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7일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조 재형 신부
복음; 루카6,1-5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바둑에서 중요한 부분은 ‘형세판단’입니다. 형세판단을 잘 하는 사람은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은 ‘맥락’입니다. 맥락을 잘 아는 사람은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형세판단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자성어로 “견지망월(見指忘月)”이 있습니다. 견지망월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까막눈임에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혜능은 어느 날 한 비구니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글을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안다는 말씀인지요?’ 그러자 혜능은 ‘진리는 저 하늘의 달과 같고,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답했습니다.”
깨달음은 능력의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배움의 순서대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직책에 따라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햇빛이 비추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도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본과 물질의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익과 풍요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폭력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태계의 파괴와 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의 원리에는 인간의 생명과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요의 나라,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에서 매년 총기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부유한 나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된 물을 바다로 방출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되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물질과 자본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새 부대는 욕망과 탐욕이 아닙니다. 새 부대는 십자가와 나눔입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미주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성당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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