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1~4]

1.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아, 후회하고 있다. 나올 때만 해도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지 않았는데, 작은 5단 우산을 쓰고 있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다. 반바지를 입은 터라 다리는 이미 물에 다 젖어버렸고 뒤집어 질까봐 불안불안한 우산을 잡고 있는터라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엉성한 모습으로 사람없는 거리를 걷고 있는 그 때 빗소리 사이로 차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점점 더 가깝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어? 아악!" 촤악 하는 커다란 물소리와 함께 무섭게 지나쳐버리는 검은 색의 차. 덕분에 나는 그 더러운 빗물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써버렸다.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다가 정신을 차린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야! 거기서!" 멀어져가는 차의 뒷통수에다 대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차가 멈추는 것이다. 타고 있던 사람이 내린다. 순간적으로 나도 놀라 내 목소리가 그렇게 컸던가하는 생각을 하는데, 저 사람, 아니 저 남자.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아아 몰라. 그거는 상관없고 오호라 당신, 그래 잘 만났다. 내가 오늘 최소한의 사과는 받고야 말거다. 개념이 있으면 사람이 있는데 그 정도로 무식하게 차를 몰아서는 안되지! "죽었어, 너." 그런데 씩씩 거리며 그를 향해 걸어가던 난 잠시 멈추어 섰다. 우산도 쓰지 않고 내린 그는 옆좌석의 문을 열어 억지로 사람을 끌어냈다. 이번엔 여자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는 탓에 실눈을 뜨고서 가만히 그들을 봤다. 한 걸음, 발을 떼다가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여자를 밀쳐버리는 남자의 모습에 다시 한걸음,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지..저 남자 저거 미친거 아니야. 여자 때리는거 아니야?" 아무리 들으려 해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알겠다. 내 걱정과는 다르게 여자는 너무나 침착하다. 가만히, 꼿꼿하게 서서 크게 소리지르는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에이..짜증나. 사랑싸움 하는거야, 뭐야? 한바탕 가서 따지려고 했는데...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에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남자가 여자의 뺨을 때려버렸다. 여자는 꽤 아플텐데도 얼굴을 만진다거나 혹은 화를 내거나하는 반응이 전혀 없다. 아플텐데, 많이 아플텐데. 마음이 너무 아플텐데. "너무해. 남자가 나빴…" 내 일도 아닌데 시간이 멈춰버린 듯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중얼거렸다. 굵은 물줄기가 동그랗게 튀어오르는 보라색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서있는데, 검은색 구두 하나가 보이더니 검은색 구두 두 개가 되었다. 그 남자다! 급하게 고개를 들었을때 그는 바로 내 왼쪽 옆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또 한번 시간이 멈춰버렸다. "저 남자…" 울어. 울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는데 분명히 봤어, 눈물. 굵은 빗줄기때문에 아까는 그렇게도 흐리더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눈물 한 방울은 왜 그토록 빗속에서도 선명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후 돌아 본 그 거리에는 회색빛 빗소리만이 남아있었다. *** 여전히 뜨거운 8월 그 어느 날. 햇살에 눈이 부시다. 비가 참 많이도 내리던 어제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아, 나." 여기서 봐도 훈이 저 자식, 잔뜩 골이 난 모양이다. 하긴 약속 시간에 40분이나 늦어버렸으니. "지금 걷냐? 빨리 안뛰어?"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고 내게 말하는 훈. 하지만 전혀 위협스럽지가 않다. 미안하지만 김 훈. 넌 내겐 언제까지나 초등학교 3학년 귀여웠던 그 꼬맹이일 뿐이라고. "아~숨차죽겠다!"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다리를 잡고서 일부러 더 숨을 크게 쉬었다. 눈치를 보며 살짝 고개를 드는데, '놀고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훈. 웃어버린다. 히히 풀린거다. "차도 막 밀리고 그래서 그래. 나 정말 중간에 내려서 뛰어왔다니까?" "지하철이 밀리냐?" "버, 버스 탔어." "지하철 탔다고 문자했잖아." 순간 그냥 멍. 이럴 때는 내가 싫다 정말. 정신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더니 내 한쪽 어깨를 밀어버렸다. "거짓말은 진짜 너 10년이 지나도 성공하는 꼴을 못봤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나는 입술만 오물거리다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느새 걷고 있는 우리. 참 익숙하다. 그냥 언제나 옆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랄까. 언제나 옆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사람이랄까. "아!" "왜?" "그 있잖아." "뭐?" "사촌형이라고 했나? 왜 이혼했다던." 머리위로 가라앉는 햇빛이 꽤나 뜨거운지, 훈은 '그래서 어쩌자고'라는 식의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카페 개업했다며. 이 근처 아니야?" 나를 보지도 앞고서 고개만 끄덕끄덕. "나도 아직 가보진 않았는데 꽤 괜찮은가봐." "그런데 있잖아." "어." "왜 이혼했을까." 뜸금없는 물음을 던지자 그제서야 훈의 눈길이 나에게 왔다. 그때다 싶어 최대한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어린 아이의 궁금증 어린 눈을 따라하려 애썼다. 그러나 돌아오는 이 자식의 반응은 영- "별거에 다 관심이다." "뭐?" "아, 야 들어가자." 내 손을 잡아끌고 지나쳐가던 카페로 들어갔다. 어지간히 더웠나보다. 내게 묻지도 않고 레몬 아이스티 두 잔을 시키고서야 늦은 대답을 했다. "그런게 왜 궁금한건데. 얼굴도 모르는 이혼남에게 관심?" "죽을래? 궁금하잖아! 결혼한지 6개월 만에 이혼..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게 결혼 아니야? 내일 보는것도 못 견뎌서 함께 있으려는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마음이 돌아설 수가 있어." "글쎄." "설마 그 사촌오빠 뭐 성격적으로 이상.." 심각한 얼굴로 바짝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훈의 긴 검지 손가락이 나의 이마를 밀어냈다. "그런 사람은 아니야. 이유가..있겠지." "이유?" "이유." 빤히 쳐다보는 내 눈길을 피하고서 창 밖을 보며 훈은 대답했다. 내 마음을 모두 주어버렸던 사람에게서 떠나는 이유..란게 있을까? 드라마와 영화에서나 말하는 '사랑해서' 떠난다는 게 이유라면 어우- 정말 그 것만큼 못난 짓이 없을거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관심들을 떨쳐버렸다. "아, 임은수. 개학이 내일이랬나?" 훈의 물음에 난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4살, 나의 첫 학생들. 그리고 이제 벌써 그 아이들과의 만남도 봄, 여름을 지나쳐간다. 2.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 하성고등학교 미술실. 이 곳이 나의 교실이다. 아이들과 내가 만나는 곳.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개학식은 방송을 통해 20분 만에 마쳤고, 나는 곧바로 4층 가장 왼쪽 교실에 위치한 미술실 앞으로 왔다. 콜록 콜록- 일주일이지만 환기가 되지 않은 복도 내의 공기는 꽤나 탁하고 매웠다. 잠시 입에 손을 가져갔다가 다시 문을 열려는데, "…어?" 열려있네. 내가 열어 놓고 갔었던가. 이상한 마음을 뒤로 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늦었어요." 들어서는 동시에 들린 목소리였다. 조금은 어리고, 또 조금은 어른스러운.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눈앞에서 흩어지자 잠시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아이가 누구인 줄은 알 것 같다. "수한아?" "선생님!" "어?" "눈은 뜨고 말해줘야죠." 공수한. 허리를 숙여 내 얼굴 앞에 자신을 얼굴을 마주하고서 말한다. 그러고선 언제나 그랬듯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머금었다. 난 수한이를 살짝 밀어내며 이번엔 눈을 똑바로 뜨고서 말했다. "너 여기에 왜 있는거야?" "와, 섭섭하다." 내가 밀어낸 만큼 수한인 또 한발자국 다가오며 정말이지 뾰로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언제나 이랬다. 내가 처음 이 학교에 와 아이들과 친해지려 노력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내게 다가와 가장 많이 말을 걸어주던 아이였다. "제일 먼저 선생님 보려고 온거예요." "아유 그러셨어요? 담임 선생님께나 한 번 가보시죠?" "선생님!" "어우 또 소리 지른다. 하이튼 내가 요즘 너 땜에 귀가 멍멍해." "그러게 왜 다 큰 남자 엉덩이를 계속 쳐요! 아~진짜." "아직 어른 되려면 멀었네요." 길길이 날 뛰며 목소리를 높이는 수한이가 웃겨서 난 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혀까지 쏙 내밀어 보였다. 그런 내가 황당한지 한숨을 한번 폭 쉬던 수한인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선생님 지금 해보자는거죠." "오지마?" "먼저 나 건드린거에요." "꺄아! 놔! 안놔? 너 내가 담임 선생님께 다 이른다!" 두 번째다. 나를 안은 건. 지난 번에도 이렇게 장난처럼 나를 안고서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한바탕 곤욕을 치렀는데, 공수한 이 자식은 지금 내가 저의 누나인지, 아님 친구인지. 안 되겠다, 김 훈 그 자식의 말대로 선생님의 위엄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온거야. "공수한. 장난 그만 치고 놔봐." "싫어요." "선생님 화나려고 해. 놔." 먹혀든거다! 평소와 다른 내 목소리에 그제서야 팔을 풀고 내 표정을 살피는 수한이. 그런데 곧바로 다시 안아버렸다. 작게 웃기 시작하는 아이. "거짓말 좀 하지마요." "거짓말 아니야. 불편해 지금." "아니요. 지금 화 안났어요. 선생님은 거짓말 못해요." 이번에는 밀어내는 내 손길에 그대로 밀려놔준다. 교실 뒤편으로 가며 말하는 수한이의 말투는 여유로웠다. 확신하는거다. 지금 내 기분을. 정말이지 훈의 말 그대로인가. 10년이 지나도 거짓말은 못 한다는 그 말. 좋은게 아니잖아 그건. 어쩌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숨기지 못 하는 나의 감정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몰라. "아~또 우리 선생님 고민하신다." "뭐?" "다 보인다고 했죠? 고민하지 말라구요. 숨기는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고 때로는 또 솔직한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거예요." 이게 이제 지금 나를 기어오르다 못해 가르치려 들어! 왠지 모두 맞는 말인것 같아서 아니라고 우기지도 못 하겠고, 가끔은 밉다 정말. "선생님." "어? 아, 응." "뭐야, 속으로 나 흉봤죠?" "그런거 아니야! 너 어쩜 선생님을 그렇게 보냐?" "아아 알겠어요, 알겠어." 시끄럽다는 듯 오른쪽 귀를 막는 아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드러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지한 눈빛이 되어있다. '왜'라는 물음을 담고서 쳐다봤다. "얘보다 내가 백배는 잘생겼죠?" 그렇게 말도 못하는 석고상 하나를 부여잡고서 내게 묻는 것이었다. 후- 그래 임마. 너 잘났어요. 황당해서든 어째서든, 이 아이때문에 웃는 일이 많아졌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래서, 지금은 술 마시고 있어?" - 어. 선배들이 못 가게 하네. 안 무서워? 가줄까? "전혀~ 내 집 찾아가는데 뭐가 무서워." - 아 또 그딴 소리하지. 여자애가 진짜 겁은 없어가지고. "야 틀린 소리 했냐?" - 그래도 조심해서 가라고. 정신 차리고 가라. "네 시아버지. 끊습니다." 난 항상 훈의 모습이 아이 같은데 훈은 또 항상 나를 보면 아이같단다. 우린 서로 어렸을 때의 우리 모습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시아버지같은 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11시를 넘어서는 밤거리를 걸었다. 학교에서 하고 싶던 미술 공예품을 조금 만들다보니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다. 별 생각없이 골목으로 드러섰다. 그다지 좁은 골목이 아닌데도 어두운 건 어쩔 수 없다. 평소 같으면 아무 생각없이 걸었을텐데, 훈 그 자식이 오늘따라 더 신신당부 하는 바람에 기분이 이상하다. 거기에다 저 앞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별 거 아닌데도, 그래, 그냥 사람인데도 귀신이라도 본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오던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돌아가고 있었다. 탁. 그러나 내 손목은 이미 그 낯선 이에 의해 붙잡혔다. 온 몸에 가시가 돋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누구세요! 놔요." "싫은데?" "놔..주세요." "니가 나 봤잖아~" "아, 아니에요! 놔요!" "니가 나 봤잖아 좋아서! 좋아서 봐놓고 왜 돌아가?" 이미 술에 취한 듯한 그에게서는 지독한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강하게 묻어났다. 갑자기 내 허리에 느껴지는 더러운 그의 손길에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눈물이 솟아올랐다. 아무도 없는 거리.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가로등.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있는 힘껏 신고 있던 하이힐로 그의 발등을 찍어 밟았다. 꽤나 아픈지 고통스러워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고, 나는 이러면 죽겠다 싶을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훈. 훈아." 나도 모르게 훈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왔던 길을 되짚어 뛰기 시작하는데 나를 향해 온갖 욕을 퍼붓는 그의 목소리와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깜게 거리를 좁혀왔다. 두려움에 심장이 멎을 듯한 그 순간에 큰 길로 빠져나왔고, 무작정 가까운 건물의 문으로 뛰어들었다. "아앗!" 그런데 때마침 그 문에서 나오던 사람에 의해 난 맥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 사람도 꽤나 놀랐는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에게 달려왔고, 그가 나를 향해 몸을 숙였을 때 무작정 안아버렸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며 눈물이 흘렀다. 한 쪽 신발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말 없이 나를 안아 들고 나왔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직 그의 얼굴도 보지 못 했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넓고 품은 따뜻했다. 중앙에 세워진 스탠드만이 켜져있는 실내는 오렌지 색이 짙었다. 소파에 나를 앉게 한 그는 바로 등을 보였다. 넓은 어깨를 가진 사람이다. 그가 나를 보기 전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좋아해요?" 메아리처럼 아득하고 아늑하게 들리는 조용한 그 음성에 꿈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으나, 여전히 그는 나를 등지고 있다. "카라멜 마끼아또." 3.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카라멜 마끼아또를 좋아하냐고 묻는 그의 목소리에 잠깐이지만 두근거렸다. 낯선 사람, 낯선 장소, 그리고 낯설지만 분명히 따뜻한 그의 목소리. 가장 두려움을 느낀 그 순간에 나를 구해주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지금 난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가볼게요.'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러기엔 코끝으로 다가온 커피의 향기가 너무나 달콤했다. 앞에 있는 테이블을 보았다. 조명이 들어있는 테이블 안에서는 작은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커다란 수조를 이용해 만든 테이블이 예뻤다. 검지 손가락 끝을 유리에 대고 천천히 물고기가 헤엄치는 그 길을 따르고 있었다.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가 커피 한 잔을 테이블 앞에 내려놓았다. "긴장이 풀릴거에요." 그리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을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는 나를 향해 다시 몸을 틀었다. 검은색 바지와 넥타이 없이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그. 몽환적인 분위기 탓에 내 눈에는 그의 모습이 비오는 날의 유리창처럼 아른거렸다. "아 맛은, 없을지도 몰라." 감정없이 내뱉는 말. 잠시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한 모금. 입안 가득 느껴지는 카라멜의 달콤함에 아찔할 정도다. 원래도 단 음식을 즐기지만 정말이지 지금의 이 달콤함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그 때 내 발 밑으로 무언가가 던져졌다. 슬리퍼? 실내용 슬리퍼잖아…? "맨발로 가진 않을 거잖아. 그거라도 신고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앞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남아있는 커피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아, 인사는 해야할 것 같아. "…저." 반대편 진열장 앞에서 등을 돌린채 서있던 그는 나의 목소리에 고개만 오른쪽으로 조금 움직여보였다. 결국 난 그의 얼굴이 아닌 등을 향해 인사를 하게 되었다. "고마워요. 미안했구요." "말, 하긴 하네." "네?" 대답이 없다. 잠깐의 정적에 민망해진 난 등에다 대고 꾸벅- 인사를 했다. "고마웠어요. 아…커피두요." *** 학교. 어제 있었던 일을 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정말 훈의 잔소리에 묻혀 질식할지도 모르니까. 그냥 앞으로는 조금 더 밤길을 조심해야겠다는 그런 다짐 정도로 어제의 일을 지나쳤다. "무슨 생각해요?" 내 양쪽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수한이가 나타났다. 덕분에 자판기 앞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난 입에 있던 것을 다시 뱉아냈다. "켁, 켁! 너!" 콜록 콜록- 눈물이 날 만큼 목이 맵다. 앞에서 웃고 있는 얄미운 공수한. "아~선생님은 진짜 맨날 왜 이래요?" "갑자기 놀래키지 말라고 했지!" "아 또 내 탓해. 선생님이 놀란거죠. 학생한테 맨날 다 뒤집어 씌우고! 이래도 되나 몰라~" "어우 진짜 속터져. 공수한 너 말해봐. 넌 말만 나한테 선생님이라고 하지 내가 니 친구같지?" 눈을 흘기며 아이에게 말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한 수한이. "에이 난 그렇게 버릇없는 놈 아니에요." "뭐?" "경로우대." "뭐, 뭐 경로?" "친구까지는 아니에요. 그래도 뭐 누나 정도로는 보여요." "그게 그거야!" "아~진짜. 아니죠. 어떻게 그게 그거야에요." "맞아. 그게 그거야. 이게 선생님을 놀리구 있어." 음료수 캔 두개를 뽑은 수한이의 뒤통수를 살짝 밀었다. 아, 훈에게 하던 버릇을 가끔 학생에게도 해버린다. 뒤통수를 긁적이는 아이. "은수야."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수한이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아이는 놀란 내 눈을 보고서 장난스럽게 웃어보인다. "이건 친구구요." "너!" "은수 누나~" 내게 팔짱을 끼며 그 커다란 키로 바짝 기대는 아이. "이게 누나에요. 다르죠?" "그래. 졌다, 졌어. 내가 누굴 이겨." "하하. 선생님." "부르지마." "누나." "공수한!" "5살 밖에 안 많은데 이 참에 그냥 누나 해버려요."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소리에 수한인 급하게 교실로 뛰어들어갔고, 그제서야 조용한 교무실에서 숨을 돌렸다. 오늘 5교시는 수업이 없다. 보통은 미술실에서만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교무실이 조금은 불편하다. "임 선생님, 커피 아직이지?" "아, 네. 감사합니다." 30대 후반의 국어 선생님이시다. 유난히 내게 살갑게 대해주시는 분. 가만히 종이컵을 들었는데 갑작스레 어제의 커피향이 떠올랐다. 달콤함. 참을 수 없을 만큼 그 달콤함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4.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 "그래서. 같이 가보자고?" - 어. 그래도 개업했는데 가보는게 맞는거 같다. "그거야 그렇지. 그럼 몇시에?" - 6시? 우리 항상 만나던 데서 만나. "응." - 늦지마. 안기다린다. "응!" 훈과의 약속. 훈의 사촌형이 개업했다는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지금은 5시. 아까부터 나의 눈길은 슬리퍼를 넣어둔 종이가방에 있다. 실내용 슬리퍼를 바깥에서 신는 바람에 조금 더러워졌다. 새로 사주는게 맞는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가 돌려주길 바라고 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단지, 그래 단지 누구에게나 똑같았을 행동. 한숨. "에이 모르겠다."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잠시 망설이다가 종이가방도 한 손에 들고서. *** 어제의 그 건물 앞으로 왔다. 아니, 문 앞까지는 다가가지 못하고 5분이 넘도록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 아, 미치겠네.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갈색 머리에 날씬한 여자, 작고 뚱뚱한 남자, 귀여운 중학생. 이쪽저쪽 정신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바쁜데 나만 이 거리에서 제자리다. 아직 우리 학교 학생이 없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깜깜한 어제 밤에 보았던 그 건물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Daydream. 환상…? 커피향이 가득했던 곳은 카페였다. 어제는 분명히 오렌지빛이 강했는데 유리를 통해 보이는 오늘의 그 곳은 보라색 빛이 더 짙다. 천천히 입구로 다가갔다. 한 여자가 나왔다. 서로의 어깨가 부딪혀 잠시 걸음이 더뎌졌고,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여자 역시 가벼운 미소와 함께 목례를 했다. 그런데 순간 스쳐가는 이미지. 그래! "무슨 일이라도…?" 나도 모르게 여자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적잖게 당황한 듯한 여자. "아아, 죄송해요! 아는 사람인 줄 알고." 급하게 손사레를 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여자는 또 한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알았다. 비오는 날의 그 여자다. 매우 화가 난 남자에게 뺨을 맞았던, 맞아. 그 여자야. "아…그러면." 그리고 또 하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그 순간, 멍하게 시선을 옮겨 카페안을 보았다. 저 뒷모습, 어제의 그가 맞다. 그리고 하나 더- 비오던 날 눈물을 보였던 그 남자도…지금 내 앞의 저 사람이야. 그럴 수도 있다. 우연이 지나친 것일 뿐이다. 그런데 마음이 왜 이렇게 허할까. 깨끗하게 닦여진 유리를 사이에 두고서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에 놀라 종이가방을 입구 오른쪽 옆에다 세워놓은 후 돌아섰다. 바쁘게, 도망치듯이 그렇게. 훈을 만나기로 한 장소도 Daydream과 멀지 않은 곳이다. 10분 가량 일찍 와서 멍하니 바닥을 보고 서있었다. 빗물, 사랑, 싸움, 눈물, 커피……. 잠시 눈을 감고서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 왠일이냐?" 어깨에 올라온 훈의 손. 가볍게 눈길만 주었다. "조금 기다렸다고 삐졌냐?" "내가 너같은 줄 알아?"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순간 뜨끔. "힘이 없기는." "없네 뭐. 다 말해. 오빠가 해결해 줄게." "놀구 있다." 어깨에 올라와있는 훈의 팔을 내리며 말했다.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훈도 웃어보인다. 훈은 아직 대학생이다. 대학교 1학년때 바로 입대를 하였고 지금은 3학년에 재학중. 예쁜 후배가 어쩌고, 마음에 안드는 선배가 저쩌고. 매일 있는 듯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아아. 여기다. 여기 있었네." 내 팔목을 잡아 끄는 훈. '어디?'라는 말과 함께 훈의 눈길을 따라갔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떨어지는 턱. Oh- My GOD. 이런 상황에서 하는 말이겠지. "설마." "맞아 여기. 데이드림이랬어." "확실해?" "아 내가 바보냐." 이미 난 훈의 손에 이끌려 카페안으로 들어 온 후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훈과 그의 시선이 반가움과 함께 마주쳤다. "여어~형!" "어! 김 훈." "와 형. 오~외국물 먹으면 더 멋있어지나?" "까분다. 정말 많이 컸다 너." "나야 뭐. 아 진짜." 크게 웃는 그의 모습이, 잠깐이지만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김 훈 역시 말을 잊지 못하고 웃었다. 어느새 한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 셋. 아니다, 난 빼도 무방할 것이다. 여태 둘이서 이야기를 하느라 훈은 나에 대한 소개도 잊었고, 하다 못해 그마저도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 복잡하다. 그가 훈의 사촌형이었다니. 그러면 아까 그 여자가 결혼했었던… "아 맞다, 형. 소개가 늦었다. 얘는 내 친구. 제일 친한 친구."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느낌이다.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대충 고개만 까딱이고 애꿎은 노란 빨대만 물어뜯었다. 팔꿈치로 나를 툭 건드리는 훈. '왜 그래?' "시끄러." 훈을 보지도 않고 작게 말했다. "하, 하. 얘가 오늘 몸이 좀 안좋은가봐. 아! 얘 선생님이다? 미술 선생님. 안 어울리지?" "뭐 김 훈!" "그렇지 이 반응이지. 이래야 임은수지." "죽을래?" 발끈한 나의 목소리에 남자 둘의 시선은 내게로 와 꽂혔다. 어우 진짜 무슨 짓을 한거야. "들어왔다 가지." 그의 목소리였다. "이봐, 슬리퍼." 그제서야 그가 말하고 있는 상대가 나인줄 알았다. 놀란 눈을 하고서 그를 봤다. 깔끔함, 그리고 섹시함. 이중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나저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딱히 핑계를 댈 거리가 없었다. 아까 분명 눈까지 마주쳤고, 난 그것을 무시하고 가방만 놓고 갔으니. "뭐야? 임은수. 우리 형 알아?" "어? 아니." 당황한 나머지 쪽팔리게 고개까지 흔들며 대답했는데, 훈이 아닌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테이블을 톡톡, 두번 두드렸다. 마주한 시선. 조금은 기분 나쁜 듯한 표정으로 내게 건내는 그의 물음. "아니야?" "네?" "금방 아니라며." "네? 아 그게, 아니, 알긴…아는데." 오른쪽 왼쪽 시선을 옮기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던 그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뭐, 뭐야. 금방 전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잖아. 나야말로 기분이 나빠져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리고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아, 임은수. 왜 이렇게 작아지니. "인연이네." "…네?" '뭐가?'라는 능청스런 표정으로 나를 내려본다. 아, 아니 자기가 말해놓고서는 왜 또 아무말도 안했다는 듯이 구는거야? 속으로는 벌써 수차례 따졌지만 결국엔 또 혼자 우물거리다가 당황한 모습을 들킬까봐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돌아보자 그는 이미 등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었고, 그제서야 잠시 숨을 돌리는데. "종업원, 에어컨 더 빵빵하게 틀어라. 손님 더워하신다." "에어컨이요? 지금도 시원한것 같은데…" "저 손님 얼굴 빨간거 안보여?" 아니나 다를까, '저 손님'이란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 정말! 이봐요, 에어컨 온도쯤은 당신이 조절해도 되잖아!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 했으나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기위해 몸을 돌려 앉는 것이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