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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문익환 목사 일행은 평양공항에 도착한
후 발표한 성명에서,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김일성과 회담 후 조국평화통일
위원회와 가진 공동성명에서 “7·4남북
공동성명에서 확인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한반도 분열의 지속
반대, 정치군사회담 추진과 이산가족
문제 등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공존
원칙에 입각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지지,팀
스피리트(Team Spirit) 합동군사연습이
남북대화 및 평화통일과 양립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전민련이 제안한 범민족대회
소집을 지지하는 등 9개항을 발표했다.
문익환 목사 일행은 10일
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일본을 거쳐 4월 13일 귀국했다.
정부는 이들이 귀국하자마자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해"국가보안법"
상 지령수수, 잠입탈출, 회합통신,
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했다.
방북한 문익환목사(왼쪽)와
김일성 주석이 포옹하고 있다.
▶2009년 이미자,
가수 최초로 은관문화훈장 수상
▶ 2005년 오늘,
해양수산부, 독도의 정식거리를 울릉도에서 87.1km,
죽변에서 216.8km로 각각 2.1km, 3,6km 축소하여 발표
니뽕nippon 시마네현에서 우리 독도까지 거리
157.42km
▶2003년 소설가 이문구씨 별세
▶2002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강진.
최소 2000명 사망
▶2002년 정부, 교육정보
시스템 구축 추진 발표
▶1995년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 나의 노래 / 김광석
▶1994년 조용필,
재미교포 사업가와 결혼
▶1992년 우주미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13일 만에 귀환
313일 만에 지구로 귀환한 소련 우주비행사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1958년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한 크리칼레프는 가가린 우주센터에서 혹독한 우주인 양성과정을 거쳤다. 동료들 중 훈련을 가장 잘 소화해 일찌감치 ‘타고난 우주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방수복을 입고 장시간 물속에서 견디는 수중훈련 등 혹독한 과정의 연속이었지만 훈련 성적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긴 실험은 반년 동안 지속된 ‘모의 우주정거장 생활’ 실험이었다. 크리칼레프의 설명.
그가 우주인으로서 첫발을 뗀 것은 1988년 소련의 우주정거장 ‘미르’로 향하는 우주선에 탑승하면서였다. 1991년 5월 다시 미르로 향했던 그는 귀환 예정일이 지나도 지구로 돌아올 수 없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로 체제가 변하는 과정에서 우주선을 발사할 돈이 없어 우주 미아가 된 것이다.
그가 겨우 지구로 귀환한 것은 1992년 3월, 예정보다 5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것도 독일 정부가 2,400만 달러를 지원해 준 덕이다. 우주 미아가 된 채 언제 돌아갈지 기약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는 20여 가지 실험을 하는 등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여 스타가 됐다. “우주 생활 도중 국적이 바뀌었다”는 농담까지 들었다. 그가 우주에 머무는 동안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탄생했으니 ‘마지막 소련 시민’이었던 셈이다.
처음 미르에서 지낼 때는 한 달에 한 번 우주보급선을 통해 들어오는 신문으로 지구 소식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되면서 보급도 끊겼다. 그는 정작 조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그래도 고립감은 느끼지 않았다. 90분에 한 번씩 지상과의 교신은 계속됐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평소 가족 사랑이 남달랐던 그는 가족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 늘 부담이었다. 그래서 “처와 아들의 목소리라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동료들은 그의 가족을 1주일에 두 번 우주센터로 불러 그와 통화를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러시아 우주인 세르게이 크리칼레프(47세). 2009년 10월 11일 지구로 귀환한 그는 통산 803일 동안 우주에 체류해 우주 최장 체류 기록을 갈아 치웠다. 종전 기록은 1990년대 초반 세르게이 아브데예프(러시아)가 세운 747일이었다.
크리칼레프는 지난 4월 15일 소유스호 발사 때 선장을 맡아 국제 우주정거장(ISS)에 파견된 뒤 약 6개월 만에 귀환했다. 179일 동안의 ISS 체류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서 총 우주 체류 기록 803일을 채워 ‘우주인 중의 우주인’에 오른 것이다.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 1986년 오늘,
동아일보 시사만화 나대로의 이홍우 화백이 국회국방위원회
회식사건 풍자로 보안사에 연행
얼굴이 왜 그래?’
‘회식하다 불상사가 좀….’
‘맞는 순간 어땠어.’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하더군.’
1986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 4컷 시사만화인 ‘나대로 선생’은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사건을 풍자했다. 당시 군 장성이 회식자리에서 국회의원을 때린 ‘국방위 회식사건’은 보도 통제로 인해 구체적 내용이 알려지지 못했다. ‘나대로 선생’이 사건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만화를 그려 놓고 도망갔죠. 다음 날 경복궁 옆 보안사로 끌려가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1981년 미국 보스턴의대,
사상초유의 암면역동물 생산에 성공
▶1981년 삼일운동 33인 이갑성옹 사망
▶1981년 내무부, 연좌제 폐지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1977년 소련, 유럽 및
극동에 SS-20미사일 배치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잘왕 피살
파이살 [Faisal ibn Abdul Aziz Al Saud, 1906(1903)~1975.3.25]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1975년 3월 25일 조카에게 피살돼 오후 2시13분 사망했다. 향년 68세였다. 조카는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리야드 궁전에서의 암살 사건은 국민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왕실은 정신이상인 조카의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나중에 파이잘 국왕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절대왕정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단두형에 처해졌다.
1964년 11월 국왕에 즉위한 파이잘은 곧 국가재정을 건전히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해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제3차-4차 중동전 때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국가들에게 석유금수라는 강한 태도를 보였으나 중동평화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평화추진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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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미국 골퍼 죠니 밀러 홀인원
▶1969년 파키스탄 아유브칸 대통령 하야
▶1969년 국내 첫 장기 이식 수술
▶1968년 주한미군 팬텀기대대 창설
▶1964년 미국 일본간 TV 우주중계 실험에 성공
▶1958년 서독 하원 국방국의 핵무장 결의안 가결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 출범
1957년 3월 25일, 유럽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유럽경제공동체(EEC) 창설에 조인했다.
▶1954년 제1회 학-예술원 회원 선거
▶1951년 이라크, 석유국유화 법안 결정
▶1951년 국군, 동해안 38선 돌파
▶1949년 주미한국대사관 창설, 초대 주미대사 장면
▶1929년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제1회 졸업식
▶1928년 미국의 우주 비행사 - 1970년 아폴로 13호 비행사령관 - 제임스 러벨 출생
▶1926년 항일투사 박열, 사형 선고
항일투사 박 열(朴 烈) 사형 선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 으로 감형되었고, 가네코 후미코는 몇 달 뒤 감옥 안에서 자살 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1949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특임촉탁위원을 지내다가 한독당 탈당 후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1902년 3월 12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출생~ 1974년 1월 17일(71세)북한에서 사망)
▶1919년 독일의 조각가 렘브루크 사망
▶1918년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 사망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1909년).
드뷔시 [Debussy, (Achille-)Claude, 1862.8.22~1918.3.25]
‘방탕한 아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유희’ ‘아라베스크’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근대 작곡가 드뷔시가 1918년 3월 25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드뷔시는 근대음악에서 제일 처음으로 낭만음악에 반대하여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상파 음악의 원조이다.
드뷔시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아 11살 되던 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22살 때에는 칸타타(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을 받아 로마로 유학했다. 그러나 유학생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러시아와 유럽을 여행하며 경험과 감수성을 풍부히 하기도 했다.
드뷔시의 작품을 보면 초기에는 후기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으나 무소르크스키의 음악을 접하고 바그너로부터 멀어지며 점점 인상주의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눈에 띤다.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은 미술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섬세하고 감각적인 음색으로 표현해 낸다. 문학에서의 상징주의를 음악에 표현하기도 했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인상주의 음악을 창시한 첫 작품이다. 드뷔시는 관현악곡, 성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 많은 작품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909년 창경원 동물원 준공
1910년 창경원 동물원 모습
1909년 11월 1일 잘 차린 모닝코트에 모자까지 멋지게 쓴 땅딸막한 청년이 창경궁 앞에 나타난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하나도 없어 뵈는 그 청년은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이었다. 그는 그의 궁궐 중 하나였던 창경궁의 전각을 허물어버린 터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이고 그 개장 기념식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에게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니 궁전 안에 동식물원을 신설하시오."라고 권했던 외국인은 유감스럽게도(?) 함께 자리하지 못했다. 바로 6일 전 하얼삔에서 그 일본 노인은 한국 청년의 총에 사살 당했던 것이다. 그 이름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창경궁의 동식물원 건립 공사는 1908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창경궁 명정전과 남북 행랑 및 주요 전각을 박물관으로 하고 남쪽의 보루각(報漏閣) 일대에 동물원을, 북쪽 춘당대(春塘臺)에는 식물원을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공사가 날로 거세지면서 창경궁 안이 말도 아니게 훼손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대한매일신보는 '동물원을 수축할 차로 동궐(창경궁) 선인문 안에 있는 전각을 몰수히 허는데 그 중에 천여 년 된 옛 전각도 또한 훼절한다더라' (1908.3.6)고 안타까워했다. 마침내 공사는 완공되었고 호랑이와 곰, 토끼 제주 말 등이 어울린 최초의 '동물원'이 탄생했다.
▶1895년 을미개혁 추진
▶1881년 이만손 등 만인소 상소
▶1881년 헝가리 작곡가 벨로
바르톡 출생
▶1871년 군포제 폐지, 호포제 실시
▶1867년 이탈리아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출생
▶1864년 독립운동가 이승훈 출생
▶1829년 그리스 독립
▶ 1807년3월 25일,
영국, 아프리카의 눈물 노예무역 폐지
‘흑색 다이아몬드’라고 불리어진 흑인노예. 1807년 오늘 영국이 대영제국 전역에서 노예무역을 금지했다. 노예무역의 스타트는 ‘대항해 시대’를 개척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끊었고, 이윤 수 백%의 ‘고마진 상품’을 확인한 유럽 각국이 뒤를 이었다.
노예 무역상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모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았고, 이 돈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설탕 목화 등 원료를 구입해 유럽으로 팔았다. 유럽에서 생산된 직물 화약 럼주 등은 아프리카에서 다시 흑인들와 맞바꾸어 졌다. 본국과 아프리카, 식민지를 잇는 3각 무역이었다.
노예무역은 사탕수수 등 농장 확대와 유럽 식민지 확장으로 수요가 급증하면서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다. 17세기부터 노예무역 선두주자가 된 영국은 한창 때인 1771년 한해에만 190척의 노예선으로 4만7000명을 실어 날랐다. 리버풀은 노예들을 실어나를 노예선 건조로, 맨체스터는 아프리카에 팔 면직물을 생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노예무역이 시작된 16세기 초부터 19세기말까지 전체 노예무역 규모는 1500만명에서 3000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노예들은 배 밑에 짐짝처럼 실려 이동하던중 6분의 1이 죽고, 농장에서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다시 3분의 1이 사망했다. 처음에는 현지 지배자에게 몸값을 지불하는 형태의 거래가 이뤄졌으나 ‘자원’ 고갈로 ‘사냥’이 주종을 이루었다.
노예무역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18세기 말부터 반발과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덴마크가 1802년, 영국이 1807년에 노예무역을 금지했고 프랑스 등이 뒤를 이었다. 유럽 번영의 기초를 제공한 노예무역은 아프리카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 후유증이 갈등, 빈곤, 내전 등으로 이어져 아프리카의 눈물은 오늘도 마르지 않고 있다.
▶1801년 독일 시인 노발리스 사망
https://youtu.be/GY0z6eX4X_8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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