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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신라,가야토론방 대야성 및 대야주가 진덕여왕 2년(648년)에 신라에 의해 회복되었다고 판단 하는 이유
소호금천씨 추천 0 조회 391 10.01.15 16:01 댓글 3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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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15 23:31

    첫댓글 소호금천씨님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추정일뿐, 정확한 근거가 되지 못하며, 제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20만출병내용의 오류를 소호금천씨님께서는 경솔하게 사료를 오독한 잘못이다라고 하였지만, 이부분은 이병도 교수가 주장한 내용으로 김유신 열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또한 어차피 노골적으로 편파적인 사료를 근거로 모든 것을 단정하면 안된다면서 일본서기는 역사적 가치성이나 신뢰성이 떨어진다 하였는대, 김유신의 후손이 가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쓴 행록이 나라에서 국가적으로 주도하는 책인 일본서기보다 역사적 신뢰성이나 공정성이 더 높다고 보이시는건지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론에 불과하죠

  • 작성자 10.01.16 08:52

    이병도 교수의 김유신 열전의 20만 출병내용 오류 부분이 님께서 표현것 처럼 정확하게 지적된 것이라면 그 책부분을 소개 좀 부탁합니다..열전 내용에서 전하는 것은 소정방이 직접 20만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내용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만일에 이병도 박사의 주장이 님이 소개한 내용대로라면 오히려 이병도 박사의 오류지적 부분이 신중하지 못햇다고 보여집니다..역사 전문가가 아닌 본인이 보기에도 열전 내용에서 소정방의 20만 참전내용은 조서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 파병과는 거리가 먼것으로 뻔히 보이는 내용인데도 말입니다.

  • 작성자 10.01.16 08:59

    님께서는 김유신 후손이 행록에서 어떻게 가문의 영광을 열전에서 높였다는 그 행록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수 있는지요?..또한 일본서기가 당대 신라인이 집사부에 소속하면서 기밀문서 내용을 발췌하여 행록을 만든 것과 신라사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일본서기 내용에서 일본서기가 신뢰성이 높다구요?..그러면 일본서기에서 표현된 신라사 내용에서 열전내용 보다도 신뢰성과 공정성이 더 높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일본서기내용을 소개 좀 해 줄 수가 있는지요?..본인도 일본서기를 읽고 있지만 공정성?..신뢰성?..

  • 10.01.15 23:43

    또한,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고자 쓴 행록에서 조차, 김유신이 대야성을 함락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네요??? 왜 그런걸까요? 대야성 인근에서 싸워서 수비병력(혹은 의직의 공격병력) 물리친게 함락의 근거가 된다고 보이십니까? 상식적으로 신라입장에서 그렇게 중요하고 군사적 요충지이자, 김춘추의 한이 서려있는 땅이자, 신라가 접수하지 않으면 납득이 되지 않을정도로 바보가 되는 백제의 전초기지도 될수있는 그토록 전략적,군사적,행정적,지리적,역사적으로 중요한 대야성을 함락해놓고도 자랑스럽고 역사적으로 기쁜 사건을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기록을 않해놓았다는거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안되네요.

  • 10.01.16 00:14

    압량주를 비롯한, 대야성 건너서의 방어 요새에서의 부담이 있는 것과, 대야성이 꼭 신라에게 필요한 요충지이다 라는 명제가 별로 호응이 안 되는 듯 합니다만? 보기에 따라선, 대야성이 그렇게까지 꼭 신라 도성을 향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수비 요충지여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정말 ' 신라의 생명줄 ' 처럼 중요시해서였는지, 아니면 가야 지역에 대한 요충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품석을 성주로 삼았는지도 해석하기 나름이구요... 또한 661년에 대야주를 설치하는 것과 거창/함양과 합천이 부흥백제군의 주요 거점으로 아직도 활약하고 있는 것이 왜 이미 신라가 대야성을 함락했다는 이유가 될까요? 양자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 작성자 10.01.16 09:04

    대야성 성주가 이찬급이면 분명히 다르게 보아야지요..보통 성주의 경우 보통 6두품 이하인데요..거창/함양과 합천이 부흥백제군의 주요 거점으로 아직도 활약하고 있는 것이 왜 이미 신라가 대야성을 함락했다는 이유가 될까요?..그러면 제가 본문에 뭐하러 언급을 했겠는지요??..양자의 연관성이 없는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반론해 주시겠습니까?

  • 10.01.17 14:06

    소호님께서 먼저 백제부흥시기의 거창과 함양에서의 저항과 661년 대야주 설치와 관련해서 ' 이미 그 전에 신라가 대야성을 함락했을 것이다 ' 라는 뜬금없는 명제에 대해 더 설득력 있게 근거를 제시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별로 호응 안되는 추정, 혹은 ' 그게 아니라면 왜 다른 데서는 이렇지 않느냐는 반문법 ' 같은 거라면 솔직히 ' 환빠 ' 들도 자기네 주장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만... 아래 댓글에 얘기했습니다만, 661년에서야 대야성을 차지하고 대야주를 설치하다 백제부흥군이 일어나서 분위기가 바뀌고 거창과 함양에서 저항하는 내용, 나름대로 경과상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 작성자 10.01.17 18:45

    여태껏 논의 한것이 진덕여왕 2년 김유신의 대야성 보복전투에서 이미 대야성을 진수한 것으로 토론 된것이며 여태껏 그것을 본문으로 주장하여 왔는데 뜬금없는 명제라니요? 그리고 그때 이미 대야성은 신라의 영역이고 거열성을 방어벽으로 한 거창지역으로 황강을 경계로 한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이 나누어지는 것으로 되는데 그게 대야성의 함락이유와 양자가 전혀 연관이 없다는 주장은 백제 의자왕 항복이전 낙동강 서부를 경계로한 터무니 없는 님의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론인데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시는 님의 고집을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 10.01.17 19:12

    그러니까 거열성을 경계로 대야성이 신라 땅이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니깐요~ 그 근거로 이때까지 님이 제시해 오셧던 게 다 ' 님이 바라는 방향의 추정 ' 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그렸던 ' 그림 ' 밖에 더 있습니까? 사료 비판의 신빙성 문제에 ' 정확할 것이다 ' 라는 믿음과, 괜한 역반문밖에 더 했습니까? 그래서 ' 인식차 ' 를 언급한 겁니다만? 뭘 반증하라는 건지요? 열전의 내용의 신빙성 자체에 대해 님이 제대로 된 근거보다는 신념으로 끼워맞춰 단정짓고 결론내려 말했으니 님이 근거를 대야지요~ 별로 김유신 열전의 그 자세한 행적들이 하나하나 사실 같지는 않아보이거든요? 본기 채택 얘기도 그래서 나왔고요

  • 10.01.16 00:43

    그리고 거창과 함양은 합천 대야성과 아주 인접한 지역까지도 아닙니다. 백제의 항복과 도성에서의 멸망으로 인한 혼란, 그리고 그때 신라가 대야성의 접수 및 대야주 설치, 이후 부흥군의 발발에 따라 대야주 서쪽에 주둔해 있던 상당수 병력의 호응 및 일정 지역 회복.. 그림 안그려질 것도 없는데요? 예전에 ' 빈집털이 ' 언급도 그러했지만, 왜 신라가 대야성을 굳이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그렇게 끼워맞추지 않아도, 대야성이 백제 땅이었다 한들 정황은 충분히 설명이 된다고 봅니다만? 오히려 대야성을 갖고 있었다 치면, 합천은 신라 땅이고 그 북쪽은 백제라 659년엔 구미와 성주 쪽에서 백제의 침공을 받았다고 설명될까요?

  • 작성자 10.01.16 09:05

    거창과 함양은 합천 대야성과 아주 인접한 지역이 아니라구요?..지도책 좀 보시고 나머지는 다음에 다시 토론 합시다.

  • 10.01.17 14:29

    저도 지도 보고 한 말입니다만? 하기사, 뭐 인접했더라도 그게 큰 상관이 있을지 싶군요... 근거라기 보다는 물과 기름같은 인식차와 고집 싸움 같아 더 토론할 거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으로 닉네임 길게 지으신 분? 지금 님의 말씀은 ' 대야성을 신라가 함락했을 것이다 ' 고 믿는 신념의 전제에 상황을 끼워맞추는 쪽에 가깝군요 그건 논지가 아닙니다. 아전인수죠... 왜 백제군이 대야성을 비웠는지, 저항이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와 전후정황은 있나요? 아무 근거도 없는 추측을 함부로 끌어들이는 것은 추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작성자 10.01.17 18:55

    지도를 보면서도 인접지역이 아니라고 우기시는 부여장님에게는 차라리 설명을 포기 포기하겠습니다. 오히려 여기의 회원님들께서 직접 지도를 확인해 보시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거창과 합천은 서로 경계를 한 인접 고을의 郡입니다..그리고 이왕이면 거열성과 대야성을 지도에서 검색해 보십시요..이들의 성은 이미 대략 동국여지승람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해당지역에서도 이미 지방자치지역의 명승지 고적으로 등록된 곳입니다

  • 작성자 10.01.17 18:56

    빈집털이가 어디서 출발되었는지 먼저 그것부터 전제로 하고 난뒤에 따져야 될 문제이지요 앞서 토론된 것을 죄다 무시하고 갑자기 빈집털이가 왜 나오는지요?.님의 충분한 빈집털이 반론을 본문으로 상세하게 주장을 하십시요..아니면 제가 해드릴까요?..빈집털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그것부터 사전 설명을 하고 난뒤에 님의 제대로 된 반론이 있어야지요 갑자기 뜬금없는 빈집털이가 여기에 왜 끼어들지요?

  • 10.01.17 19:13

    앞서 토론된 것들과 무관하지 않으니 빈집털이 얘기도 나오는 것 아닐까요? 짧게 정리해서!! ' 당시 신라로선 백제 도성을 치고 멸망시키는 대원정이 목적이라 당장 빈집털이니 뭐니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660년 백제 정벌을 향해 올인할 당시 대야성이 백제 땅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 여기에 왜 그리 자잘한 꼬투리들이 오가는지 제가 이해를 못할 일이군요.... 이게 무슨 일대일 게임도 아니고, 백제라는 국가 입장에서 도성이 털리는데 (당까지 출동했는데) 상대방 빈집털이를 왜 하고 앉아있어야 할까요? 해서 ' 대야성이 있어서 빈집털이를 안 당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당시 대야성은 신라 땅이었다 ' 는 황당한 명제죠

  • 작성자 10.01.17 21:12

    앞서 토론된 것들과 무관하지 않으니 빈집털이 얘기도 나오는 것 아닐까요? 라고 했습니까??한마디로 아닙니다..님과의 빈집털이 토론은 뭐 완전히 엇박자로 딴소리들만 무성했을 뿐이었습니다.

  • 10.01.16 00:29

    그리고 예전에 말씀하셨던 ' 빈집털이 ' 말인데요... 5만이 백제 도성으로 쳐들어 오는데, ' 그래? 신라가 우리한테 온다고? 우리는 신라 빈집털이를 가야겠군 ' 이라는 생각이 백제 입장에서 쉽게 들 게재였는지를 우선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는 게 합당할 거 같습니다. 덕물도까지 가서 당군과 조우하고 백제의 모든 침공 준비까지 연합해서 끝낸 신라입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래서 전쟁 도중 실제로 북쪽 칠중성은 고구려한테 빈집털이를 당하기도 합니다. 소호님 말씀처럼요.. 왜 ' 백제 침공 ' 을 하기 위해 ' 대야성을 확보하고 가야쪽을 점거하여 철저한 빈집털이 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지 ' 아직도 공감이 안되는군요

  • 10.01.17 14:15

    금돌성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가야지역과 대량주의 백제군이 알아차린다는 보장은 무엇이며, 후방을 들이친다는 명쾌한 전제는 어떻게 내릴 수 있는 걸까요? 지금 현대전처럼 인공위성이라도 동원해서 병력 파악을 즉각적으로 하고 들이칠 수 있다는 뜻으로밖에 안 들리니 참으로 황당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사비도성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준비 다 끝내놓고 침투하고 진격을 개시할때쯤에야 알아차렸습니다. 대야성에서 뜬금없이 금돌성을 뒷치기한다는 황당한 명제는 뭡니까?

  • 10.01.17 14:29

    역으로 왕이 금돌성에서 어느 정도의 군사만 갖고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백제군의 대규모의 요격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뭔가의 보장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대야주에 1만 병력이 됐든 뭐가 됐든 신라 왕이 소수 병력 때문에 습격 당할 게 두려웠다면 그냥 5만 군중에서 김유신과 함께 직접 지휘하면 될 일 아닙니까? 그리고 그럴 정도로 애시당초 백제에서 적의 움직임 포착이나 방어 태세가 원활히 돌아가는 상황이었다면 대야성을 함락했든 안했든 신라는 백제를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주둔하는 당과의 은밀한 접촉 및 공동 연합 작전 같은 것도 할 수가 없구요... 전제가 되는 정황부터 정확히 파악했으면 합니다.

  • 작성자 10.01.17 19:24

    금돌성이 어디인지? 여러 학자들이 이미 비정한 부분도 있지만 대략적인 위치의 비정은 되지요...금돌성의 위치비정은 정영호의 김유신의 백제공격로 연구 논문을 참조하십시요..가장 공감이 되는 논문이니까요...그리고 동사강목에 충북의 백화산성으로 비정하고 잇지만 정영호의 놈문에는 충북 영동군과 경북 상주군의 경계지역의 산성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어쨌던 대략 비슷한 위치이지요.

  • 10.01.16 23:39

    당신께서 입장을 의자왕이라고 가정해 보았을때 , 당장 내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18만 대군앞에서 단한명의 병사라도 도성으로 불러들여 수비를 하라고 명할것이지, 그것으로 서라벌을 공격한다고 해서 전황이 바뀔거라고 보이시는지요? 전쟁이나 전투양상은 그렇게 쉽게 도출해 낼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 작성자 10.01.17 19:11

    新羅大將軍金庾信님 당시 대야성 주둔 백제장군이라도 무열왕을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무열왕을 비롯한 신라의 백제 정벌군 경기도 이천지역인 남천주로 북상 이동하는 마당에 어떻게 무열왕을 사로잡을 수가 있는지요?..압량주 도독도 마찬가지로 남천주로 동행합니다..그런데 도성에는? 압량주는?..방어에 취약하겠지요..그래서 대야성이 이미 신라가 회복하였기에 압량주 도독이 자리를 비울수가 있다는 것이지요..만일에 대야성이 백제수중이고 낙동강 서부가 백제 지역이었다면 그야말로 빈집털이가 아닙니까??..이 부분은 어떤 회원님께서는 전혀 감을 못잡고 엉뚱한 반론으로 오히려 제가 황당해 지는 부분입니다.

  • 10.01.17 15:04

    서라벌을 공격해 도성을 함락시키면요?? 그래서 전황이 바뀌나요? 이미 백제는 망하고 왕도 사로잡혀 끌려가는 판국에요? 그리고 정말 많아봐야 고작 7~8000명 가량의 병력으로 대야성에 최소한 1000명정도의 수비군은 두고 가야할텐대..
    5000정도의 병력정도로 한나라의 도성을 공격해서 빼았는다고요? 병법에서 그러죠. 최소한 수비군의 3배는 되어야 공격이 가능하다고

  • 작성자 10.01.17 19:13

    지금 이상한 주장을 하시는데요 만일에 대야성이 660년 까지 백제수중으로 압량주가 신라의 최후 방어막이었다면 압량주 도독인 김인문이 방어지역을 버리고, 또한 백제사랑님이 주장한바 대로 쥐어짜고 쥐어짜서 5만의 군대를 징발한 신라가 압량주에 군대를 도저히 남겨 둘 가능성은 당연히 없겠지요?....그리고 바로 백제를 침공한 것도 아니고 엉뚱하게 남천주까지 진군했다가 이리저리 약 한달이상을 소요했는데 무슨 백제도성 공격이 왜 나오나요?..남천주로 전병력이 이동했을때 백제가 빈집털이를 하라고 했지요..그렇게도 이해가 안되시는지요?

  • 10.01.17 19:18

    소호님 // 그럼 백제군이 신라의 그런 움직임을 다 알고 빈집털이를 할 보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그래요 압량주에서도 병력을 적지 아니 쥐어짜고 약간의 수비 병력만 남겼겠지요... 그럼 신라가 그 한달 이상이 걸려서 탄현을 넘어 백제 도성까지 진군할 동안 백제는 전군을 모아 빈집털이 하나도 안한 바보일까요? 대야성 쪽이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따지라면 빈집털이 쳐들어갈 곳 투성이겠네요~? 왜 그렇게 단정이 그렇게 섣부른지 모르겠군요

  • 작성자 10.01.17 19:34

    부여장님 계속 우리는 엇박자에서 맴도는군요..신라의 움직임을 백제가 알고 모르고는 백제의 첩자운용능력의 문제라서 제가 답할 성질은 못되지요..다만 합천과 거창을 경계로 가로지르는 황강을 사이에 둔 대야성이 신라의 최전방의 방어지역이었나? 아니면 낙동강을 경계로 한 서부의 백제지역에 대한 압량주가 최전방의 방어막이었는가에 따라 압량주 도독이 압량주를 비우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지요..660년 당시 압량주가 어느지역이었느냐에 따라 명백히 달라지는 상황인데 님은 자꾸 엉뚱한 반론을 할뿐이군요.

  • 10.01.17 21:12

    압량주 도독이 자리를 비우건 말건, 방어선이 낙동강이건 황강이건 신라로서는 ' 쥐어짜낸 ' 그 대병을 끌고 국운을 건 담판을 하는 원정입니다. 그 상황에서 왜 한가롭게 압량주 방어선 걱정을 하고 앉아 있어야 되지요? 아니, 신라군이 우회하는 경로를 백제군이 포착해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일 수 있던상황도 아니고, 그런 때 대야성이 백제 땅인 이유로 달라질게 뭐며 신라가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는가요? 그리고 여담입니다만, 이런 이유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제대로 대처하지도, 미리 간파하지도 못했다는 데에는 첩자나 병력 운용 같은 자잘한 시각의 요소가 아닌, ' 다른 변수 ' 가 있지 않았나도 생각되는군요

  • 10.01.17 19:36

    소호금천씨님, 근대 왜 유독 압독주를 그렇게 강하게 집착하시는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압독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군사적 요새로써 함락이 쉽지도 않고, 설령 함락된다 해서, 그게 신라인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까요??? 제가 백제 대야성주라면 차라리 남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금관경을 쳐서 서라벌로 진격하는게 더 빠르고 편한길입니다. 그런식의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전투양상을 이해해선 안됩니다. 적을 치는데 있어 공격군을 편성한다는 것 자체도 귀족들의 동의도 얻어야 하고 군량이나 보급품 준비등 여러모로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라군이 움직였다고 바로 공격할수 있는게 아닙니다.

  • 작성자 10.01.17 20:57

    참으로 요상한 질문이군요.. 압독주에 왜 집착하느냐구요?..사료를 자세히 살피면 살피수록 그리고 대야성 함락전 후의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그리고 대야성 회복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따라 남쪽 즉 경남지역의 땅이 신라로 편제되느냐 백제로 편제되느냐에 따라 영토경계선에 엄청난 차이가 나지요..그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요..그리고 압독주가 백제관리지역이라면 뭐하려 김해지역으로 갑니까?..그냥 압량주가 텅텅비어 있는데 그냥 쳐들어 가고 신라도성도 별로 군사도 없으니 그냥 가면 됩니다..님의 주장대로 쥐어짜고 쥐어짜서 모조리 경기도 남천주로 다 갔는데 뜬금없이 김해는 왜 쳐들어 가는지요?..그것참 희안한 전략입니다.

  • 10.01.17 21:19

    양보해서, 백제가 그렇게 빈집털이를 갈 수 있었다고 쳐 보지요~ 그리고 신라는 백제를 쳐들어갈 5만 + @도 있고, 백제가 빈집털이를 시킬 충분한 병력도 따로 다 갖춰져 있다면, 그럼 그 방어병력이 대야성이 아니라 압량주에 주둔해 있으면 못 막는 겁니까? 대야성은 군사를 얼마나 쬐금 남겨놓든 백제군이 쳐들어올 때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요? 대야성이 그때 신라 것이었어도 빈집털이는 들어갈 수 있었고, 대야성이 백제 땅이었어도 그렇게 신라가 크게 쳐들어온다면 백제는 빈집털이보다는 자국과 도성체계를 지키기 위한 비상시국에 돌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다지도 대야성 = 신라라는 영토 경계선에 집착하고 단정내리죠?

  • 작성자 10.01.17 22:31

    아주 코메디 놀음을 한듯 합니다..대야성이 과연 진덕여왕2년에 회복이 되었나?라는 명제로 이어진 논리로써 여태껏 이어져 온것으로 선덕여왕때 빼앗긴 대야성이 김유신의 대야성 회복전투이외에 아무런 대야성에 대한 사건과 언급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661년에 압량주를 대야주로 옮기니 사료에도 없는 660년 의자왕 항복시에 대야성이 협조적으로 신라에 넘겨졌대나 어쨌다나 하기에 바로 인접의 거열성이 그러하지 않았었는데 대야성이 항복하여 신라에 귀속될 수가 없다는 논리엿지요 그렇다면 언제 어떤식으로든 기사에 남았어야지 아예 없는데도 말입니다.

  • 작성자 10.01.17 22:36

    여태껏 진행되어온 토론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황당하게 옆길로 새는 "왜 그다지도 대야성 = 신라라는 영토 경계선에 집착하고 단정내리죠? "라고 묻는 님은 여태껏 무엇으로 우리가 토론하였는지요?..그냥 코메디 놀음으로 본인은 대야성 = 신라라는 영토 경계선에 집착하고 단정내렸고 님은 죽어도 아니라고 낙동강 서부쪽은 대야성 함락이후 백제 멸망까지 백제의 영토였다고 집착하면서 대야성 = 백제라고 집착하면서 단정내린것과 뭐가 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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