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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원래 글>
우선 군사적인 상식선에서 분명히 대야성 공격을 목적으로 김유신 장군이 출병하여 옥문곡으로
유인하여 장수 8명과 1,000여명을 포로로 하거나 참수한 승리입니다.
따라서 대야성 주둔 주력군이 대부분 괴멸되었다면 그토록 중요한 성을 접수하질 않고
더욱 백제의 경내인 경남 하동지역으로 추정된 악성등을 쳐들어 가는 바보짓을 왜 하였는가?
가 납득되질 않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대야성을 접수하고 대야성에서 김품석 부부 유해를 교환한 후 윤충의 대야성 참사 행위 등을 충동시켜
병사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킨 다음 그곳(대야성)에서부터 서남쪽인 경남 하동 지역을 경략해야만 제대로 설명이 됩니다.
따라서 대야성 회복과 섬진강 동쪽의 경남 서부지역을 회복한 공로로 이찬에 승진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임명되어 다시 경북상주, 전북 무주, 충북 청주등의 上州지역을 공략 진례성등 9성을
회복시킨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백제사랑님의 반론 글>
우선, 악성은 소호님 의견대로 대야성 인근이라는대에 대해선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이에 반할만한 사료적 증거도 없으니
수긍하겠습니다. 다만, 온문곡전투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도 나와있는대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맞아 두번 싸워 크게 이겼다.
백제 본기에서는 분명 의직이 요거성등 10여성을 공략하여 빼앗은후 옥문곡에서 김유신과 맞서싸워 패한것으로 나옵니다.
대야성의 수비병력이 아니라는 것이죠.
<재반론>
당연한 내용입니다..사료를 자세 검토하면 3월에 의직이 요거성등 십여성을 습격하여 빼았다고 합니다.
의직이 빼앗은 요거성등은 대야성쪽의 下州지역이 아니지요. 이 부분은 김유신의 압량주 군대와는 상관 없는 전쟁입니다.
백제가 上州지역을 침법하여 10여성을 빼았은 내용이지요
문제는 4월달입니다.
김유신은 대야성 보복전투를 벌였었고 이때 상주지역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던 의직이 원군으로 온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따라서 김유신의 압량주 부대는 이를 옥문곡으로 유인하여 격멸시켰다고 보는게 순리이지요
<백제사랑님의 반론 글>
물론 열전에서는 대야성의 수비병력이 나와서 맞서죠. 본기와 열전의 기록이 서로 상대되는대 어느것을 따르는게
순리일까요? 이부분에 대해선 열전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재반론>
앞서 설명한 내용과 연계되는 내용으로 대야성 수비병과 합류된 것으로 보아야지요
단순히 대야성 수비병이 뭐하러 김유신 부대를 뒤쫒아 옥문곡까지 진격을 한답니까?
그런 정도로 김유신 부대가 대야성을 공격했다고는 보는 백제의 장수들이 병법에 어두운 무지랭이들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병법서를 읽었거나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당연히 의직 정도가 되는 대병력의 원군들이 있었기에 김유신 부대를 자신만만하게 추격했다고
보는게 당연한 것 아닐까요?
<백제사랑님의 반론 글>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주석104] 무신(648)에 춘추는 고구려의 청병을 이루지 못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였다.
태종 황제가 “너희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유신은 비록 다소의 재주와 지략이 있으나 만약 황제의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쉽게 걱정거리인
이웃 나라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구나!” 하고는 요청을 수락하여
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문제이 핵심이 되는 옥문곡 전투에 앞서서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소정방이 20만대군을 일으켜 백제를 정벌하라고 명하는
내용이나오고 그 년도가 태화 원년인 648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부분을 본기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있나요?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읍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소정방에게 명령해 20만의 백제정벌군이 출동하였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본기에서는 이와
전혀 다르게, 단지 당태종이, 출동을 하겠다고 말만 한것이지 실제로 소정방이 출동한 내용은 전혀 없군요.
그러면 본기의 내용이 옳은걸까요? 아니면 김유신열전의 내용이 옳은걸까요? 정말 소정방은 이때 20만대군이 출동하였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된건가요? 이를 확인하려면 신당서나 구당서등, 당나라측 사료를 확인해보면 될텐대, 당나라측
사료 어디에서도 648년 소정방이 20만대군을 일으켜 백제를 치러 갔다는 내용은 전무합니다....
이를 토대로 하여 본다면 김유신 열전이 사료상 가치가 본기보다 떨어지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었지요.
<재반론>
이부분은 김춘추가 당나라에 청병사신으로 갔을때 당태종의 약속을 받아낸 것을 표현 한 것인데
김유신 열전을 자세히 읽어보고 주장을 했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하며 조서를 내려 춘추의 요청을 허락하고,
장군 소정방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백제를 치도록 하였다." 이 부분을
"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소정방에게 명령해 20만의 백제정벌군이 출동하였다는 내용이 나오지만..."으로
단단히 오독을 하셨군요..조서내용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김유신 열전 어디에도 당나라 군대 20만이
실제 파병되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또한 열전에는 계속이어서 "춘추가 당으로 들어가 병력 20만을 얻기로 하고 돌아와 유신을 만나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천 명이 달려서인지 내가 살아와 다시 공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부분은 왜 언급을 안하고 앞의 부분만으로 스스로가 오독한 것을 마음대로 단정하여
마치 김유신 열전이 사료상 가치가 본기보다 떨어지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가 경솔하게 사료를 해석하였다는 것을 보여 줄 뿐입니다.
<본인의 원래 글>
셋째로 무열왕 8년(661년) 5월 압량주를 대야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대야주 도독으로 삼는데
여태껏 대야성이 백제 수중에 있었다면 먼저 대야성 함락을 시키고 난 연후에 옮기는게 순서가 아닌가?
그런데 사료 어디에도 김유신 장군이 대야성 공격을 한 이후로 다시 공략하거나 전쟁을 벌인 흔적이 없습니다.
<백제사랑님의 반론>
네, 대야성을 다시 공략하거나 전쟁을 벌인 흔적이 없습니다. 역으로 대야성을 함락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단순히 심증만으로 대야성이 648년에 함락되었다고 확신을 해선 안되죠.
더군다나, 대야성은 김춘추에게 있어 매우 각별한 성이었습니다.
그러한 중요한성을 함락하면서 기록이 없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소호님께서는 대야성 함락기록이 김유신열전이나 일본서기 같은 어느 역사서에서도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끝내 말을 하시지 못하고 계십니다.
단순히 김유신을 시기하는 일부사람들이 그의 공적을 깍아내리기 위해 은폐했다는 논리는 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재반론>
그러니까 다음의 보충 설명이 있는 것 아닌지요?
단순히 함락이라는 단어를 꼭 써야만 함락시킨 것으로 봐야 하는지?
그것을 이후의 내용으로 계속 설명되고 있는데 님께서는 본인의 글을 전혀 이해를 못하시고 자신만의 주장을
되풀이 하고 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원래 글>
661년이면 신라가 백제왕도를 공격하여 순식간에 사비성일대를 점령한 것이지?
백제 남부를 공격하여 점령한 흔적도 보이질 않습니다.
이후 백제 부흥군이 강성해지기 이전이므로 대야성을 동시에 공격하여 함락시키거나
백제 멸망시 동시에 함락되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백제왕이 항복함에 따라 죄다 자연스럽게 항복해야 마땅함에도 기타 지역의 백제부흥군들은 발호하기 때문입니다.
<백제사랑님의 반론>
기록에 전하는 백제부흥운동은 7월 18일 의자왕 항복 이후, 한달가까이 시간이 흐른 8월2일 남장성과 정현성 두성의
반란부터 시작입니다. 지방군은 일단 의자왕이 항복했단 소식이 들리자 전투를 멈추고 아주 잠시동안은 나당연합군에
협조적이었습니다.
<재반론>
지방군은 일단 의자왕이 항복했단 소식이 들리자 전투를 멈추고 아주 잠시동안은 나당연합군에
협조적이었습니다.라는 사료적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히려 신라의 무열왕이 사망함에 따라 신라가 부흥군 토벌에 주춤해진 것이지요
뭐가 백제 지방군이 나단연합군에 협조적이었다는 내용이 어디있습니까??
뒤에 님께서 주장하신 거열성 때문에 오히려 님의 주장을 완벽하게 뒤엎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거열성 문제는 오히려 김유신의 대야성 보복전투에서 다시 되찾음 반증하는 중요한 대목이 되지요
<본인의 원래 글>
따라서 대야성이 백제 수중에 있었다면 배후의 뒷문을 열어 놓고 신라대군이 남천주(경기 이천)까지 북상할 수 도 없게 되지요.
먼저 대야성을 함락 시킨 연후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야성 함락이라는 대서특필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따라서 660년 7월말 백제도성 함락시 부터 661년 5월 사이에 대야성이 자연스럽게 신라에
귀속되었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백제사랑님의 반론 글>
단순히 지리적으로 인접한 적의 성을 남겨두고 모든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는대 대야성이 정말 648년 함락시킨게 맞다면,
거열성의 존재는 무엇인지요?
백제가 망하고 나서 지방군이 온전히 저항 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시는 것역시 억지라고 생각됩니다.
이 때에 이르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덕안(德安)의 5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현을 통할하게 하였고, [그 지역의] 우두머리[渠長]들을 발탁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현령(縣令)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즉, 백제는 의자왕이 항복한 이후로, 지방의 백제군 역시 일단은 항복하여 당나라로부터 도독,자사,현령
등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뭔가 의자왕에 대한 처우나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로
이들이 뒤틀어져서 몇개 성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것이 점점 번져나가게 된것이지요.
일본서기에서도 백제부흥군이 초창기에는 무기가 없어서 몽둥이로 싸웠다는 것이 반증입니다. 지방의
백제군이 온전히 있었다면 이들로부터 무기를 수급받아서 싸우면 그만인대? 왜 몽둥이 들고 무기창고를 습격해
무기를 조달받았다고 나와있겠습니까?
<재반론>
거열성 존재는 663년 기록으로 님의 주장에서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그리고 주로 백제 왕성부근의 부흥군이 언제 지방군으로 부터 무기를 조달받아 싸웁니까?
그리고 뒤에 비로소 지방군의 합류로 활성화 되지요 뒤에 그 많은 부흥군의 무기는 물론 나당연합군으로 부터
탈취한 것도 일부분도 있었지만 그 뒤의 나머지 무기들은요?
설마 나당연합군이 백제 부흥군에게 무기를 조달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일본서기는 백제부흥군이 몽둥이로 싸울만큼 그 활약상을 부각시킬 수 도 있지요.
어차피 노골적으로 편파적인 사료를 근거로 모든 것을 단정하면 안되지요.
<백제사랑님의 반론 글>
끝으로, 김유신에 대한 사료는 삼국사기가 씌여질 무렵, 만약 정말로 김유신이 대야성을 회복하였다면,
최소한 그 후손이 쓴 행록에라도 그 기록이 남아있어야 했을터, 이를 김부식이 옮겨 적으면서 대야성 회복
기록을 하지 않았다면, 김부식이 행록에서의 대야성 회복기록은 말이 안된다고 고의로 삭제한 것일까요??
후손들이 만약 적지 않은것이라면, 왜 김유신이 대야성을 함락하였다는 자랑스러운 선조의 기록을 왜 은폐하려
든것일가요????
(재반론)
함락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그렇다는 뜻인가요?
꼭 함락시켰다 라고 해야만 함락된 것인지요?
그렇다면 역으로 님에게 다시 물어 봅시다.
648년 김유신의 대야성 보복전투 이후 신라가 다시 대야성을 회복했다거나 함락시켰다는 기사가
있었는지요?..그런데 648년 말고는 신라가 대야성을 되찾을 만한 어떠한 기사도 없는데
어떻게 무열왕 8년(661년) 5월 압량주를 대야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대야주 도독을 삼을 수가 있는지요?
님의 주장대로라면 백제 의자왕이 항복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야성이 신라로 접수되었다구요?
그럴 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에 어림도 없습니다.
바로 님께서 거론하신 거열성 때문이지요.
거열성은 경남 거창지역으로 대야성이 있는 합천과 서로 인접하게 대치하고 있는 성입니다.
부여장님의 주장도 있었습니다만 의자왕이 항복하기전에 낙동강을 경계로 전선이 고착화 되었다고 주장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거열성 문제로 661년에 압량주를 대야주 옮길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인접의 거열성이 백제멸망 이후에도 끝까지 남아서 문무왕 3년 (663년)에서야 비로소 흠순과 천존에게
함락당하고 700여급이 참수 당할 만큼 거세게 저항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거창 합천지역의 백제 지방군이 나당연합군에게 협조적 이었다구요?
이미 648년에 신라는 대야성을 회복하고 김품석 부부의 유해를 교환후 악성(미상?:경남지방으로 추정됨)등 12성을 회복함에
따라 거창과 합천의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을 경계로 경남지역 대부분 옛 대야주를 회복한 후 下州지방은 신라 대야성과
백제의 거열성을 경계로 전선이 고착되고
김유신은 다시 상주행군대총관으로 임명받아 진례성등 주로 상주지역을 공략하면서 전선은 이후 상주 또는 북부지방으로
이동 되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따라서 대야성은 인접의 거열성의 행위로 보아 의자왕이 항복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귀속되었다는 논리는 오히려
거열성이 문무왕 3년때 까지 700여명이나 참수 당할 정도로 거세게 저항한 인접지역으로서는 더 더욱 이상해집니다.
혹시 옛날 신라지역이었으니 쉽게 항복할 수가 있다고 반론 하시겠지만 그것은 대야성 함락시
윤충이 남녀(男女) 1천여 인을 사로잡아 백제의 서쪽 주현(州縣)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여 신라에 협조할 만한
위험 인물들은 이미 백제내륙지역으로 옮겼기 때문에 별로 설득력이 없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본인 주장은
신라는 선덕여왕 시절에 대야성을 잃음에 따라 신라는 낙동강 서쪽 지방의 대가야 지역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로 경북 경산과 대구를 방어선으로 한 압량주까지 후퇴한 상태에서
648년에 김유신에 의해 대야성과 대야주 및 경남의 하주지역까지 되찾아 경남거창의 백제 거열성과
신라의 대야성 및 대야주를 경계 (물론 황강을 경계로 함) 로 삼아 이후로는 전투가 없는 고착상태로 빠지며
이후의 전투지역은 주로 신라 서부 즉 上州지역(경북, 충남북)과 북부지역으로 이동하여 일어나게 됩니다.
대야성은 지리적으로 겨우 거열성으로 부터 지원을 받을 수는 있으나 다른 곳에서 마땅히 주둔군의 지원을 할만한 곳이
못되어 백제로써는 신라 도성을 치기 위한 목표가 있었다면 필수적인 전초기지가 될 수 있으나
압량주의 여러곳의 요새를 뚫어야 하므로 무주의 덕유산 자락을 돌아나와 지원해야 하는 장거리 지원으로
거열성만 지켜도 방어가 되는 백제로서는 방어의 목적이라면 되돌려 주자니 아깝고 지키자니 부담되는 성이 될 수가 있지만
반면에 신라로서는 반드시 되찾아야만 할 위협적인 존재로 압력주의 방어막에 큰 부담을 주는 성이기 때문에
다 이겨 놓은 대야성을 진수하질 않고 딴전을 피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전투사가 되지요
신라입장에서는 무조건 되찾아야 할 필연적인 성이며 지역인 것입니다.
그러한 성과 지역을 648년에 신라는 대야성을 회복전투 이후에 단 한차례의 대야성 회복 전투가 없었다는 것도
반드시 648년에 신라가 대야성을 회복 여부와 연계되는 문제이니 반드시 고찰해야 될 문제입니다.
첫댓글 소호금천씨님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추정일뿐, 정확한 근거가 되지 못하며, 제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20만출병내용의 오류를 소호금천씨님께서는 경솔하게 사료를 오독한 잘못이다라고 하였지만, 이부분은 이병도 교수가 주장한 내용으로 김유신 열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또한 어차피 노골적으로 편파적인 사료를 근거로 모든 것을 단정하면 안된다면서 일본서기는 역사적 가치성이나 신뢰성이 떨어진다 하였는대, 김유신의 후손이 가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쓴 행록이 나라에서 국가적으로 주도하는 책인 일본서기보다 역사적 신뢰성이나 공정성이 더 높다고 보이시는건지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론에 불과하죠
이병도 교수의 김유신 열전의 20만 출병내용 오류 부분이 님께서 표현것 처럼 정확하게 지적된 것이라면 그 책부분을 소개 좀 부탁합니다..열전 내용에서 전하는 것은 소정방이 직접 20만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내용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만일에 이병도 박사의 주장이 님이 소개한 내용대로라면 오히려 이병도 박사의 오류지적 부분이 신중하지 못햇다고 보여집니다..역사 전문가가 아닌 본인이 보기에도 열전 내용에서 소정방의 20만 참전내용은 조서내용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 파병과는 거리가 먼것으로 뻔히 보이는 내용인데도 말입니다.
님께서는 김유신 후손이 행록에서 어떻게 가문의 영광을 열전에서 높였다는 그 행록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수 있는지요?..또한 일본서기가 당대 신라인이 집사부에 소속하면서 기밀문서 내용을 발췌하여 행록을 만든 것과 신라사에 별로 도움이 안되는 일본서기 내용에서 일본서기가 신뢰성이 높다구요?..그러면 일본서기에서 표현된 신라사 내용에서 열전내용 보다도 신뢰성과 공정성이 더 높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일본서기내용을 소개 좀 해 줄 수가 있는지요?..본인도 일본서기를 읽고 있지만 공정성?..신뢰성?..
또한,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고자 쓴 행록에서 조차, 김유신이 대야성을 함락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네요??? 왜 그런걸까요? 대야성 인근에서 싸워서 수비병력(혹은 의직의 공격병력) 물리친게 함락의 근거가 된다고 보이십니까? 상식적으로 신라입장에서 그렇게 중요하고 군사적 요충지이자, 김춘추의 한이 서려있는 땅이자, 신라가 접수하지 않으면 납득이 되지 않을정도로 바보가 되는 백제의 전초기지도 될수있는 그토록 전략적,군사적,행정적,지리적,역사적으로 중요한 대야성을 함락해놓고도 자랑스럽고 역사적으로 기쁜 사건을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기록을 않해놓았다는거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안되네요.
압량주를 비롯한, 대야성 건너서의 방어 요새에서의 부담이 있는 것과, 대야성이 꼭 신라에게 필요한 요충지이다 라는 명제가 별로 호응이 안 되는 듯 합니다만? 보기에 따라선, 대야성이 그렇게까지 꼭 신라 도성을 향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수비 요충지여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정말 ' 신라의 생명줄 ' 처럼 중요시해서였는지, 아니면 가야 지역에 대한 요충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품석을 성주로 삼았는지도 해석하기 나름이구요... 또한 661년에 대야주를 설치하는 것과 거창/함양과 합천이 부흥백제군의 주요 거점으로 아직도 활약하고 있는 것이 왜 이미 신라가 대야성을 함락했다는 이유가 될까요? 양자는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대야성 성주가 이찬급이면 분명히 다르게 보아야지요..보통 성주의 경우 보통 6두품 이하인데요..거창/함양과 합천이 부흥백제군의 주요 거점으로 아직도 활약하고 있는 것이 왜 이미 신라가 대야성을 함락했다는 이유가 될까요?..그러면 제가 본문에 뭐하러 언급을 했겠는지요??..양자의 연관성이 없는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반론해 주시겠습니까?
소호님께서 먼저 백제부흥시기의 거창과 함양에서의 저항과 661년 대야주 설치와 관련해서 ' 이미 그 전에 신라가 대야성을 함락했을 것이다 ' 라는 뜬금없는 명제에 대해 더 설득력 있게 근거를 제시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별로 호응 안되는 추정, 혹은 ' 그게 아니라면 왜 다른 데서는 이렇지 않느냐는 반문법 ' 같은 거라면 솔직히 ' 환빠 ' 들도 자기네 주장할 때 쓰는 방법입니다만... 아래 댓글에 얘기했습니다만, 661년에서야 대야성을 차지하고 대야주를 설치하다 백제부흥군이 일어나서 분위기가 바뀌고 거창과 함양에서 저항하는 내용, 나름대로 경과상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논의 한것이 진덕여왕 2년 김유신의 대야성 보복전투에서 이미 대야성을 진수한 것으로 토론 된것이며 여태껏 그것을 본문으로 주장하여 왔는데 뜬금없는 명제라니요? 그리고 그때 이미 대야성은 신라의 영역이고 거열성을 방어벽으로 한 거창지역으로 황강을 경계로 한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이 나누어지는 것으로 되는데 그게 대야성의 함락이유와 양자가 전혀 연관이 없다는 주장은 백제 의자왕 항복이전 낙동강 서부를 경계로한 터무니 없는 님의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론인데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시는 님의 고집을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거열성을 경계로 대야성이 신라 땅이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니깐요~ 그 근거로 이때까지 님이 제시해 오셧던 게 다 ' 님이 바라는 방향의 추정 ' 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그렸던 ' 그림 ' 밖에 더 있습니까? 사료 비판의 신빙성 문제에 ' 정확할 것이다 ' 라는 믿음과, 괜한 역반문밖에 더 했습니까? 그래서 ' 인식차 ' 를 언급한 겁니다만? 뭘 반증하라는 건지요? 열전의 내용의 신빙성 자체에 대해 님이 제대로 된 근거보다는 신념으로 끼워맞춰 단정짓고 결론내려 말했으니 님이 근거를 대야지요~ 별로 김유신 열전의 그 자세한 행적들이 하나하나 사실 같지는 않아보이거든요? 본기 채택 얘기도 그래서 나왔고요
그리고 거창과 함양은 합천 대야성과 아주 인접한 지역까지도 아닙니다. 백제의 항복과 도성에서의 멸망으로 인한 혼란, 그리고 그때 신라가 대야성의 접수 및 대야주 설치, 이후 부흥군의 발발에 따라 대야주 서쪽에 주둔해 있던 상당수 병력의 호응 및 일정 지역 회복.. 그림 안그려질 것도 없는데요? 예전에 ' 빈집털이 ' 언급도 그러했지만, 왜 신라가 대야성을 굳이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그렇게 끼워맞추지 않아도, 대야성이 백제 땅이었다 한들 정황은 충분히 설명이 된다고 봅니다만? 오히려 대야성을 갖고 있었다 치면, 합천은 신라 땅이고 그 북쪽은 백제라 659년엔 구미와 성주 쪽에서 백제의 침공을 받았다고 설명될까요?
거창과 함양은 합천 대야성과 아주 인접한 지역이 아니라구요?..지도책 좀 보시고 나머지는 다음에 다시 토론 합시다.
저도 지도 보고 한 말입니다만? 하기사, 뭐 인접했더라도 그게 큰 상관이 있을지 싶군요... 근거라기 보다는 물과 기름같은 인식차와 고집 싸움 같아 더 토론할 거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으로 닉네임 길게 지으신 분? 지금 님의 말씀은 ' 대야성을 신라가 함락했을 것이다 ' 고 믿는 신념의 전제에 상황을 끼워맞추는 쪽에 가깝군요 그건 논지가 아닙니다. 아전인수죠... 왜 백제군이 대야성을 비웠는지, 저항이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와 전후정황은 있나요? 아무 근거도 없는 추측을 함부로 끌어들이는 것은 추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도를 보면서도 인접지역이 아니라고 우기시는 부여장님에게는 차라리 설명을 포기 포기하겠습니다. 오히려 여기의 회원님들께서 직접 지도를 확인해 보시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거창과 합천은 서로 경계를 한 인접 고을의 郡입니다..그리고 이왕이면 거열성과 대야성을 지도에서 검색해 보십시요..이들의 성은 이미 대략 동국여지승람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해당지역에서도 이미 지방자치지역의 명승지 고적으로 등록된 곳입니다
빈집털이가 어디서 출발되었는지 먼저 그것부터 전제로 하고 난뒤에 따져야 될 문제이지요 앞서 토론된 것을 죄다 무시하고 갑자기 빈집털이가 왜 나오는지요?.님의 충분한 빈집털이 반론을 본문으로 상세하게 주장을 하십시요..아니면 제가 해드릴까요?..빈집털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그것부터 사전 설명을 하고 난뒤에 님의 제대로 된 반론이 있어야지요 갑자기 뜬금없는 빈집털이가 여기에 왜 끼어들지요?
앞서 토론된 것들과 무관하지 않으니 빈집털이 얘기도 나오는 것 아닐까요? 짧게 정리해서!! ' 당시 신라로선 백제 도성을 치고 멸망시키는 대원정이 목적이라 당장 빈집털이니 뭐니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660년 백제 정벌을 향해 올인할 당시 대야성이 백제 땅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 여기에 왜 그리 자잘한 꼬투리들이 오가는지 제가 이해를 못할 일이군요.... 이게 무슨 일대일 게임도 아니고, 백제라는 국가 입장에서 도성이 털리는데 (당까지 출동했는데) 상대방 빈집털이를 왜 하고 앉아있어야 할까요? 해서 ' 대야성이 있어서 빈집털이를 안 당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 당시 대야성은 신라 땅이었다 ' 는 황당한 명제죠
앞서 토론된 것들과 무관하지 않으니 빈집털이 얘기도 나오는 것 아닐까요? 라고 했습니까??한마디로 아닙니다..님과의 빈집털이 토론은 뭐 완전히 엇박자로 딴소리들만 무성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말씀하셨던 ' 빈집털이 ' 말인데요... 5만이 백제 도성으로 쳐들어 오는데, ' 그래? 신라가 우리한테 온다고? 우리는 신라 빈집털이를 가야겠군 ' 이라는 생각이 백제 입장에서 쉽게 들 게재였는지를 우선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는 게 합당할 거 같습니다. 덕물도까지 가서 당군과 조우하고 백제의 모든 침공 준비까지 연합해서 끝낸 신라입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래서 전쟁 도중 실제로 북쪽 칠중성은 고구려한테 빈집털이를 당하기도 합니다. 소호님 말씀처럼요.. 왜 ' 백제 침공 ' 을 하기 위해 ' 대야성을 확보하고 가야쪽을 점거하여 철저한 빈집털이 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지 ' 아직도 공감이 안되는군요
금돌성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가야지역과 대량주의 백제군이 알아차린다는 보장은 무엇이며, 후방을 들이친다는 명쾌한 전제는 어떻게 내릴 수 있는 걸까요? 지금 현대전처럼 인공위성이라도 동원해서 병력 파악을 즉각적으로 하고 들이칠 수 있다는 뜻으로밖에 안 들리니 참으로 황당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사비도성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준비 다 끝내놓고 침투하고 진격을 개시할때쯤에야 알아차렸습니다. 대야성에서 뜬금없이 금돌성을 뒷치기한다는 황당한 명제는 뭡니까?
역으로 왕이 금돌성에서 어느 정도의 군사만 갖고 머물렀다는 것은 그만큼 백제군의 대규모의 요격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뭔가의 보장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대야주에 1만 병력이 됐든 뭐가 됐든 신라 왕이 소수 병력 때문에 습격 당할 게 두려웠다면 그냥 5만 군중에서 김유신과 함께 직접 지휘하면 될 일 아닙니까? 그리고 그럴 정도로 애시당초 백제에서 적의 움직임 포착이나 방어 태세가 원활히 돌아가는 상황이었다면 대야성을 함락했든 안했든 신라는 백제를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주둔하는 당과의 은밀한 접촉 및 공동 연합 작전 같은 것도 할 수가 없구요... 전제가 되는 정황부터 정확히 파악했으면 합니다.
금돌성이 어디인지? 여러 학자들이 이미 비정한 부분도 있지만 대략적인 위치의 비정은 되지요...금돌성의 위치비정은 정영호의 김유신의 백제공격로 연구 논문을 참조하십시요..가장 공감이 되는 논문이니까요...그리고 동사강목에 충북의 백화산성으로 비정하고 잇지만 정영호의 놈문에는 충북 영동군과 경북 상주군의 경계지역의 산성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어쨌던 대략 비슷한 위치이지요.
당신께서 입장을 의자왕이라고 가정해 보았을때 , 당장 내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18만 대군앞에서 단한명의 병사라도 도성으로 불러들여 수비를 하라고 명할것이지, 그것으로 서라벌을 공격한다고 해서 전황이 바뀔거라고 보이시는지요? 전쟁이나 전투양상은 그렇게 쉽게 도출해 낼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新羅大將軍金庾信님 당시 대야성 주둔 백제장군이라도 무열왕을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무열왕을 비롯한 신라의 백제 정벌군 경기도 이천지역인 남천주로 북상 이동하는 마당에 어떻게 무열왕을 사로잡을 수가 있는지요?..압량주 도독도 마찬가지로 남천주로 동행합니다..그런데 도성에는? 압량주는?..방어에 취약하겠지요..그래서 대야성이 이미 신라가 회복하였기에 압량주 도독이 자리를 비울수가 있다는 것이지요..만일에 대야성이 백제수중이고 낙동강 서부가 백제 지역이었다면 그야말로 빈집털이가 아닙니까??..이 부분은 어떤 회원님께서는 전혀 감을 못잡고 엉뚱한 반론으로 오히려 제가 황당해 지는 부분입니다.
서라벌을 공격해 도성을 함락시키면요?? 그래서 전황이 바뀌나요? 이미 백제는 망하고 왕도 사로잡혀 끌려가는 판국에요? 그리고 정말 많아봐야 고작 7~8000명 가량의 병력으로 대야성에 최소한 1000명정도의 수비군은 두고 가야할텐대..
5000정도의 병력정도로 한나라의 도성을 공격해서 빼았는다고요? 병법에서 그러죠. 최소한 수비군의 3배는 되어야 공격이 가능하다고
지금 이상한 주장을 하시는데요 만일에 대야성이 660년 까지 백제수중으로 압량주가 신라의 최후 방어막이었다면 압량주 도독인 김인문이 방어지역을 버리고, 또한 백제사랑님이 주장한바 대로 쥐어짜고 쥐어짜서 5만의 군대를 징발한 신라가 압량주에 군대를 도저히 남겨 둘 가능성은 당연히 없겠지요?....그리고 바로 백제를 침공한 것도 아니고 엉뚱하게 남천주까지 진군했다가 이리저리 약 한달이상을 소요했는데 무슨 백제도성 공격이 왜 나오나요?..남천주로 전병력이 이동했을때 백제가 빈집털이를 하라고 했지요..그렇게도 이해가 안되시는지요?
소호님 // 그럼 백제군이 신라의 그런 움직임을 다 알고 빈집털이를 할 보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그래요 압량주에서도 병력을 적지 아니 쥐어짜고 약간의 수비 병력만 남겼겠지요... 그럼 신라가 그 한달 이상이 걸려서 탄현을 넘어 백제 도성까지 진군할 동안 백제는 전군을 모아 빈집털이 하나도 안한 바보일까요? 대야성 쪽이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따지라면 빈집털이 쳐들어갈 곳 투성이겠네요~? 왜 그렇게 단정이 그렇게 섣부른지 모르겠군요
부여장님 계속 우리는 엇박자에서 맴도는군요..신라의 움직임을 백제가 알고 모르고는 백제의 첩자운용능력의 문제라서 제가 답할 성질은 못되지요..다만 합천과 거창을 경계로 가로지르는 황강을 사이에 둔 대야성이 신라의 최전방의 방어지역이었나? 아니면 낙동강을 경계로 한 서부의 백제지역에 대한 압량주가 최전방의 방어막이었는가에 따라 압량주 도독이 압량주를 비우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지요..660년 당시 압량주가 어느지역이었느냐에 따라 명백히 달라지는 상황인데 님은 자꾸 엉뚱한 반론을 할뿐이군요.
압량주 도독이 자리를 비우건 말건, 방어선이 낙동강이건 황강이건 신라로서는 ' 쥐어짜낸 ' 그 대병을 끌고 국운을 건 담판을 하는 원정입니다. 그 상황에서 왜 한가롭게 압량주 방어선 걱정을 하고 앉아 있어야 되지요? 아니, 신라군이 우회하는 경로를 백제군이 포착해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일 수 있던상황도 아니고, 그런 때 대야성이 백제 땅인 이유로 달라질게 뭐며 신라가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는가요? 그리고 여담입니다만, 이런 이유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제대로 대처하지도, 미리 간파하지도 못했다는 데에는 첩자나 병력 운용 같은 자잘한 시각의 요소가 아닌, ' 다른 변수 ' 가 있지 않았나도 생각되는군요
소호금천씨님, 근대 왜 유독 압독주를 그렇게 강하게 집착하시는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압독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군사적 요새로써 함락이 쉽지도 않고, 설령 함락된다 해서, 그게 신라인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까요??? 제가 백제 대야성주라면 차라리 남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금관경을 쳐서 서라벌로 진격하는게 더 빠르고 편한길입니다. 그런식의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전투양상을 이해해선 안됩니다. 적을 치는데 있어 공격군을 편성한다는 것 자체도 귀족들의 동의도 얻어야 하고 군량이나 보급품 준비등 여러모로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라군이 움직였다고 바로 공격할수 있는게 아닙니다.
참으로 요상한 질문이군요.. 압독주에 왜 집착하느냐구요?..사료를 자세히 살피면 살피수록 그리고 대야성 함락전 후의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그리고 대야성 회복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따라 남쪽 즉 경남지역의 땅이 신라로 편제되느냐 백제로 편제되느냐에 따라 영토경계선에 엄청난 차이가 나지요..그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요..그리고 압독주가 백제관리지역이라면 뭐하려 김해지역으로 갑니까?..그냥 압량주가 텅텅비어 있는데 그냥 쳐들어 가고 신라도성도 별로 군사도 없으니 그냥 가면 됩니다..님의 주장대로 쥐어짜고 쥐어짜서 모조리 경기도 남천주로 다 갔는데 뜬금없이 김해는 왜 쳐들어 가는지요?..그것참 희안한 전략입니다.
양보해서, 백제가 그렇게 빈집털이를 갈 수 있었다고 쳐 보지요~ 그리고 신라는 백제를 쳐들어갈 5만 + @도 있고, 백제가 빈집털이를 시킬 충분한 병력도 따로 다 갖춰져 있다면, 그럼 그 방어병력이 대야성이 아니라 압량주에 주둔해 있으면 못 막는 겁니까? 대야성은 군사를 얼마나 쬐금 남겨놓든 백제군이 쳐들어올 때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요? 대야성이 그때 신라 것이었어도 빈집털이는 들어갈 수 있었고, 대야성이 백제 땅이었어도 그렇게 신라가 크게 쳐들어온다면 백제는 빈집털이보다는 자국과 도성체계를 지키기 위한 비상시국에 돌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다지도 대야성 = 신라라는 영토 경계선에 집착하고 단정내리죠?
아주 코메디 놀음을 한듯 합니다..대야성이 과연 진덕여왕2년에 회복이 되었나?라는 명제로 이어진 논리로써 여태껏 이어져 온것으로 선덕여왕때 빼앗긴 대야성이 김유신의 대야성 회복전투이외에 아무런 대야성에 대한 사건과 언급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661년에 압량주를 대야주로 옮기니 사료에도 없는 660년 의자왕 항복시에 대야성이 협조적으로 신라에 넘겨졌대나 어쨌다나 하기에 바로 인접의 거열성이 그러하지 않았었는데 대야성이 항복하여 신라에 귀속될 수가 없다는 논리엿지요 그렇다면 언제 어떤식으로든 기사에 남았어야지 아예 없는데도 말입니다.
여태껏 진행되어온 토론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황당하게 옆길로 새는 "왜 그다지도 대야성 = 신라라는 영토 경계선에 집착하고 단정내리죠? "라고 묻는 님은 여태껏 무엇으로 우리가 토론하였는지요?..그냥 코메디 놀음으로 본인은 대야성 = 신라라는 영토 경계선에 집착하고 단정내렸고 님은 죽어도 아니라고 낙동강 서부쪽은 대야성 함락이후 백제 멸망까지 백제의 영토였다고 집착하면서 대야성 = 백제라고 집착하면서 단정내린것과 뭐가 다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