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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9일 [세례자 요한 수난 기념일]
마르코 6,17-29
성경을 안 읽는 이유는 이 습관을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날을 기념합니다. 헤로데는 왜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면서도 목을 자르게 명령했을까요? 우리도 살다 보면 옳은 일이지만, 알면서도 그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인데,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성경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목을 치지는 않지만, 먼지가 쌓이게 두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이 좋은 걸 알면서도 읽지 않는 것이나 헤로데가 하느님 말씀을 듣기 싫어 목을 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 신자가 성경을 읽는 시간은 반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서 시간은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성인 10명 가운데 6명 정도는 1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이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유명인들 몇 명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책에 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찾아주는 사람이 바로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에이브러햄 링컨)
“당신은 결코 독서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워렌 버핏)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 하는 습관이다.”(빌 게이츠)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하여 얻은 지식을 아주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다.”(소크라테스)
이렇게 책은 마음의 양식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돈도 많이 벌게 해 주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도 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책을 읽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이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는 ‘감사일기’도 강조합니다.
신기한 것은 감사일기를 쓰는 사람 중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라클 모닝’으로 유명한 할 엘로드도 감사를
강조하는데 아침엔 반드시 책을 읽으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왜 감사와 책읽기가 함께 갈까요?
책은 마치 세례자 요한처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침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지침은 내가 그 사람에게 감사할 때만 관심이 생깁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을 때인 사춘기 때 부모의 모든 말은 잔소리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감사할 때는 부모의 가르침에 귀를 쫑긋 세웁니다.
고마울 때만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그저 이해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습관이 들여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감사는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부모가 똑같이 사랑해줘도 어떤 아이는 감사해하고 어떤 아이는 불만스럽습니다.
EBS에서 한 달간 부모를 칭찬하는 숙제를 사춘기 아이들에게 시켰을 때 아이들은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엔 잘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집과 부모가 좋아져서 말을 잘 듣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감사일기를 억지로라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 성당은 감사일기를 나누어주고 매일 그날 읽은 성경 구절이나 하.사.시. 한 문장씩을 쓰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말씀을 읽게 하여 헤로데처럼 좋은 걸 알면서도 예언자의 목을 치는 사람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선순환됩니다.
감사하면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그 사명 때문에라도 삶이 의리있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실행할 힘을 얻기 위해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에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감사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어린이처럼 되려는 태도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감사일기를 씁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복음: 마르 6,17-29
세례자 요한의 허무한 죽음,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죽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죽음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국가와 이웃을 위해 큰 족적을 남겼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눈물 속에 떠나는 황홀한 죽음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백수를 누리면서 평생 잘 지내다가 후손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는 편안한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한 한 청춘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난폭하고 오만한 지도자의 그릇된 정책, 게으름과 무성의, 안일무사함으로 인해 벌어진 대참사, 그로 인한 희생자들의 죽음도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오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구약 시대 마지막 대 예언자, 자기 뒤에 오시는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은 선구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한때 타오르는 횃불 같이 찬란했던 그의 삶이었습니다.
죽는 모습도 그에 못지 않게 장엄하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악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헤로디나의 간계와 허당 기질이 다분한 헤로데의 허언 한 마디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어이없는 참수형을 당하고 맙니다.
요한의 머리는 댕강 잘려져 쟁반에 담깁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담긴 쟁반을 받아든 헤로디아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런 죽음인지요.
대예언자의 결말이 너무나 초라하게 끝이 나는 것 같아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든 분위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허무한 죽음,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 선구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더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인의 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의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출생은 물론 생애 전체, 죽음까지도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강론>
(2024. 8. 29. 목)(마르 6,17-29)
<박해와 순교는 예언자의 운명이 아닙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마르 6,17-21ㄱ).”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6-29).”
1) 여기서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만 보고,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보호하려고 했고, 헤로디아만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것은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잠깐 가두어 놓았다가 다시 풀어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헤로데는 백성의 여론을 살피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적당한 때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헤로디아는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로데가 그런 헤로디아를 막은 것은, 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20절의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는, “백성들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헤로데가 백성의 여론을 두려워하며”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잃고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임금 자리를 유지하려면 로마 황제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백성의 지지가 중요했습니다.
만일에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는 그 책임을 헤로데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했으면서도 경청하는 척 했다는 뜻입니다.
21절의 “좋은 기회가 왔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는 뜻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에 대해서 당시의 백성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자기 생일에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헤로디아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2)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이라는 말은, 요한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경솔함과 경망스러움을 의식하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과 자존심이 손상된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23절).” 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의 영주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왕국’ 자체가 없었고, 자기가 다스리는 갈릴래아 지역의 절반을 로마 황제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에게 줄 권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헤로데 자신도 자기의 약속이 헛되다는 것과 자기의 맹세가 거짓 맹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다가 권력자에 의해서 살해당한 ‘순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예언자가 그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는 것을 ‘예언자의 운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라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모두 회개했다면, 또 헤로데와 헤로디아도 회개했다면, 요한이 박해받고 순교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것,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고
당신에게로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예언자들의 순교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들의 범죄입니다.>
우리 교회가 수없이 겪었고,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겪고 있는 박해와 고난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그 뜻을 거역하는 범죄일 뿐입니다.
물론 순교자 자신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기꺼이 하나의 밀알이 된 분들입니다.
그래도 박해와 순교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또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인죄를 지은
헤로데 같은 자들을, 하느님께서는 왜 내버려 두시는가?
그런 박해자들에게 바로 천벌을 내리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헤로데 같은 자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잃은 양이고,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곧바로 천벌을 내리지 않고 기다리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