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미
망치로 두드려 만든 올드카, 슈퍼카보다 좋아요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40호(2023.03.15)
올드카 마니아
오태경(법학97-05) 변호사
역사책·모형 수집, 경주역사 연구
자동차 그림책 출간 꿈꿔
“이 차 정말 좋아하나봐요. 맞죠?”
훤칠한 여성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독일 잉골슈타트의 아우디 박물관에 출석도장을 찍은 지 3일째. 전시차 중 1949년 생산된 DKW(데카베)사의 슈넬라스터에 마음을 사로잡혀, 오태경 동문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구석구석 관찰하던 중이었다. “맞아요. 실물로 보니까 너무 좋네요. 3일째 왔어요.” 당황했지만 진심 어린 답이 통한 걸까. 따라오라더니 운전석 문을 열어주고, 앉아도 보란다. 책에서만 보던 올드카를 눈으로 보고, 손끝에 느끼다니. 10여 년 전 한 달간의 자동차 박물관 순례 여행에서 그가 손에 꼽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2월 21일 압구정동에서 만난 오 동문은 “옛 자동차 디자인에는 기능성을 추구하면서 단 한 순간도 아름다움을 놓치려 하지 않는 미덕이 있다”고 했다. 국제조세 전문 변호사인 그는 올드카에 푹 빠져 있다. 정확히는 자동차의 역사와 디자인을 사랑한다. 전 세계의 자동차 전문 서적들을 그러모으고, 차의 디테일을 훌륭하게 재현한 모형들도 수집한다. 그렇게 소화한 자동차 지식을 재해석해 글과 그림으로 내놓는 창작자이기도 하다.
‘올드카’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지만 오 동문이 매료된 시대는 1950~1960년대다.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다채롭고 뭔가가 끓어오르던 시기였달까요. 고급차와 트럭 등 상용차만 있던 거리에 2차 대전 이후 다양한 브랜드의 소형차가 쏟아져 나와요. 아주 작은 브랜드도 직접 차를 만들고, 섀시 제작과 별개로 바디(차체)는 이탈리아에선 카로체리아(Carrozeria), 영국에선 코치빌더라는 자동차 디자인 공방들이 맡아 독특한 모델을 만들어냈죠.”
망치와 끌로 철판을 두드려 유려한 선을 만들어내던 카로체리아의 장인들은 자동차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주역이었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인건비가 오르고 안전기준이 강화되면서 많은 수제작 업체가 사라지죠. 이젠 자가토, 피닌파리아 같은 빅 네임만 남아 이벤트성 작품을 내놓지만 한때 기능성을 추구하면서도 개성과 취향 그득한 디자인들이 도로를 달리던 시대가 있었어요.”
그 1950년대 끝자락에 만들어진 차가 영국의 로버 그룹에서 출시한 ‘미니’다. BMW ‘미니 쿠퍼’의 전신이자 ‘미스터 빈 자동차’로 유명한 ‘로버 미니’ 1979년형을 오 동문은 10년째 보유 중이다. 화물차 버전인 미니 밴도 최근 입수했다. 만듦새가 단단하면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과 실용성을 모두 잡은 차다. “한 마디로 작아도 있을 건 다 있어요. 4인 가족이 도시에서 이동하는 데 필요한 모든 기능을 갖추되 크기는 줄이려 밀리미터 단위로 설계를 고민했죠. 슬라이드 창문을 쓰거나 엔진을 가로 배치하는 등 당대에선 혁신적인 발상이 가득 담겨 있고요. 40년 넘게 생산돼서 부품 구하기도 쉽고 유지비용도 다른 올드카보다 적어요.”
직선주로를 달리듯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 초등학생 때 우연히 본 자동차 경주 애니메이션 덕분이었다. 자동차 경주의 역사를 훑다가 옛 자동차가 눈에 들어왔고, 법대 입학 후에도 법전보다 자동차 서적을 쥔 날이 많았다. “처음 간 학교 도서관은 충격 그 자체였어요. 양서 서고에선 ‘이런 세계가 있구나’ 싶었죠. 자동차 책은 그리 많진 않아도 당시 구하기 어려운 책과 옛날 책들이 꽤 있었어요. 덕분에 새로운 레퍼런스도 찾고, 해외 문화에도 눈 떴죠.”
몇 해 전 ‘코르사 에디트리체’라는 1인 출판사를 차렸다. ‘코르사(corsa)’는 이탈리아어로 경주를 뜻한다. 자동차 그림책과 역사책을 펴내는 게 꿈이다. 대학 때부터 쭉 해온 번역 일도 책을 내기 위한 밑작업이다.
“레이싱 카를 경기장까지 실어나르는 ‘트랜스포터’를 주제로 그림책을 내려 해요. 페라리의 말 모양 ‘카발리노 람판테’, 그리고 알파 로메오가 1930년대에 드라이버의 안전을 빌며 레이싱 카에 붙인 네잎클로버 모양 ‘콰드리폴리오 베르데’ 같은 엠블럼을, 빠르기보다 둔함과 성실함의 상징인 트랜스포터 또한 당당하게 달고 있는 게 너무 매력적이더라고요. 모형도 많이 모았죠. 레이스장에서 조연에 불과하지만 제 책에선 주인공이 될 거예요. 퇴근 후에 그린 그림으로 초판을 소량 찍어봤는데 해외에서 사고 싶다고 연락이 오기도 했어요.”
노후차량 규제가 심한 국내에서 ‘올드카 덕질’은 쉽지 않다. 해외 사이트에 탐나는 매물이 올라와도 그림의 떡. 해외 올드카 팬들은 오래된 내연기관 차를 전기차로 개조해 타기도 하는데, 국내에선 불법 행위다. 보험사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차량가액을 매기는 것도 속상하다. 그래도 그는 “요즘 나오는 슈퍼카나 전기차엔 통 매력을 못 느낀다”고 했다. 그나마 가족들과 쓰는 국산 세단 한 대를 뒀을 뿐이다. “전 아직도 물리 버튼이 있는 차들이 좋고, 차는 컴퓨터가 통제하기보다 사람의 개입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미니밴도 초크를 당겨 시동을 거는 카뷰레터 방식이라 기름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시동이 걸리거든요. 맘 같아선 양로원까지 미니를 끌고 가고 싶은데(웃음), 언제까지 도로에서 몰 수 있을지….”
“나의 태도가 내가 좋아하는 것의 저변 확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믿기에 아주 작은 관심도 기껍다. “나이 든 반려동물처럼 소중히 다루는 차지만 아이들이 신기해 하면 운전대도 잡아보게 하고, 태우고 동네 한 바퀴 돌기도 해요. 신호대기 틈에 ‘어디서 샀냐’ ‘엔진은 어디 달렸냐’ 물어보시면 다 대답해 드리고요. 그 1분으로 한 명이라도 더 옛날 차를 좋아하게 됐으면 해요.”
둥글둥글하면서도 영민한 인상이 왠지 그와 닮은 초록색 로버 미니를 거리에서 본다면, 반갑게 인사를 건네도 좋을 것 같다. 유튜브 ‘오태경의 기막힌 유산’을 통해서도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누고 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