는 자주적이었던 오기공과 김대문 개인인식의 흔적으로 무분별하게 혼용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은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文明皇后라고 부르고 갈항사석탑기에 의하면 원성왕은 자신의 어머니를 照文皇太后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훨씬 후대 사료이고 논란 중에 있긴 하지만,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원성왕이 김주원을 溟州郡王으로 봉했다는 다소 설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기록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진흥태왕 때와는 달리 후기의 신라는 용어상에서도 어느 정도 한문화에 익숙해진 상태였으며 내부적으로도 당의 皇帝를 자국 군주 보다 상위개념으로 분명히 기재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皇后, 皇太后, 郡王책봉 등의 표현도 함께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모순적인 현상이 생기게 되었는지 의문입니다. 고견들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국제적으로는 당이 약해지고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왕위쟁탈 과정에서 정통성이 빈약한 왕들이 권위를 높히려고 황제격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나 싶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