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름은 農園입니다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이라는 면에 속해 있지요
그 농원도 2개의 농원으로 불리우는데 하나는 정착농원이고 또 하나는 후생농원이조
후생농원은 6,25 이전에 내려온 피난민들을 위해, 정착농원은 6,25 이후에
정부가 이 곳에 정착하여 농사짓고 살으라고 내 준 땅이랍니다
피난민들은 맨 몸으로 왔기때문에 정말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해 대부분 성공해서
타지로 떠났지요 용기있고 개척정신이 있는 사람만이 피난을 왔기 때문인지
열심으로 살아 성공한듯 보입니다
아무튼 농원은 죽촌리와 율촌리에 걸쳐 았었는데 마을이 띠엄띠엄 19개班으로 나뉘어 있었죠
국영숙이 동네는 15반, 우리동네는 17반, 웅수네 동네는 10반, 이런식으로요
타동네사람들은 그 많은 반을 구별을 잘 못 하지만 우리 농원사람들은
용케도 구별을 할 줄 안답니다 물론 지금은 없어진 반도 몆개 있어요
지금은 반으로 구별을 안하고 후생1,2구 정착1,2구로 불리대요
그동안 행정개편이 있었는가 봅니다
암튼 어찌나 큰지 초등학교를 세군데로 나뉘어 다녔습니다
용산초등학교 다송초등학교 황등초등학교로요
대부분 크고 좋은 황등초등학교로 다녔지만 일부는 다른데를 다닌 사람도 있었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 농원 말고는 이런일이 없었을 걸요
지금은 피난민 2,3세들이 2~30% 남아있고 타지에서 이사온 사람들이 살고 있지요
그래서 아직도 농원땅은 거의가 ,소위 일산땅으로 불리는 국유지입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국유지를 성업공사에서 관리 할 때에는
간혹 그 국유지를 개인에게 등기를 내 주었는데 토지개발공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요즈음에는 등기를 내고 싶어도 못 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국유지를 정부에서 국토의 30%는 보유해야 된다는정책때문이조
초창기 정부에서 맨몸으로 넘어온 피난민들을 위해 흙으로 만든 벽돌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내가 어렸을땐 토담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마을에는 한두개는 있을법한 기와집 하나가 없었지요
그래서 황등에서 가장 못사는 동네는 당연이 농원이었죠
그래서 친구들 대부분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답니다
비가오면 신작로까지 나가려면 빨간 질퍽한 황토흙에 바지가랑이까지 묻어
학교에 가면 놀리는 친구들때문에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어떤때는 고무신이 흙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으니까요
당연히 생활도 어려운 가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때쯤 동네에는 대부분 죽을 쑤어 먹었는데
그 죽이 어찌나 맛있어 보이는지 어머니한테 졸라서
밥 한그릇을 가지고 가서 그 풀대죽과 바꿔먹던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고모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농사 많이 짓던 누님네
살림을 도맡아 하시던 아버지가 사촌형이 미광사진관을 차릴정도로
장성하자 농원으로 자립하게 되어 논마지기 밭 몆마지기는 있어
죽을 먹는 일은 없었지만 가난하기는 매 한가지였습니다
생각하면 내 유년의 기억은 우울한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깨알갇은 내 기억의 잔상은
디시금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 할 뿐입니다
獸狗初心이라 했던가?
나이가 오십이 돼서야 고향의 향기에 취해 어섧은 글을 쓰고 있네요
내가 어렸을때 우리 동네 앞엔 커다란 방죽이 있었습니다
왜 둥개방죽이란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르지만 제 추리로는
방죽을 만둘때 방죽 주변에 참나무가 많아서
참나무 즙을 먹고사는 둥개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둥개를 모른다고요? 풍뎅이의 전라도 사투리랍니다
어렸을적 둥개 머리를 비틀어 땅에 놓으면 빙빙 돌았지요
마땅이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 둥개는 재미있는 장난감중의 하나였지요
참나무 진액냄새가 역하게 났지만요
어릴때부터 그곳은 우리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아마 초딩때 우리 둥개방죽으로 머스마들 치고 멱 감으러 오지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걸요
더운 여름 심심하면 몰려가 멱을 감고 세수대야를 가지고
줄풀이 무성한 곳에 가면 뜸부기 알을 한 세숫대야 가득 줏어 왔지요
워낙에 큰 방죽이라 뜸부기도 많아서 꼬마들이 그렇게 가져 오는데도
몇일후에 다시가면 알은 또 있었으니까요
알을 주우러 뜸부기집에 갔다가 커다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걸 보고
기겁해서 도망쳐 나온 기억도 납니다
중학교때는 방죽에 개구리, 작은 붕어를 잡아 쥐낚을 놓았다가
아침에 장대를 들어올리면 낚시에 걸린 어른 팔뚝만한 가물치, 메기등이
힘차게 퍼덕거리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곤 했습니다
비가 많이와서 물이 많아 수문을 열어 놓으면 수로를 따라 물고기들이 물을 거슬러 올라오지요
작은 도랑에 소쿠리를 대고 있으면 작은 송사리를 잠시동안 세숫대야 가득 잡을수 있었어요
지금은 송사리가 귀하지만 그때에는 참 흔한게 송사리였습니다
그걸 씨레기와 함께 끓여놓은 매운탕은 지금도 잊지를 못하는 그리움의 맛이죠
봄가을엔 낚시꾼도 많이 오는데 술 담배 심부름 해주고 얻어먹는 아이스케끼 맛도 잊지를 못하겠네요
봄기운이 무럭무럭 익어갈 즈음에 방죽두덕에 가면 따듯한 햇빛을 쬐는 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지요
장대 하나면 몆십마리는 거뜬이 잡았는데 돼지나 닭 키우는 집에 같다주면 몇십원은 받았죠
농사가 끝나면 발동기를 동원해서 그방죽을 품는데 잡은 고기를 경운기로 서너대는 가득 실어갑니다
가물치 메기 붕어 장어 참게등 참 많이도 잡혔습니다
지금은 귀한 뱀장어도 많았는데 그때에는 사람이 안먹고 돼지를 먹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기름기가 하도 많아 먹으면 설사를 히기때문이었지요ㅋ
겨울이면, 그 큰 방죽이 온통 얼음판으로 변해 썰매를 타느라 하루 해가 짧았습니다
날씨가 푹 해지면 그 얼음판이 녹는데, 그때는 얼음판이 엿가락 휘어지듯 합니다
그위를 썰매를 타고 달리면 마치 구름다리 위를 지나듯 스릴만점이었죠
그예 얼음이 깨지면 방죽에 풍덩 빠져, 방죽두덕에 불을 피워 젖은 몸과 옷을 말렸지요
늦가을 부터는 수만마리의 철새가 그곳에서 겨울을 나는데
청둥오리 기러기 고니떼가 방죽위를 나는 군무는 장관이었지요
지금은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때는 ;싸이나' 라는 독극물을 나락에 뭍혀 촛농으로 감싸 뿌려놓으면 오리 기십마리는 줏었지요
필설로 다 하지 못할 많은 추억이 깃든 그 둥게방죽도 개발에 밀려 지금은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메워지고 말았습니다
농사짓는 물은 금강물이 들어오면서 해결 되었고요
고향에 와서 가슴 아픈일은 찌그러진 황등산을 바라 볼 때였지만
그보다 더 가슴아픈것은 메워진 둥개방죽을 보는 바라볼 때 였을 정도로
둥개방죽은 내 어린시절 놀이터요 삶터였습니다
도시에서 낳고 자란 울 아들들과 비교하면 이런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난
훨씬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기억도 때때로 노력이 필요하고 잊음도 어느정도의 세월이 필요하다지만
내가 자란 농원과 둥개방죽은 언제나 내 가슴속에 살아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