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이 바로 법당 / 법정스님]
수행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형성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보살핌입니다.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자기가 가장 잘 압니다.
가끔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흐름에 휩쓸려 자주적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초기 경전에서는 몸을 허망하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이 몸에 너무 집착해
그 몸이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남긴 것입니다.
몸이란 무엇입니까?
흔히 “지, 수, 화, 풍 네 가지로 화합된 물건이다.
고깃덩어리다.”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몸을 매우 천하게 여기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란 여러 가지 물질적인 것이 화합되어 이루어진
한때의 유기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을 하나의 법당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이 몸은 부처가 거처하는 법당일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부처가 있기 때문에,
자기 몸이 부처를 안고 있는 법당이기 때문에,
그 법당을 늘 청정하게 지키고 가꾸어야 합니다.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제 낡은 법당을 지켜봅니다.
특히 요즘은 세월의 무게라든가
삶의 뒤뜰 같은 것을 가끔 헤아리게 됩니다.
이런 일은 주로 한밤중에 일어납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병을 동반합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노(老), 병(病)의 끝은 몸을 바꾸는 일입니다.
전에는 약이 생기면 노스님들께 드리고 제가 먹지 않았는데,
요즘은 제가 필요해서 가끔 구해다 먹곤 합니다.
그것이 늙는다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기침이 잠을 깨우면,
전에는 그것을 고통스럽게 여겼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침이 아니면
이 밤중에 누가 나를 불러 깨우겠는가?’하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살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이며,
천식 기침이 어떤 때는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아주 맑고 투명한 의식을 지닐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면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습니다.
살 만큼 살다 보면 부품이 고장 나서 덜컹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고통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거부하니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한밤중에 일어나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
거기서 많은 것을 깨칠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내가 남은 생애를,
허락된 세월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도
스스로 헤아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도 어떤 확신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남의 말에 속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에 다니면서 참선을 하시는 분들은 잘하고 있다가도
누가 와서 참선보다 염불이 낫다는 식으로 속삭이면
그런 말에 흔들려서 새로 시작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에
스님이든 거사이든 보살이든 잘 안된다고
다른 것을 새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오늘 처음 듣는 말이 아닙니다.
수없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여전히 부처를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고한 믿음은 내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내적인 체험이 없으면 관념적입니다.
《화엄경》에 보면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확고한 믿음이 내적인 체험을 거쳐야만
공덕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단지 믿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안팎이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믿고 행하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선지식을 찾아서 밖으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마음과 몸을 통해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또 이름에 팔리지 마십시오.
아무개 스님, 아무개 누구 하는 이름은 허망한 것입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나무든, 꽃이든,
우리에게 지혜와 자비심을 일깨워 준 그런 존재자가
곧 내 스승이자 선지식입니다.
우리가 헛눈 팔지 않고 깨어 있으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러한 스승과 마주치게 됩니다.
스승을 결코 먼 데서 찾지 마십시오.
자기 안에서 찾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상황을 거부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면,
거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는 것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 출처 / 2003년 2월 16일 동안거 해제 법문
- 음악 / 바흐-무반주 첼로곡 No.3 in C major, BWV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