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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민특위계승국민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반민특위계승
2. 국내 진입 준비
서안과 부양에서 한국 진입을 위한 한·미 합동 특수 훈련이 진행되는 중에도 전국은 하루 하루 침략주의 일본의 패망을 재촉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즉 그 해 2월에는, 미군이 유황도(硫黃島)에 상륙하여 소탕전을 전개함으로써 일제의 유황도 수비군이 전멸당하였으며, 4월에 미군이 충승도(冲繩島)에 대한 상륙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군은 전멸을 당하였다. 그리고, 5월부터 동경·횡빈(橫濱)에 대한 대폭격이 있는가 하면 8월초에는 광도시(廣島市)에 원자 폭탄이 투하됨으로써 자칭‘세계 막강(世界莫强)’을 자랑하던 일제 침략군도 이제는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전국의 진전을 주의 깊게 보면서 7월 26일, 연합국 그 중에도 미·중·영의 3개국의 거두는 도이치의 동부 도시 포츠담에 모여 최후로 일본에 대하여 항복을 권고하는 아래와 같은 13개항의 이른 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였다.
① 우리들 미국 대통령, 중국 국민 정부 주석, 영국 수상은 우리들의 억만 국민을 대표하여 이미 회담과 동의를 경유, 일본에 대하여 한 번의 기회를 주어서 이 번 전쟁을 매듭지으려 한다.
② 미국·영 제국 및 중국의 방대한 육·해·공군 부대는 이미 여러 배로 증강되었으며 서방에서 출동하여 온 군대 및 공군으로 곧 일본에게 최후 타격을 주려고 한다. 이러한 무력 행사는 그 소유 연합국의 지지와 고무 격려를 받은 것으로서 대일 작전에 있어서 그 저항을 정지시키지 않고서는 중지되지 않을 것이다.
③ 도이치는 아무런 효과도 없이 아무런 의의도 없이 전 세계 소유의 자유와 인민의 8) 노복선(盧福善)·김석동(金奭東) 제공 광복군 제2지대 연혁 - 496 - 역량을 저항하였는데, 그 얻은 바 결과가 분명하게 바로 앞에 있은 것으로서 일본 인민에게 은감(殷鑑)이 될 만한 일이다. 그것이 저항을 그치지 않았을 경우에는 도이치 인민과 전체의 토지·공업 및 그 생활 방식을 모두 꺾어 부수어서 없어지게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일본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는 역량은 도이치에 대하던 그것 보다도 더 방대한 것이니 잘 재량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군사력과 여기에 다시 우리들의 견결한 의지를 뒷받침으로 하여 전부를 실시하게 된다면, 앞으로 일본의 군대가 완전히 파멸되어 도피할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역시 반드시 전부 파괴되고야 말 것이다.
④ 현재 시기는 이미 도래하였다. 일본은 반드시 가(可)와 부(否)를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대로 제 뜻대로만 뻗치고 나가서 계산이 잘못된다면 일본 제국으로 완전 파멸의 지경에 이르게 할 것이다. 군인의 통제로 혹시라도 이지(理智)의 길을 나갈 수 있을 것인가?
⑤ 이하는 우리들의 조건이 되는데, 우리들은 결코 다시 고칠 수 없으며 역시 다른 별도의 방식도 없다. 유예(猶豫) 지연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허용하지 않는다.
⑥ 기만 및 착오의 방법으로 일본 인민을 영도하여 망녕되이 세계를 침략 정복하려 하던 위세(威勢)와 권력은 반드시 영구히 제거되어야 한다. 대개 우리들이 굳게 주장하는 것은 책임을 져야 할 군사를 일으켜 무력을 행사하는 주의를 이 세계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화평 안전과 정의의 새 질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⑦ 새 질서가 성립될 때 및 곧 일본의 전쟁을 제조하던 역량의 파멸이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있게 될 때에는, 일본의 영토는 동맹국의 지정한 바에 의하여 반드시 점령될 것이며, 우리들도 여기서 진술하게 하는 기본 목적도 완성되는 것이다.
⑧ 카이로 선언의 조건은 반드시 실시되게 된다. 일본의 주권은 반드시 본주(本州)와 북해도(北海島)·구주(九州)·사국(四國) 지방과 우리들이 결정하는 기타 작은 섬안에 한정되게 한다.
⑨ 일본 군대는 완전히 무장 해제된 후에는 그 가정,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며, 화평 및 생산 생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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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우리들은 일본 민족을 노예로 부린다든가 혹은 그 국가를 멸망시킬 생각은 없다. 다만 전쟁 범죄자와 우리들의 포로를 학대한 자들은 법률의 재판을 받도록 한다. 일본 정부는 반드시 일본 인민의 민주 추세의 부흥 및 증강에 장애가 되는 것은 소멸 제거하여야 하며 언론·종교 및 사상 자유와 기본 인권에 대한 중시 등은 성립되어야 한다.
⑪ 일본은 앞으로 그 경제상 필수 및 상환할 물화(物貨), 배상할 공업의 유지를 얻게 된다. 다만 무장 작전을 다시 할 수 있는 공업은 그 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그 획득한 원료 중에서 통제 원료를 구별하여야 하며, 일본은 최후로 국제 무역 관계에 참가함을 얻을 수 있다.
⑫ 위와 같은 목적이 이루어지면 일본 인민이 자유로이 표시하는 의사에 의하여 한 개의 화평을 지향하고 책임을 지는 정부를 성립한 후에 동맹국의 점령 군대는 즉시 철퇴하게 된다.
⑬ 우리들은 일본 정부에 경고한다. 곧 소유한 일본 무장 부대의 무조건 투항(投降)을 선포하고, 이런 행동을 유의 실행함에 대한 적당한 각 항의 보증을 하여야 한다. 이 한 가지의 길을 제하고는 일본은 곧장 완전 파멸할 수밖에 없다.1)
이러한 강대국 간의 움직임, 적 일본군의 패퇴 소식은 조국 수복 작전의 일선에 서기 위하여 맹훈련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특별 훈련 반원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러한 소식은, 또 피 끓는 훈련 반원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는 중 그 해 8월초에는 소정의 3개월 훈련 과정도 끝이 나니 이제는 국내 진입 작전의 시간만이 남은 것이었다.
한편 이 무렵, 한·미 고위측에서는 이미 국내 진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의 합의를 보기도 하였다. 즉, 우리 광복군의 이범석 제2지대장은 미국의 일본 본토 상륙 개시 이전에 우리 광복군 특수 훈련반으로 국내에 잠입시켜서 정보 수집, 군사 시설 파괴, 지하군 조직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작성하여 미 군사 당국과의 사전 동의도 1) 중국현대사료총서(叢書) 제2집 하상장(何上將) 항전 기간 군사 보고 하책(下冊). 원문은 한문, 필자 국역 - 498 - 얻게 되었다.
적 일본의 패배와 연합국의 승리를 눈앞에 놓고 볼 때, 일본 패망 후에도 우리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는 우리가 먼저 본국에 들어가서 일제 축출의 선편을 들고, 우리의 힘을 새 국가 건설에 바치지 않으면 안 될 위험성도 없지 않은 것이었다. 여기에는 우리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을 얻고, 또 연합군 군대들과 함께 우리 광복군이 국내로 진입하는 것만이 선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전(終戰)을 앞두고 한국에 대한 한 가닥의 상서롭지 못한 움직임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안 될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이미 이 해 4월에 소·일 불가침 조약을 연장하지 않았다고 통고한 공산주의 러시아가 기회를 보아 북에서 남진할 기미를 보이고 있음은 물론, 이미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자파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는 조선 민족 혁명당의 김약산(金若山)[김원봉] 일파가 연안(延安)에 자리 잡고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기맥을 통하여 가며, 먼저 국내 진입을 위한 공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임시정부에서는 진작부터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을 서두르게 되었다. 오에스에스의 훈련과 함께 훈련반을 분대별로 조직, 비행기, 잠수함 등을 통하여 국내에 진입시켜 서울 지구를 위시하여 전국을 통한 각 지구에서 연합국의 상륙 작전에 대비하는 전투 태세 확립의 계획을 세웠으며, 그것은 미국 측의 동의를 얻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훈련반의 필업을 앞두고 광복군 제2지대의 이범석 지대장은 이미 서울 지구를 위시한 각 지구의 공작원까지 배정하고 출발 시기를 고대하였었다.
그리고 8월 7일에는,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부의 이청천(李靑天) 총사령이 서안의 제2지대 본부로 가서 이범석 제2지대장과 함께 미국측 대표인 곤명(昆明), 미국 전략 첩보대 본부 지휘관 다나반(소장), 두곡(杜曲) 지구 주둔 대장 서젠트(소령) 등과 함께, ‘한·미 양국 간의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 공작의 전개’를 약정하게 되므로 인하여 한·미 합작 특수 훈련 대원들의 국내 진입 작전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 499 -
한편, 지원병 또는 징병에 의하여 중국 각지 전선으로 끌려 나갔던 동포 청년들의 중국군 또는 광복군 진영으로 들어오는 수효도 나날이 증가하여 갔으며, 이들은 다시 광복군에 편입되어 일선 공작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들의 새로운 정보에 의하여 본국의 실정을 파악함과 동시에 이러한 정보가 광복군의 국내 진입 계획에 이바지한 바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특히 중국 각지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한국인 청년들에 대하여 그들을 우대 해방하여 다함께 조국 광복 전선에 참가하게 한다는 방침 하에 각지 수용소에 있는 많은 한국인 청년들을 석방, 우리 광복군에 참가하게 하였는데, 보계(寶鷄) 수용소를 거쳐 나온 청년들도 다시 본국 진입 작전에 참가하기 위한 훈련을 쌓기 위하여 서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3)
한편 이 무렵, 한국광복군 안에는 따로이 국내 정진군(挺進軍) 총지휘부를 설치하고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을 정진군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기도 하였으며,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훈련반 시찰을 계기로 하여 미군측과의 합동 작전에 대한 최종적 결정을 보게도 되었다. 그리고, 8월말 안으로 제2지대의 특수 훈련반을 국내 각지로 진입시킬 계획을 세우고, 진입 구역과 진입 대원의 조직도 보게 되었다.
즉, 국내 8도를 제1·제2·제3의 3개 구역으로 나누어, 평안·황해·경기도를 제1 지구, 충청·전라도를 제2지구, 함경·강원·경상도를 제3 지구로 하고, 각 지구의 대장은 제2지대의 1·2·3 구대장인 안춘생(安椿生)·노태준(盧泰俊)·노복선(盧福善)이 겸임하며, 각 도 대원은 2개조 내지 3개조로 조직하되 각조의 인원은 3명씩으로 하였다. 따라서, 각 지구를 담당한 애국 청년들은 가슴을 설레이며 국내 진입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4)
국내 진입 조직은 아래와 같았다.
2) 김구(金九) 자서전 ≪백범일지≫ 기적(寄跡) 장강(長江) 만리풍(萬里風) 조·장준하(張俊河, 당시 오에스에스 훈련 반원) 지은 ≪돌베개≫ 8.15 전후 (1) 참조 3) 장준하 지은 ≪돌베개≫ 동상조 및 중경(重慶) 중앙 일보(中央日報) 1945년 5월 16일자 참조
4) 노복선(盧福善)·김석동(金奭東) 제공 ≪한국광복군 제2지대 연혁≫ 참조 - 500 -
국내 정진군 편성표 (1945.8)
총지휘 이범석(李範奭)
부 관 김성근(金星根)
제1 지구
대장 안춘생
제2지구
대장 노태준
제3 지구
대장 노복선
본부요원
이재현(李在賢)·민영수(閔泳秀)·김석동(金奭東)·이윤장(李允章)·강일성(江一成)·오건(吳健)·최철(崔鐵)·한경수(韓景洙)·김동걸(金東傑)
제1지구
평안도반
반장 강정선(康楨善)
1조
장덕기(張德祺)·계의성(桂義成)·장철(張鐵)
2조
김용(金湧)·이지홍(李志鴻)·이우경(李宇卿)
3조
김중호(金仲浩)·전성윤(田成胤)·선우기(鮮于基)
4조
김영호(金榮鎬)·박명광(朴明光)·안국보(安國寶)
황해도반
반장 송면수(宋冕秀)
1조
노성환(盧星煥)·황삼룡(黃三龍)·이동환(李東煥)
2조
홍기화(洪基華)·신덕영(申悳泳)·석호문(石鎬文)
3조
이우성(李宇成)·허봉석(許鳳錫)·송수일(宋秀一)
경기도반
반장 장준하(張俊河)
1조
이준승(李濬承)·이명(李明)·박수덕(朴樹德)
2조
송창석(宋昌錫)·정정산(鄭正山)·최문식(崔文植)
3조
김유길(金柔吉)·오서희(吳庶熙)·이순승(李淳承)
제2지구
충청도반
반장 정일명(鄭一明)
1조
이덕산(李德山)·박영섭(朴永燮)·김욱배(金旭培)
2조
장재민(張在敏)·박재화(朴載華)·송석형(宋錫亨)
3조
윤치원(尹致源)·윤태현(尹泰鉉)·김세용(金世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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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반
반장 박훈(朴勳)
1조
노능서(魯能瑞)·신국빈(申國彬)·김상을(金商乙)
2조
이정선(李正善)·장두성(張斗星)·백준기(白俊基)
3조
임재남(林裁南)·한종원(韓宗元)·박금동(朴金童)
제3지구
함경도반
반장 김용주(金容珠)
1조
석근영(石根永)·태윤기(太倫基)·이욱승(李旭昇)
2조
최봉상(崔鳳祥)·김덕원(金德元)·김선옥(金先玉)
강원도반
반장 김준엽(金俊燁)
1조
이계현(李啓玄)·임정근(林正根)·이준명(李俊明)
2조
고철호(高撤浩)·홍재원(洪在源)·김성갑(金成甲)
3조
김춘정(金春鼎)·동방석(蕫邦石)·이호길(李浩吉)
경상도반
반장 허영일(許永一)
1조
김성환(金聖煥)·구자민(具滋民)·이동학(李東學)
2조
육덕량(劉德亮)·이지성 (李志成)·윤재현(尹在賢)
3조
이종무(李鍾鵡)·이건림(李健林)·이운학(李雲鶴) 5)
그러나, 적의 항복은 예상 외로 빨랐다. 아니 광복군의 국내 진입 작전 계획이 이미 때가 늦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훈련 반원들의 국내 진입 계획을 마무리하고 장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대원들을 고무 격려하기 위하여 서안(西安) 현지로 나갔던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이 현지 중국 군·관 대표들과 교환(交歡) 겸 군사 관계를 상의하기 위하여 며칠간을 머무는 중에 뜻밖에도 왜적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왜적의 항복’이것은 기쁜 소식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국내 진입으로 연합군의 최후 작전에 참가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우리 광복군측에는 실망을 가져다 주는 소식이기도 하였다.
이제는 평소 염원하던 우리 장병에 의한 조국 무력 광복의 길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참말 기쁨과 실망을 교착하게 하는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5) 동상 - 502 - 이것은 그동안 천신만고(千辛萬苦)로 항일 무력전을 준비하기에 전심전력하던 임시정부 수뇌부의 입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김구 주석이 당시의 심경을 아래와 같이 적은 그것을 보아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아 ' 왜적의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 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參戰)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西安)과 부양(阜陽)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의 무기를 주어 산동(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 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前功)이 가석(可惜)이어니와 그 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가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