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미술품 수출 막는 문화재법… 미술계 “규제 완화해야”
근현대 미술품 수출 규제 논란
곽인식 작가의 1962년 작품 ‘62-602’.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실은 “작가의 초기작 중에서도 대표성을 띠며, 희귀성이 인정된다”며 올 9월 이 작품의 영국 런던 프리즈 출품을 위한 반출 신청에 대해 ‘불가’ 결정을 내렸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1. 올해 9월 1일 인천국제공항 내 문화재감정관실. 학고재 갤러리가 올 10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아트페어 프리즈 런던에 출품해 판매하려던 작품 1점에 대해 ‘반출 불가’ 결정이 내려졌다. 작품은 ‘물성 탐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곽인식(1919∼1988)이 1962년 유리로 만든 작품 ‘62―602’였다. 문화재청은 이 작품이 “1960년대 곽 작가의 초기작 중에서도 대표성을 띤다”며 “예술적·학술적 가치는 물론 희귀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국내에서 지켜야 하는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이중섭 작가가 1950년대 그린 ‘꽃나무 가지에 앉은 새’. 2020년 홍콩 반출이 무산됐다. 문화재청은 “제작된 지 50년이 지난 작품이면서 예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은 근대 회화 작품”이라고 반출 불가 사유를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2. 2020년에는 근대 한국미술의 거장 이중섭(1916∼1956)의 1950년대 초 회화 ‘꽃나무 가지에 앉은 새’의 홍콩 반출이 불허됐다. 당시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실은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큰 근대기 회화작품”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2019년엔 이인성(1912∼1950)의 1939년 작품 ‘Peach’가 미국으로 출품되려다가 문화재청으로부터 반출 불가를 통보받았다. “근대 한국 회화사에서도 기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이유였다.》
문화재청이 국외 반출 불가를 결정한 이 작품들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제작된 지 50년이 지났다. 둘째, 작품의 예술적·학술적·역사적 가치가 인정된다. 셋째, 희소성 시대성 특이성 등이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 문화재보호법(제60조)은 이 조건들을 충족하는 예술작품을 ‘일반동산문화재’로 규정하고, 국외로의 영구적 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우리 문화재를 약탈당한 역사적 맥락을 담아 제정됐다. 문화재를 지키지 못했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비(非)지정 문화재에도 엄격한 규제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세계 미술 시장이 K미술에 주목하면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미술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해외 갤러리 등의 한국 근대 미술품 구입을 문화재보호법이 가로막는 탓에 K미술의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보호법, K미술 세계화 걸림돌 돼”
특히 미술계에선 현행법이 생존 작가의 작품까지도 국외 반출을 금지한 점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생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팔려 해도 50년이 넘은 것은 일단 규제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최근 문화재청은 생존 작가의 작품은 일반동산문화재에서 제외하도록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술계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작고한 작가의 경우 시행령이 개정돼도 여전히 규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14일 세상을 떠난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의 작품 중 1973년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원칙적으로 국외로 나갈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반출될 수 없는 작품은 점점 늘어난다.
외국 정부가 인증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전시’ 목적으로 구입할 경우엔 예외적으로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반출될 수 있지만, 민간 갤러리나 개인 소장자에겐 판매될 수 없다.
김인혜 전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세계 미술시장이 이제 막 한국의 단색화를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문화재보호법으로 인해 한국 미술의 확장이 가로막히고 있다”고 했다. 한 국내 옥션 관계자는 “K팝, K무비, K문학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데 비해 K미술의 조명이 더딘 이유”라고 했다.
●“경매 출품 위한 반출도 어려워”
현행법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곳 중 하나가 해외 박물관, 미술관의 한국실이다. 미술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국외 경매에는 한국에 있는 일반동산문화재 출품이 안 되는 탓이다. 경매 출품을 위한 반출은 ‘전시’라는 목적이 확정되지 않은 데다 소장처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해외 박물관 등은 국내 옥션이나 개인 소장자와 따로 접촉해 구매해야 전시 목적으로 미술품을 반출해갈 수 있다. 2018년 이후 올해 8월까지 일반동산문화재의 국외 수출이 허가된 것은 5점이 전부다. 반출 불가 결정이 난 것은 196건이다.
이에 따라 해외 미술관의 한국실은 작품 확보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이 소장한 한국 컬렉션 수는 약 400점. 화려한 금동불상부터 불화, 청자를 비롯한 최고급 컬렉션을 3000점 넘게 소장하고 있는 일본 유물 컬렉션과는 규모와 예술성 면에서 차이가 크다. 임수아 클리블랜드미술관 큐레이터는 “한국 기관이 소장한 국보나 보물을 임시로 빌리는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격차”라며 “개인 소장자나 옥션과 개별적으로 연락해 구매하는 방식으로는 작품 확보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미술계 일각에선 문화재보호법을 일본 수준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 문화청은 비지정문화재의 경우 국외 반출과 국외 거래를 자유롭게 허용한다. 국내외 예술법을 조망한 전문서 ‘예술법’(학고재)을 펴낸 캐슬린 김 미국 뉴욕주 변호사는 “일본처럼 비지정문화재에 대한 규제가 없어야 외국 시장에서 한국의 예술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고, 한국 미술의 세계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비지정문화재 전체 규제 철폐는 시기상조”
반면 문화재청은 일본처럼 비지정문화재 전체를 자유롭게 국외에서 반출·거래되도록 법을 바꾸는 건 시기상조라고 보고 있다. 고미술 시장에선 여전히 도굴되거나 도난된 문화재가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굴곡진 역사를 거치면서 이미 해외로 밀반출된 문화재도 적지 않다. 비지정문화재 전체에 대해 ‘국외 반출 금지’ 규제를 없앨 경우 도난된 중요 문화재가 해외로 반출되는 걸 막을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은영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학예연구관은 “문화재를 약탈당한 역사가 깊은 우리는 일본처럼 규제를 풀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문화재 약탈의 역사를 겪은 이탈리아의 경우는 규제 폐지 대신 완화를 택했다.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중 다량의 문화재를 약탈당한 이탈리아는 원래 한국처럼 만들어진 지 50년이 넘은 유고 작가의 예술작품을 문화재로 보고 정부로부터 수출 허가를 받은 작품만 반출을 허용하는 ‘문화유산법’을 뒀다. 하지만 미술계에서 이 법이 갤러리와 소장자의 매매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오자 2017년 법을 손봤다.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하는 문화재의 범위를 만들어진 지 70년이 넘은 것으로 좁혔다. 또 금전적 가치가 1만3500유로(약 1915만 원) 이하이면 제작 시기에 무관하게 허가를 받지 않고 수출할 수 있도록 했다.
김 변호사는 “한국 법도 현행 50년 기준을 100년 정도로 완화한다면 한국의 근대 미술품이 자유롭게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 주목받을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렇게 될 경우 박서보(1931∼2023), 유영국(1916∼2002), 김환기(1913∼1974) 등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규제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된다.
●“문화재보호법령 개정 방향성 논의”
문화재청은 근현대 미술이 수출되는 길을 넓히기 위한 추가 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올해 초엔 고려대 세종캠퍼스 산학협력단에 관련 연구 용역을 맡긴 상태다. 다만 민간 문화재 감정기관의 신뢰도가 높지 않은 한국 현실상 일정 시가 이하 문화재의 반출을 조건 없이 허용하는 방안은 도입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문화재위원인 박은순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개인 간 해외 거래를 허가하는 건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면서도 “문화재보호법에서 일반동산문화재로 보는 기간의 범위를 좁히거나, 일반동산문화재로 분류되는 조건 규정을 구체화하는 등 여러 방법을 열어두고 전문가들과 문화재보호법 개정 방향성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소연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