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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8.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묵상글 (9/17. 21:30, 05:25~ 5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9/17. 21:30, )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5:2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50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11/29) 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이후)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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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1코린15,12-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5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정말로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되살리셨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증언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복음<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루카8,1-3)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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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8.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5308
2026.09.17 21:22
2026년 9월 18일 금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8,1-3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짧고 조용한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고을을 두루 다니며
하느님 나라를 전하실 때,
루카는 잠시 멈추어 ‘여인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
헤로데의 집사의 아내였던 요안나(지체 높은 여인),
수산나, 그리고 ‘이름 없는 많은 이들’.
이 여인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복음 선포라는 이 큰일은
이 여인들의 ‘조용한 후원’ 위에서 이어졌습니다.
‘시중들다’라는 말은 ‘식탁에서 봉사하다’라는 뜻이니,
그들은 먹이고 돌보고 살림을 감당한 ‘숨은 공신들’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재물을 올바로 쓰는 법’에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둔 사람입니다.
곳간을 늘리던 어리석은 부자, 재산을 되돌려 준 자캐오 ―
그 모든 이야기의 한 자리에, 이 여인들을 ‘가장 훌륭한 본보기’로 세웁니다.
그들은 재물을 움켜쥐지도, 헛된 데 흘려버리지도 않고,
‘하느님 나라’라는 가장 소중한 곳에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아낌없이 내어 주었을까요?
복음은 그 까닭을 살짝 일러 줍니다.
그들은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이들이었습니다.
곧, 구원과 치유를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제 향유를 쏟은 여인처럼, 많이 받은 이가 많이 사랑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고백했듯,
은총을 깊이 받은 마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넘쳐흐릅니다.
먼저 받은 사랑이, 아낌없는 나눔으로 흘러나온 것입니다.
성인의 날의 눈으로 보면
이 여인들은 세상이 쉽게 지나치는 ‘숨은 성인’입니다.
거룩함은 대단한 업적이나 이름값이 아니라,
이렇게 조용히, 충실히,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삶에 있습니다.
한국 교회 박해 시대에도,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 곁에는
숨어서 신앙을 지키고 재물과 삶을 바쳐 도운
‘이름 없는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아낌 주간의 눈으로 보면
이 여인들은 ‘아낌’의 참뜻을 보여 줍니다.
아낌은 그저 ‘덜 쓰는 것’이 아니라,
‘쓸 가치가 있는 것에 제대로 쓰는 것’입니다.
덧없는 데는 검소히 아끼고, 하느님 나라와 이웃에는 넉넉히 ―
그것이 재물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재물을 ‘움켜쥐거나 헛되이 흘려버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가진 것을 ‘참으로 소중한 데(하느님 나라·이웃)’에 쓰는가?
나는 드러나지 않는 ‘숨은 충실함’으로 도울 줄 아는가?
나의 나눔은 ‘먼저 받은 은총’에서 흘러나오는가?
주님,
받은 것을 움켜쥐거나 헛되이 낭비하지 않게 하소서.
가진 것을 하느님 나라와 이웃에 아낌없이 쓰게 하시고,
숨은 충실함으로 조용히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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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8.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32?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17. 15:39
지배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도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은 가정 안에서 '급진적인 공동 권한'을 드러내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바오로 사도의 삶을 변모시켜 준 환시
지배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도전!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신학자 캣 아마스(Kat Armas)는 모든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바오로의 믿음이 어떻게 당시 사회가 엄격히 규정하던 권력과 권위의 위계 질서를 뒤집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신약성경의 '가정 규범( household codes )'을 접할 때 우리는 이미 당시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린 가부장적 틀을 보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쓰고 읽던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이러한 문화적 구조와 어떻게 관계 맺고, 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에페소서 5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5,22)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직전 구절에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순종하십시오"(5,21)라고 모든 신자들, 곧 남녀 모두에게 권고합니다. 이 '상호적 순종'은 로마 사회의 가정 규범과는 매우 다른 혁명적인 전환이었습니다. 당시의 규범은 오직 가장(아버지)에게만 절대 권한을 부여했지만, 에페소서 5장은 가정의 모든 구성원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즉, 한 사람—가장의 목소리와 권위만을 인정하던 구조를 깨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각 구성원이 스스로 듣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규범은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권리와 스스로 행동할 권리"를 허락합니다. [1]
바오로는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는 복잡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때로는 제국의 질서를 지지하는 듯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거슬러 저항하는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완전히 제국의 구조에 동화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그 밖에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서간들은 해방을 향한 갈망과, 동시에 당시 세계의 제약에 충실히 순응하는 태도를 함께 보여줍니다. 따라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를 단순히 혁명가로만 혹은 단순히 제국의 집행자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계시와 한계라는 두 가지 힘에 의해 빚어진 한 인간으로서 바오로를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성에 관한 가르침은 바로 이 긴장을 잘 드러내 줍니다:
고린토 전서 7장 4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편의 몸은 아내에게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남편이 아내의 몸에 거의 무제한적인 권한을 행사했지만, 바오로는 그 권력이 공유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 평등적이며, 권위가 새롭게 정의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고린토 전서 11장 5–10절에서는 바오로가 여성들에게 기도할 때 머리를 가리라고 지시하며, 그 근거를 창조 질서에 두는 듯 보입니다. 이처럼 바오로의 가르침은 해방과 제약 사이의 긴장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한편으로는 권력의 공유와 평등을 선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문화적 관습과 질서를 일정 부분 수용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갈라티아서 3장 28절은 제국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다'고 선언하며, 당시 사회의 위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급진적인 비전을 제시합니다.
만약 가정이 국가의 축소판이라면, 가족들이 이 말씀을 실제로 살아낸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요? 그것은 로마 제국이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새로운 질서일 것이며, 제국의 지배 구조 자체를 위협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바오로의 가르침은 가정 안에서 '지배의 권력(power-over)'이 아니라 '함께하는 권력(power-with)'을 제시합니다.
함께하는 권력(Power-with)은 곧 상호적입니다. 그것은 나이와 지위 등에 상관없이 각 사람의 존엄을 경청하고 존중하며, 그 존엄을 기리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권력'은 두려움이나 강압을 통한 지배가 아니라, 공감과 협력의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깊은 우울의 시기를 겪었지만, 어느 날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였고 그 순간 제가 치유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특별한 만남이 아주 거룩한 영혼들에게만 일어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그 전례들을 발견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의 사울, 의심 많은 사도 토마스, 그리고 막달라의 마리아. 이들은 특권을 가진 영혼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과의 만남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Anne W.
References
Richard Beck, The Book of Love: A Better Way to Read the Bible (Broadleaf Books, 2026), 210, 211–212, 213, 214–21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hris Chow, untitled (detail), 2020, photo, Roscoe Village, Coshocton, O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베틀 위에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무늬(패턴)를 기꺼이 내려놓을 때에만 더 큰 이야기를 짜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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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8.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18 04:18
- 살 희망, 죽을 희망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참으로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코린토 신자들이 어찌 부활을 의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서 어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의심하느냐 그 말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정말 죽은 이들의 부활이 있는지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래서 의심이 되었지만
하느님 존재를 의심 없이 믿는 지금은 부활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으면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제 생각에 두 가지 이유 곧 하나는 하느님 능력에 대해 의심하거나
다른 하나는 하느님 사랑에 대해 의심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하느님이
전능하신 천주요 천지의 창조주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바칠 때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니다.”라고 고백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무능한 하느님을 뭣 하러 믿으며,
창조주가 아닌 하느님을 왜 믿으며,
특히 날 창조하지 않은 하느님을 어찌하여 믿고
뭣 하러 믿는다고 고백까지 하는 것입니까?
실로 믿을 이유도 고백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천주요 천지 창조주요 나의 창조주여야지만
우리는 믿을 필요가 있고 사랑의 창조주일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심도 믿을 수 있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두 번째 믿음은 사랑의 창조주라는 것을 믿고,
나도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첫 믿음이 있기에
나를 사랑으로 구원하실 거라는 것도 믿는 믿음인 겁니다.
이토록 창조의 하느님과 구원의 하느님은 밀접합니다.
사랑으로 낳지 않은 부모는 힘들면 버려버리지만
사랑으로 낳았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양육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양육하시는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이렇게 믿기에 우리에게 희망도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희망도 가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덧붙여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우리는 살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살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죽을 희망도 가질 수 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죽을 희망,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잘 죽을 희망이 절실한데
살 희망에서 선종의 희망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희망하는 오늘 우리,
삶과 죽음을 모두 사랑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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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8.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33?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18. 05:34
우리는 계속해서 용서받기에 사랑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여성들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오늘 복음 구절은 루카만의 독특한 전승입니다. 거기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1,5-39), 예언자 안나(2,36-38), 죄 많은 여인(7,36-50), 마르타와 마리아(10,38-42), 등이 굽었다 치유된 여인(13,10-17), 잃은 은전을 찾은 여인(15,8-10), 과부와 재판관(18,1-8) 등도 모두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
이렇게 여성들을 이야기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크게 특별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당시 사회적 맥락에서 볼 때는 예수님을 따르는 여성들의 존재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비록 예수님을 직접 뵌 적은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혁명의 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이는 당시 유다인들이 아침 기도에서 드리던 감사문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기도는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심,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해주심,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게 해주심"에 대한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엄격한 랍비들은 공공장소에서 여성과 대화하지 않았고, 극히 엄격한 이들은 아내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고 합니다.
놀라운 점은 단순히 여성들이 제자들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의 다양성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치유된 마리아 막달레나(마르 16,9; 루카 8,2)는 예수님의 가장 충실한 제자가 되었고, 요안나는 헤로데의 집사 쿠자라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아내였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서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을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이들이 단지 몇 명이 아니라 "많은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오랫동안 마리아 막달레나는 어제 우리가 만났던 루카 7장의 '죄 많은 여인'과 동일시되었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근거가 없는 주장임을 분명히 합니다. 물론 마리아 막달레나도 일곱 마귀(칠죄종)가 들렸었기에 큰 죄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인물들이었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 복음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의 에고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과응보, 혹은 상선벌악의 정신구조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런 정신구조를 훌쩍 뛰어넘는 놀라운 하느님 은총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임을 루카 복음 저자는 더 특별히 강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복음'이 참으로 기쁜 소식인 이유는 우리가 그만한 상을 받을 만하기에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로나 선업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루카 복음 저자는 더더욱 강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은 '여성들의 복음', '가난한 이들의 복음'이라는 별칭이 주어진 것입니다.
어제 복음 말씀, 즉 오늘 복음 바로 직전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더 큰 사랑을 드러낸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과 약자들, 가난한 이들, 죄인들이 복음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 묵상을 하고 나서 이곳(산청 성심원) 경당에서 묵상을 하며 문득 "내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 주님과의 관계가 데면데면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정말로 주님의 용서를 온전히 받았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던 겁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룬 어떤 것과 상관없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해 주시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지를 무의식적으로 먼저 계산하기 때문인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자격 게임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의 대열에 이미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완전하고 무한한 사랑의 주님이 아니라 '나'가 그 중심에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갖지 못한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상태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하느님 사랑의 대상입니다!
영원히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받는 이들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무덤덤하게 만들지 아니면 우리의 정신을 깨울지는 우리가 직접 이 사실을 의식하고 깨어 바라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계속해서 용서받기에 사랑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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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8.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5306
2026.09.17 16:40
성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묵상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가 프란치스코의 몸에 새겨진 기적을 기념하는 날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따르며 그분의 삶과 사랑을 살아낸 끝에, 마침내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의 존재 안에 새겨진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라베르나 산에서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과 삶에 새겨지고 있던 상처였습니다. 그는 성흔을 얻으려 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으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다가 마침내 그분의 상처까지 닮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생애에서 가장 깊은 관심 가운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십자가의 골고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내려오시는 하느님, 자신을 비우시는 하느님, 인간의 손에 자신을 맡기시는 하느님, 그리고 끝내 자신을 내어주시는 가난한 하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아기가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분께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분이 되셨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분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바로 여기에서 가난을 배웠습니다. 그에게 가난은 단순히 재물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은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며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내려가고, 사랑하기 위하여 내려놓으며, 사랑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허용하고, 마침내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주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칸 가난의 첫 번째 움직임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에게 올라오라고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인간에게 내려오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로 들어오셨습니다. 구유로 내려오셨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로 내려오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고 마침내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자신과 형제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도 이 내려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높은 사람이 되기보다 작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내려간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와 경쟁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인정받으려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고, 내가 옳다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자리, 대접받아야 한다는 자리, 공동체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가난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 위에 서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두 번째 움직임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보다 내려놓기 어려운 것은 내 생각이며, 내 판단이며, 내 경험이며, 내 명예이고, 내가 옳다는 확신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물질은 내려놓으면서도 자기 뜻은 내려놓지 못합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인정받고 싶어 하고, 봉사하면서도 내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사랑하면서도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하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관계 안에서 우리의 소유욕은 교묘하게 드러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붙잡고,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하며,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난은 말합니다. “그 사람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형제도 내 것이 아니고 공동체도 내 것이 아니며, 내가 맡은 직책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룬 일도, 나의 능력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궁극적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려놓음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반환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움직임은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가난은 더욱 깊어집니다. 내려놓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결과를 통제하려 합니다. 기도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응답을 기다리고, 사랑하면서도 상대방의 변화를 기대하며, 봉사하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당신을 거부할 자유까지 허용하셨습니다. 배반당하고 버림받으며 오해받는 현실을 힘으로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도 이러한 가난을 배워야 했습니다. 자신이 시작한 형제회가 언제나 자신의 이상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이 많아지면서 자신이 꿈꾸었던 초기의 단순성과 현실 사이의 긴장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가 직면해야 했던 가난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시작했지만 내 것이 아니다.” 허용한다는 것은 잘못을 방치하거나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상대방의 시간이 있음을 인정하고, 형제에게 형제의 자유가 있음을 인정하며, 무엇보다 하느님께 하느님의 시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움직임은 ‘놓아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아픈 가난입니다. 내려놓음이 내 안의 소유욕을 비우는 것이라면, 놓아줌은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나와 다른 길을 걸어갈 자유까지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붙잡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놓아주고, 스승이 제자를 놓아주며, 책임자가 후임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내가 이루었던 일들, 내가 살아온 자리와 마지막에는 내 생명까지도 놓아주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생의 마지막에 자신을 벌거벗은 채 땅 위에 눕혀 달라고 했던 모습은 그의 가난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붙잡지 않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난은 우리를 빈손으로 끝나게 하지 않습니다. 내려가면 다른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려놓으면 두 손이 비워져 다른 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허용하면 내 안에 다른 사람이 존재할 공간이 생깁니다.
놓아주면 나도 자유로워지고 상대방도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결국 관계를 살리는 가난이며 형제성을 가능하게 하는 가난입니다. 내가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 형제가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내 판단으로 가득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 계획으로 가득하면 하느님의 뜻이 들어올 공간조차 없습니다. 가난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비워진 상태입니다. 바로 그 가난한 자리에 하느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 산에서 받은 오상성흔은 그의 삶과 동떨어진 신비로운 사건이 아닙니다.
그는 평생 내려갔습니다. 나환자에게로 내려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으며, 작은 형제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평생 내려놓았습니다. 재산을 내려놓았고 신분을 내려놓았으며 명예와 자기 뜻까지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는 허용했습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형제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까지 하느님께 맡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놓아주었습니다. 형제회도 놓아주고, 자신의 꿈도 놓아주며, 마지막에는 자기 생명까지 하느님께 돌려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라베르나 산에서 프란치스코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나타난 다섯 상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상처는 이미 그의 삶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의 손은 이미 나환자를 끌어안은 손이었습니다. 그의 발은 이미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걸어간 발이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이미 형제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품었던 가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몸에 새겨진 오상은 삶에 먼저 새겨져 있던 그리스도의 흔적이 몸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상 축일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삶의 실재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란치스코의 상처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처 이전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손에는 성흔이 없지만 누군가를 붙잡는 대신 일으켜 줄 수 있습니다. 내 발에는 성흔이 없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내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상처가 없지만 다른 사람의 아픔이 들어올 자리를 마음에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상은 시작됩니다.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사랑입니다. 내려가는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내려놓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소유하지 않기 위해서이며, 허용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이고, 놓아주는 것은 그를 하느님께 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가난은 상실의 기술이 아니라 사랑의 기술입니다. 오상 역시 고통을 찾아간 사람에게 주어진 표지가 아니라, 끝까지 가난하게 사랑하여 마침내 그리스도를 닮게 된 사람에게 새겨진 사랑의 흔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에 우리는 자신의 몸에서 상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삶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내려가고 있는가. 무엇을 아직도 움켜쥐고 있는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를 수 있도록 얼마나 허용하고 있는가.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놓아주어야 할 것을 아직 붙잡고 있지는 않은가. 프란치스코의 오상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삶의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가?” 육화에서 십자가까지 내려오신 그리스도처럼, 프란치스코도 평생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면서 마침내 가난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놓아준 마지막 자리에서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얻었고, 형제를 얻었으며, 태양과 달과 바람과 물과 땅과 죽음까지도 형제와 자매로 다시 얻었습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가난의 놀라운 역설입니다. 소유하려 할 때 세상은 ‘나의 것’이 되지만, 놓아줄 때 세상은 ‘나의 형제’가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오상성흔의 가장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상처가 프란치스코의 몸에 새겨졌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몸이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가 가난하고 겸손하며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갔다는 것입니다. 오상은 그리스도를 많이 생각한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닮아버린 사람의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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