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6). 이 말씀을 한 목적은 사도 바울이 어느 인간으로부터 복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고 그를 영접하였으며 그 후에 아라비아를 거쳐 다메섹으로 돌아갔으며 개심 후 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십오 일간 체류하면서 사도들 중 둘만 만나 보았다. 게다가 형제들은 그를 두려워하였고 처음에는 그가 사도라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복음을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이 혈육과 의논하지 않는 것에서 배울 점이 많이 있다. 물론 주님 자신의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취하였던 태도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성경에서 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믿기 전에 어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는다. 만일 친구 중에 아무도 믿지 않으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꺼려 한다. 그러나 만일 그의 목사나 어느 선생이 그 구절을 설명한다면 받아들인다. 혈과 육은 성령과 말씀을 대적한다.
또는 말씀에 너무나 분명하여 무슨 뜻인가를 물을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때에는 내가 그 말씀을 행할 수 있을까? 너무나 큰 희생을 치루지 않을까? 하고 질문을 한다. 우리가 의논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혈육은 자기 자신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교황과 같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자리에 앉아서 의논하려고 하는 자이다. 자신의 의논을 따르면서 자신을 교황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독재하는 사람만큼 나쁘고 그 자신이 아닌 어떤 다른 교황같은 사람의 의논을 따르는 사람보다 잘못될 위험성이 더 크다. 만일 어떤 사람이 완전히 이런 교황을 따른다면 로마 가톨릭의 교황을 받아들일 위험성이 더욱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어느 사람보다도 로마 가톨릭 교황의 습관에 많은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지혜있는 사람은 즉시 순종하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도 의논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은 “모사”(사 9:6)이며 “그의 모략은 기묘하”(사 28:29)다.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시 48:14)이시다.
즉시
이 말씀에 유의해 보라. 바울은 멈추어서 의논하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을 잃지 않았다. 교회를 핍박할 때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잘못을 발견하자 곧 돌아섰다. 나사렛의 예수를 보았을 때에 즉시 자기의 주로 인정하고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외쳤다. 그는 올바른 길에서 즉시 일을 착수하기를 기뻐했다. 이것은 깊이 생각하여 볼 가치가 있는 하나의 모본이다. 누구나 진실한 마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60, 32)라고 말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