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먹먹함, 알고나니 아름다움,
그리고, 불러보는 것 만으로 추억이 되는땅,
경남 밀양(密陽).
시례 호박소 > 얼음골 > 산외 기회송림 > 월연정 > 영남루 > 천진궁 > 아랑각 > 무봉사 > 박시춘생가 >
위양리 위양지 > 퇴로리 삼운정 > 홍제사 표충비각 > 사명대사 생가지 > 연상리 어변당 > 초동 모선정 > 삼랑진 만어사
영남루에서 바라본 밀양시
모나지 않으며, 튀지 않는다.
그렇다고 후미진 어느 골목과 같은 인상은 아니요, 그곳에 사는 삶이 척박하지도 않다. 지금 밀양의 산과 들녘은 풍성한 가을이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고 들녘마다 집집마다 무심히 자란 감나무에 가치밥만이 남아 깊은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빠름에 집착하는 시대적 강요에서 벗어난 도시, 밀양.
그 한가로운 길, 밀양으로 떠난다.
경상남도의 동북부에 해당하는 밀양,
울주와 청도를 경계로 두고 남쪽의 낙동강을 두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준령이다.
밀양의 진산은 화악산으로 서북풍을 막고 섯으며, 동으로 재약산을 두고 가지산과 천태산, 운문산과 구만산, 철마산이 산맥을 이어 가는 형국이다. 밀양강이 흘러 가면서 북에서 남으로 합류하면서 비옥한 토지를 일구어내 농업이 발달한 밀양땅을 만들어 낸다. 울산의 석남산에서 발원한 동천수가 흘러든 밀양강은 낙동강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든다.
부산과 대구의 중간에 위치한 땅으로, 영남 교통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는 밀양은 KTX의 정차와 신대구 부산 고속도로가 지나는 길로 인근의 창원, 울산,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와 국도가 이어진 핏줄과 같아 일찍이 근대화 초기에서부터 교역이 활발하던 땅이다. 부드러운 물이 가득하여 예로부터 섬유공업이 발달한 당으로 남천강을 두고 상공업의 발달이 활발한 곳이다. 천연의 생수가 풍부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담수가 풍부하여 물맑은 고장으로 물고기와 과채류들의 생육에 좋은 조건을 이루는 땅이다.
그만큼 나대지 않아도 풍부함이 가득한 땅,
밀양땅은 그러한 여유가, 그러한 넉넉함이 가득한, 그래서 꼭 한번은 들려 보아야 할 땅이다. 밀양은 그렇게 모나지 않으면서도 풍성하고, 다양하고, 신비함이 가득한 땅이다.
밀양가는길
새벽 0시,
상쾌한 밤공기를 맞으며 고속도로에 오른다. 시원스러운 길, 삶의 테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운송차량들의 행렬이 요란스럽다. 기쁨과 행복을 전해주려는 수많은 차량들의 행렬, 비록 밤 깊은 시각이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꿈을 위해 밤잠을 설치며 달리고 있다. 그렇게 타인의 행복의 약속을 위해 달리던 그들이 어느덧 대구로, 포항으로, 경주로 길이 나뉘어지며 각자의 길로 들어서고 길손도 부산을 향해 달리다기 밀양의 나들목을 나선다.
어둠 가시지 않은 아득함이 머무는 땅, 밀양.
밀양의 지도를 놓고 보면 시계반대방향으로 길을 내어 호박소를 첫 답사지로 삼고, 만어사를 마무리 답사지로 정했다. 호박소와 얼음골이 자리한 산내면을 들려 밀양시내로 향한 후, 위양지가 자리한 부북면에 이르렀다가 표충비각이 자리한 무안면을 찾는다. 초동면에서 삼랑진읍의 만어사를 목적지로 하는 답사가 된다.
밀양은 물과 산이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땅이자, 역사와 그 속의 인물들이 머물던 땅이다. 그리고 그들은 밀양땅에 머물며 살아갔으며 삶의 흔적들을 남겨 놓았다. 뿌리 없는 기둥이 없으며, 기둥 없는 가지는 없다. 그러하듯 밀양의 한참을 거슬러 오른 옛 사람들의 삶이 베인곳이다. 그 후손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서며 옛 풍경 그대로를 오롯이 간직하며 살아가는 땅이다.
밀양의 교동을 중심부로 놓고 보자면 북쪽으로는 산과 들녘이 좋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풍경이 머무는 호박소와 얼음골, 농업용수 저장을 위한 위양지가 그렇다. 서쪽으로 향하면 사명대사의 생가지와 표충비각이 자리한 곳으로 동쪽의 표총사와 마주보고 있다. 남쪽으로 내려서면 양반가들이 머물던 옛집들이 자리 한곳으로 어변당과 모선정등의 고가들을 만날수 있다. 밀양의 동쪽으로 향하면 백두대간에서 나뉜 능선이 자리하는 곳으로 멋진 산세속에 자리한 표충사와 만어사가 자리한다. 그리고 밀양의 중심부에 들면 고귀한 삶이 전해지는 곳으로 박시춘선생의 생가지가 그러하고, 영남루의 풍경이 그러하며, 아랑각의 애절한 이야기가 그러하다.
만나볼 곳은 많으나 서두를 필요가 없다.
밀양 중심부에 해당하는 영남루 주변부 이외에는 딱히 번잡함이 없다. 외길도 한산하다.
밀양여행의 여유에는 그러한 넉넉한 산하와 사람들이 있었다.
호박소
수천년의 세월동안 물에 씻겨 절구의 모양을 이루었다 하여 호박소, 또는 구연이라 불린다.
폭포에서 떨어져 내린 물길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 깊어 늘 짙푸른 색을 띤 맑은물을 이룬다.
얼음골
밀양3대 신비중의 하나로 삼복더위에는 얼음이 얼고, 처서가 지나면 얼음이 녹는다. 이 후 겨울이 되면 녹은 얼음이 수증기가 되어 피어 오르면서 더운김이 오른다.
약 3천평의 돌밭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석전으로 더울수록 얼음의 양이 많아져 더욱 찬바람을 일어내고 추울수록 더운 열기를 내뿜는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태고적인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골짜기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기회송림
150년전 남기리 기회마을 주민들이 계를 조직하여 북천강의 범람을 막아 마을과 농토를 보호하고자 조성한 방수림이다.
폭 200m에 길이가 자그마치 1500m에 이르며 현재 수령이 150년이 넘는 아름드리 송림으로 가득하다.
월연정
원래는 월영사라는 절집이 있던 자리로 '월영연'이라 하였다. 기묘사화 전, 낙향한 월연 이태선생이 세운 정사로 처음에는 쌍견당이라 하였다.
이 후, 임진란으로 소실된것을 1577년(영조33년)에 이태선생의 8대손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영남루
보물 제147호로 밀양부의 객사로 밀주관에 부속된 건물이었다.
고려 공민왕때, 부사 김주가 영남사라는 절집의 누각이 너무 초라하다 하여 진주 촉석루의 기법을 모방하여 개창하였으니 현재 영남루의 모습이 되었다.
밀양여행의 1번지이자, 밀양인들에게도 가슴 깊이 자리한 명소다. 1931년 왜정시대에도 조선 16경을 선정하면서 영남루가 그 중하나였음은,
경관의 아름다움이 그 시간에도 실로 대단하였음을 알수 있다.
천진궁
단군이래 8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내부의 동쪽에는 부여, 고구려, 가락국의 시조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서쪽에는 신라, 백제, 발해고왕과 조선태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광복 이후 1956년부터 단군봉안전으로 쓰이면서 매해 음력 3월15일에 어천대제를, 개천절인 10월 3일에 개천대제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아랑각
아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낭자를 연민하며 대나무숲 속에 사당을 세워 위로하니 아랑각이라 한다.
해마다 열리는 밀양아리랑대축제에서 모범규수들이 제관이 되어 음력 4월16일이면 제향을 올린다. 아랑각에 놓여진 아랑영정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아랑사당에 영정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맡긴 그림을 19863년 10월에 밀양을 방문하여 직접 걸었다.
위양지
위양못이라 불리기도 하며, 양양제라고도 불렸다. 원래는 안동권씨의 완재정이 자리한 곳이었으나, 수리구역의 제방으로 바뀌었다.
임진란에 무너졌으나 1634년에 둘레 5리에 5개의 작은 섬이 있었으니 이를 양야지, 또는 양양지라 불렀다. 신라와 고려때에는 농사를 짓기 위한 저수지였으며, 조선에 이르러 제방을 수축하며 기능을 강화하였으나, 근래에 이르면서 점치차 축소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5월에서 7월에 이르는 동안 하얗게 피어나는 이팝나무와 완재정의 풍경이 아름다워 전국의 사진작가들을 부러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삼은정
길손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고가이다.
연극 '오구'의 무대이기도 했던 퇴로리 고가마을, 이제는 밀양치즈마을로의 변화로 밀양 고가를 알리는데 열심이다.
그 중 고가의 중심에 벗어나 외딴 숲속에 자리한 고가, 삼은정이다. 마을사람들 조차 익숙하지 않은 고택은 울창한 송림속에 매화나무와 산수유가 가득하고
배롱나무와 회양목이 숲을 이루는 공간이다. 집은 세월을 견디지 못함이 여실한데, 나무들은 혈기왕성하여 숲을 이룬어 고택을 감싸 안는 형국이다.
숲을 이룬 공간, 이제는 숲이 만들어 낸 고택, 삼은정이다.
표충비각
나라에 큰 일이 있을때마다 그 일을 전후하여 땀방울이 맺혀 구슬땀을 흘린다 한다.
일명'땀흘리는 비석'으로 불리기도 하는 비로 1742년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이 경주산의 검은 대리석을 구하여 사명대사의 한평생의 행적을 적었으며, 서산대사와 기허대사의 공적을 새긴 비각이다.
표충송림(무안리 향나무)
높이 1.5m에 둘레 1.1m의 크기로 수령은 300년에 이른다.
보통 위로 자라나는 것이지만, 나무의 원가지를 잘라내고 곁가지를 사방으로 뻗게 하여 지금에 이른다. 영조 18년(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 남명선사가 사명대사의 표충비를 이곳에 세우면서 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 전한다.
어변당
조선초 장수 어변당 박곤 장군이 무예와 학문을 닦는 곳이다.
효성이 지극한 어변당 선생이 양친을 위해 물고기를 기르고자 연못을 조성하였는데 어느날 고기 한마리가 붉은 비늘을 남기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이는 마을에 전해지는 전설로 효자 박곤이 가난하여 더 이상 고기반찬을 해 드릴수 없게 되자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기르게 되었다. 박곤이 먹고 남은 밥 두어수저를 연못에 던져 주곤 했는데, 붉은 물고기가 제일 먼저 먹었다 한다. 훗날, 왜놈과 싸울때 꿈속의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의 말을 듣고 장니를 가지고 있었는데, 왜놈의 조총탄이 모두 비켜 나가는 것이었다. 이 후 여진 정벌에도 큰공을 세운 후 은퇴를 하였는데, 그의 후손들도 물고기에 밥을 주고 있다고 전한다.
모선정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학행이 높던 모선재 박수견 선생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한후에도 여묘실을 지어 평생토록 곡을 하던 곳으로,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탄하여 여묘실을 모선정이라 불렀다.
만어사
절집을 오르는 동나 수많은 돌들을 만날수 있는데, 일제히 절을 향하고 있다.
이는 가락국시대부터 살던 사람을 잡아먹던 나찰녀 다섯과 독룡이 연을 이으면서 사람들에게 횡포를 일삼다가 부처님의 설법으로 돌로 변한것이라 전한다.
또는 큰 홍수로 동해바다의 범람이 있을때 올라온 수많은 물고기가 종석으로 변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고도 전한다.
만어사 경석
만어사 미륵전 안에 모셔진 5m의 돌로 용왕의 아들이 변한 미륵불이라 전한다.
두드리면 맑은 쇳소리가 난다하여 경석, 종석으로 불리며, 미륵전 앞에 수 없이 깔려 있는 돌들은 물고기들이 변한 돌들이라 하여 어산불영이라 불리며
고기들이 변한 돌들이라 하여 만어석이라 불린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첫댓글 방풍림 은 아는데방수림 도 있네요수해때문에 나무를참 지혜로운 발상인것 같아요
예전에는 북천강이 자주 범람하여다 합니다.
그래서 세운 방수림이지요. 그래서인지 유난히 길고 넓습니다.
감사합니다.
밀양 가본듯 안가본곳이 많은곳 길손님 덕에 잘 구경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집에 얼마전 얼음골사과 박스를 부처와서 잘 먹고 있답니다
얼음골 사과 맛좀 보려 했는데..
너무 일찍 들어서는 바람에 구경도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