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의 어여쁜 추알(공리 분)은 가난한 죄로 나귀 한마리와 맞바뀌어 50이 넘도록 독신으로 있는 양조장 주인인 리서방에게 팔려간다. 사랑도 모르고, 남편의 얼굴은 더더구나 모르는 채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향한다. 흔들거리는 가마 문틈으로 보이는 츄알의 가죽신에 가마를 맨 유이찬아오는 눈을 뗄 줄 모른다. 가차없이 내리쬐는 햇볕으로 가마꾼들의 벗은 상체가 번들거린다. 유이찬아오의 우람한 몸을 보면서 추알은 야릇한 흥분을 느낀다. 드디어 산행길에 올라 친정으로 가던 날, 젊은이들은 붉은 수수밭에서 뜨겁게 맺어진다. 남편이 살해되는 바람에 과부가 된 추알이 혼자 힘으로 양조장을 재건한다. 친정에 가는 날 수수밭에서 그녀를 범한 유이찬아오는 그녀와 동침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떠벌려 그녀를 괴롭히고 새로 빚은 고량주에 오줌을 누는 등 말썽을 피운다. 그리고 추알을 덮석 안아들고 자신이 주인이라고 안채로 들어간다. 그런데 유이찬아오가 오줌을 눈 고량주는 어느 해보다 맛있는 고량주가 돼 18리 고량주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게 된다. 유이찬아오가 추알의 남편으로 양조장을 돌보게 된 뒤 양조장에 가장 나이많은 일꾼인 라호안이 사라진다. 그로부터 9년 후 마을의 평화는 들이닥친 일본군에 의해 깨지고 만다. 수수밭은 군영도로를 만들기 위해 베어지고 항일 게릴라로 활동하던 라호안은 산 채로 잡혀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 끝에 죽고 만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고량주에 불을 붙여 기관포를 앞세운 일본군과 싸운다. 전투 삽시간에 수수밭은 피로 물들고 대지 위에 불사조처럼 유이찬아오 부자가 우뚝 선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중에 추알이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 아래 쓰러진다. 뒤늦게 터진 폭탄으로 수수밭은 온통 화염에 쌓인다. 피덩이 같은 붉은 해가 이글거린다
1934년, 중국 공산당 紅軍은 장제스와의 국공합작에 실패하여 장시성 루이진을 떠나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은 70만 대군을 동원해 홍군을 공격하여 홍군을 궤멸직전까지 몰아서, 결국 홍군으로 하여금 대장정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홍군은 10만 여명을 모아 포위망이 허술한 남서쪽을 뚫고 18개의 산맥을 넘과 24개의 강을 건너 11개의 성을 지나 대장정을 마치게 되었다. 쉬지 않고 하루 130키로를 걸어 불뿌리와 눈 덮힌 산을 맨발로 걸으면서 1년 반만에 드디어 1935 년 10월 20일날 대장정의 마지막 날 남은 병력은 겨우 8000명이었다.
그 결과, 모택동은 홍군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중국 북서부는 공산당의 요새가 되어 국민당과의 내전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장정을 거치면서 홍군은 중국 오지 농민들의 마음을 안을 수 있었으며, 그들 오지 부족들을의 마음을 끌어안아 소비에트를 조직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 공산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고,
그것이 러시아 혁명과 다른 점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적군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겠다는 거짓말을 했지만, 중국의 홍군은 철저히 진심으로 농민들 편에 섰던 것이다. 중국의 소비에트는 중국 오지의 소수 부족의 고유의 삶의 형태와 자치를 인정해 주는 형태였다. 어쩌면, 당시 중국 공산당의 권력은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 중앙집권과 자본력과 군사력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의 행태에서 보면 명확히 알 수가 있다.
그때 홍군은 자신들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 농민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택동이 장악을 하고 농촌 정책에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에도 실패하고, 그 후 모택동 자신의 실패를 권력의 힘으로 덮으려는 시도가 어린 홍위병을 만들어 개혁파 정적들을 숙청한데서도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공산당의 집권 과정에서 농민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하게 차이가 있었으나, 근본적인 면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권력유지가 목적이었다는 공통점이었다.
등소평이 다시 정권을 잡아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중국의 자본주의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제반 사회적 문제가 벌어져 급기야는 천안문 사태가 벌어져 등소평은 탱크로 수만명의 인민들을 살상했다.
그후 중국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명실상부 미국과 대적할 유일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이었던 홍군을 도와주었던 농민들의 삶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그리고, 홍군이 조직한 자치조직 소비에트는 인민해방군에 의해 다시 철저하게 무너졌다.
자본과 군대로 무장하여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은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여 중국 오지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의 자치 정치 조직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것이다.
이것은, 애초의 공산당의 가치와는 상반되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20세기 초, 중국 공산당과 일본군이 오기 전의 중국 오지의 농촌은 [붉은 수수밭]에서 처럼 스스로의 조직으로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었다. 비록, 가난하고 남녀에 대한 지독한 차별은 있었지만, 여주인공 공리가 보여주었던 삶에 대한 치열한 자세는 그 당시 농민들의 일반적 모습이었다.
그러한, 농민들의 삶을 일본군은 적나라하게 파괴했고, 중국 공산당은 도와주는 척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망쳐놓았다. 오히려, 남의 나라 일본군이 한 짓에 비하면 공산당이 한 짓이 조금은 인도적으로 보일 지도 모르나, 근본적인 삶의 근거지를 박살내는 점과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는 점에서는 심각한 일이다.
일본군에 대항해서는 마을 전체가 협력하여 공동체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공산당의 권력과 자본주의의 자본 앞에서는 중국 오지의 아름다운 농촌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民工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 농촌에서 쫒겨나와 도시에서 일용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 날 화려한 중국의 이면에는 공산당 홍군을 도와준 그들의 희생이 숨어 있다.
민공들의 삶은 절망적이다. 모든 자본주의의 과실들은 공산당 조직과 그들과 관련된 일부만이 즐기고 있다.
민공들이 살았던 그들의 고향은 현대화 산업화로 철저하게 부서져 자본의 품안으로 사라지고 있으며, 그들 고유의 삶의 형태는 관광객들의 눈요기꺼리나 되어 그들이 던져주는 냄새나는 돈으로 연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이나 자본주의의 폭력성은 같은 뿌리를 가진다. 산업화를 사회진화론적 근대화로 인정한 점이나, 자본주의 역시 시장이 발달한 형태라는 점에서는 맑스나 아담 스미스나 같았다.
그들은 전통 사회에 대한 아무런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농촌에 대한 어떠한 발전적인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산업화가 몰고온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고민만이 있었을 뿐이다. 산업화가 몰고 온 인류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산업사회가 파괴한 전통사회에 대한 어떠한 애정도 없었을 뿐이다.
맑스나 아담 스미스나 전통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해서는 눈여겨보려고 하지 않았고, 반대로 전통사회의 왕권과 가부장적 제도만을 비웃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삶의 가치를 물질적인 면에서만 국한 시켜 바라보았으며, 정신적 가치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다.
공동체가 가지는 경제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는 富의 가치가 아니라, 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순환의 가치인 것이다. 그것을 깨뜨린 점에서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같다.
따라서, 오늘 날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의 죄값은 둘이서 똑 같이 받아야 마땅하다.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좌/우의 개념은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당장은 눈앞의 부조리를 해결한 듯 보이는 노동운동 조차도 이 난국을 해결하는 아무런 해답이 될 수가 없다.
특히,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일부 얼빠진 좌파들의 태도이다. 자신들의 눈앞에 버티고 있는 테제만으로서 자신들을 영웅시하는 모습은,오히려 우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