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에서 집까지 오자면, 녹색 지요다 선의 유시마역을 지나서 붉은 색 마루노우찌선 홍고산쪼매역을 지나서 왼쪽으로 돌아 골목길을 걷다 보면 되는데
아내와 나는 항상 지름길을 택했다.
동경대 의대 병원의 담을 넘어서, 동경대 본관을 지나 정문 아까몽을 빠져나오면 골목길이 보이고 곧 집이었다.
동경대 도서관 앞은 수십 미터가 넘는 은행나무가 수십 그루 서 있었다.
가을이면, 은행 열매와 잎이 너무나 많이 떨어져 학교 청소부가 처리가 불가능했다.
은행나무 밑을 걸으면 무릎까지 빠져서 눈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본관 안쪽으로 들어가면 야스다 강당과 작은 연못이 있었다.
불탄 채로 보존되어 있던 야스다 강당은 적군파의 역사로 남겨져 있다.
일본의 극렬했던 학생운동이 공산당을 흉내낸 적군파 아이들을 탄생시켰다.
전군파의 지도자 중에 한 명이었던 시게노부 후사코의 아름다운 얼굴과 야스다 강당은 어울리지 않았다.
기꼬망 간장 공장 공순이도 메이지 대학 야간부를 다녔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무신정권의 공주의 집 문이었던 아까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였을 것이다.
그녀의 아이가 팔레스타인 전사의 혼열아였던 것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은행나무 열매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부드러운 껍질을 까고 씨앗을 감싸고 있던 딱딱한 껍질을 또 한번 까서 후라이판에 구워 먹었다.
은행 열매를 좋아하지도 않던 아내는 그 과정이 재밌다고 몇 번이고 은행나무 열매를 주워 왔다.
그 당시 한국에는 은행나무가 거의 없었다.
우에노의 거리에는 성매매 전단지가 동경대 은행나무 잎처럼 쌓여 있었다.
우에노 공원 옆에는 포르노 극장과 누드쇼를 공연하는 극장이 있었다.
일본 여자를 비롯하여 외국 여자들도 발가 벗고 자신의 성기를 보여 주었다.
여자들의 성기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여자들은 손을 이용해서 성기에서 나는 소리로 음악을 만들었다. 여자의 성기가 악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순진한 한반도 유학생으로서는 경악할 일이었다.
여자의 그곳에서 아이가 나온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한동안 그 충격은 화석처럼 남아있었다.
그것은 길바닥을 뒹굴었던 성매매 아가씨의 알몸이 박혀있던 전단지 보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동경대를 가자면 지요다 선의 유시마 역이나 네즈 역이나 마루노우치 선의 홍고 산쪼매역을 이용하면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홍고산쪼메 역을 이용한다.
홍고 산쪼매 역을 나오면, 태어나서 처음 본 햄버거를 파는 가게와 담배 자판기가 있었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는 양담배라서 단속했던 수십 가지 외국 담배를 살 수 있었다.
호기심에 담배를 피지 않더 내가 사서 한번 피웠다가, 삼십년이 흘러 아내가 죽고 다시 담배를 피웠다.
동경대 뒤에는 우에노 공원이 있는데, 커다란 연못과 동물원과 벚나무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못 가의 벤치에는 이혼당한 남자 거지들이 양주를 마시고 있었다.
박정희가 먹고 죽었다던 시바스 리갈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시바스 리갈 양주와 수십 가지 양담배로 나를 압도했다.
아내와 학교 앞 작은 술집에서 서울 올림픽 개막식을 보았다. 같이 보던 술집 주인이 자기도 고향 시골에서 어릴 때 굴렁쇠를 굴렸다면서 개막식을 극찬했다.
나는 동경대 야스다 강당 앞의 작은 연못에서 책을 읽었다.
맑스의 자본론을 비롯해서 그 당시 한국에서는 금서였던 책을 수백권 읽었다.
나는 얌전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자본론의 허구를 감방 알게 되면서 아나키스트로 전환하였다. 단지 책으로만.
매달 집으로 배달되었던 공산당 기관지 적기는 나를 변화 시키고 있었다.
학생운동으로 군대에 끌려가고 제대 후 정신을 차리고 유학을 오고, 동경대 야스다 강당의 실체를 알고 나서, 내가 한 짓이 얼마나 허무한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얼마 후, 아내가 임신을 하고 입덧이 심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