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성치 영화를 즐기는 10가지 방법 >> - 월간 키노에 기고되었던 글의 원본입니다.
1. 고정관념을 버려라
진지한 내러티브를 손톱만큼이라도 기대한다면 주성치 영화는 유치하게만 보일 것이다.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가상현실의 과잉주입으로 인한 고정관념은 과감히 버려라. 줄거리의 논리에 익숙해져버린 머릿속을 비워 버려라.
주성치의 영화는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되겠지, 라고 미리 예상해 버리는 당신의 자만심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주성치의 007> 첫 장면. 강호최고의 4대 고수가 나와 짐짓 비장한 대결을 벌인다. 조명이 들어오고 카메라에
가깝게 잡힌 강호의 고수들 면면을 살펴 보자. 대머리 뚱뗑이에 하나같이 늙수구레한 추남들. 키득거리는
주성치에게 한 고수 나서서 외친다-" 고수들이라고 다 잘생겨야 해? 그건 너희 신세대들이 만든 논리야!" 역시,
고수의 내공이 아니면 감히 간파하지 못할 씁쓸한 진리가 담겨있다. 고정관념을 버려라. 인생을 즐기는데
쓸모가 없다.
2. 패러디 영화의 참맛을 느껴라
주성치는 모든걸 패러디한다. 그는 <아비정전>의 장국영처럼 똑같은 음악에 맞추어 드라이를 하고,
<중경삼림>의 금성무처럼 정지화면에서 중얼거리며,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처럼 벌거벗고
거리에 앉아있기도 한다.<정전자>의 주윤발 처럼 폼나게 걸으며, <007>의 숀코네리의 것 뺨치는 무기들을
지니고 다니고, <첩혈쌍웅> 에서보다 더 많이 비둘기를 날리며 성당에서 총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헐리웃의 '못말리는' 시리즈와 질적으로 다른 재창조다. 그는 패러디를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주성치 영화에서의 패러디는 이미 패러디를 뛰어 넘은 또 다른 무엇이다. 주성치의 패러디를
이해하기 위해 원작 영화가 보고싶어지는 기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3. 주성치를 주목하라
그는 작고 말랐다. 유난히 귀공자형이 많은 홍콩 남자배우들과 비교해 볼 때, 그는 천상
코메디나 해야할 듯 짧은 다리에 긴 혓바닥, 장난스런 눈동자, 게다가 쭉쭉 늘어나는 얼굴
근육을 지녔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는 주인공이다. 일단 주목하라. 그는 장난꾸러기 소년에서 갑자기
냉혈한으로, 순정파 바보에서 갑자기 수다쟁이 변호사로, 푸주간집 주인에서 갑자기 칼잘쓰는 스파이로,
안하무인 건달에서 갑자기 의리의 사나이로, 본토출신 시골뜨기에서 갑자기 도박의 '성인'으로까지 화면을
종횡무진하며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주성치가 슬랩스틱이나 종알거리는 수다따위로 웃긴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아직도 영화를 즐기려면 멀었다.
4. 조연들을 주목하라
주인공이 대충 파악이 되었으면 이제 조연들을 주목해보라. 여기 홍콩 최고의 패밀리 '주성치 군단'이 있다.
주성치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는 영화라면 보통 한 번씩은 나와서 정해진 자신의 역할을 하고 사라지는
조연들이 있다. 조연이라고 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주연급 역할을 톡톡히 하는 오맹달, 단골 여주인공 장민,
실제로도 연인이라는 막문위, 대머리 아저씨 나가영, 코파는 여장남자 이건인, 주로 당하고 피를 뿜는 곡덕소,
화장지우면 눈썹이 없어지는 귀신언니 등등. 게다가 감독만 하기에는 끼가 넘쳤는지 까메오라고 하기에 너무
드러내놓고 '연기'를 해 버리는 유진위 감독과 이력지 감독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식구의 리스트가 기다리고
있다. 주성치 군단과 친해져라. 깜짝놀랄 소득이 있을 것이다.
5. 소품을 주목하라
사람들이 대충 파악이 되었으면 물건으로 넘어가자. 주성치 영화를 3개 이상보면 묘하게 반복되는 소품들의
존재를 눈치채게 된다. '접이의자'라는 소품이 휴대용 의자가 아닌 휴대용 '무기'로써 보이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이제 주성치 영화에 대해 상당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접이의자에 대한 제작진들의 사랑은
급기야 <식신>의 등장인물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까지 쉼? 만든다-
"접이의자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고 손쉽게 무기로 사용되지. 그리고 경찰에 잡힌다해도 유죄가 될 수 없어!"
이외에도 주성치는 영화마다 한번쯤은 닭날개를 구어먹고 그것도 모자라 <당백호점추향> 에서는 닭날개를
위한 뮤지컬(?)까지 준비했다. 마이클 잭슨과 조약이라도 맺었는지 올백머리에 근사한 양복을 빼입고도 검은
구두속은 언제나 흰 양말이다.
숨은소품찾기-도전해 보시라.
6. 극중극을 주목하라
'극중극'이라는 표현은 좀 심각하고, 주성치 영화에는 '장난'이 많다. 그는 관객이 어느덧 좀 극에 몰두하려 하면
갑자기 엉뚱한 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리고 그래서 관객을 좀 황당하게 웃겨준 후 다시 줄거리로 돌아갈 줄 안다.
여기 라이벌인 두 집안이 있다. 각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독약을 서로에게 먹인다. 이 엄청난 위기의 상황에서
갑자기 두 사람은 자신의 집안 독약이 얼마나 우수한지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설명하고는 '독살을 하실 때는
꼭 저희 집안의 독약을 찾아주세요~'라며 마무리를 한다. 관객은 엉겁결에 독약 CF를 본 것이다.
주성치영화를 보다보면 위와같은 '장난'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7. 과장연기를 즐겨라
사실, '과장'을 빼면 홍콩영화에서 뭐가 남나? 서극이나 오우삼 정도가 주윤발 혹은 이연걸 데리고 하는 과장은
예술이나 느와르 정도가 되고 주성치가 그의 패밀리들과 하는 과장은 유치하다는 평가는 아무래도 공정하지
못하다. '주인공'은 끝까지 멋있고, 의리있고, 살아남는다는 설정이야 말로 과장 중의 과장이다. 차라리
주성치의 과장연기를 즐기겠다. 유치하지만 오히려 관객의 초라한 현실의 이해하고 치유해주는 '유익한'
과장이다.
8. NG장면에 보물이 있다
주성치 영화에도 어김없이 마지막에는 NG장면이 뜬다. 여기에 보물이 있다. <주성치의 007> 마지막 부분.
악당의 일격에 피흘리며 쓰러지는 환영(나가영 분). 그런데 동료인 주성치는 그걸 보며 웃고 있다. 워낙에
급박하게 넘어가는 장면이라 관객은 그냥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런데 NG장면을 보자. 주성치와 나가영은 이
장면에서 아주 여러번 NG를 낸 것이다. 결국 본 영화에 NG장면이 그대로 쓰였다. 웃음을 참지못하는 주성치가
결국 가발이 벗겨지며 쓰러지는 나가영을 보고 키득거리는 NG장면을! 그 때 나가영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세상일은 예측 못해..." 이런, 관객은 또 한번 속은 것이다.
9. 진지함에도 적응하라
그렇다고 해서 주성치 영화가 늘 치고받고 뒤집어지고 소란하며 뒤죽박죽인건 아니다. 진지하고 심각할 때는
한 껏 분위기를 잡는 것이다. <무장원소걸아> 에서 관리들의 놀림감이 되어 개밥을 먹을 때는 그보다 더 비참할
수가 없다. <서유기>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야 할 때의 표정은 '웃기다'라는 단어가 도저히 침투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진지하다. <식신>에서 그는 뒷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비빔밥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고,
<홍콩레옹>에서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가!' 라면서.
그도 폼잡을 줄 안다. 무시하지 마라.
10. 그렇지만 진지함을 조심하라
그러나 진정한 주성치의 팬이라면 그가 진지하면서부터 웃기 시작할 것이다. <당백호점추향>에서 그가
진지하게 외우는 시를 자세히 들어보라. 그런 엉터리가 없다. <007 북경특급>에서 피아노 연주하며 노래부르는
그를 보라. 담배를 입술에 붙여서 안떨어 지는 것이다. <서유기>에서 달밝은 밤 다리 난간에 서서 누군가를
유혹하는 그를 보라. 작은키를 보완하겠다고 10Cm는 족히될만한 높은굽(?) 가죽신을 신고 있다.
결국 세상일도 이렇게 양면적인게 아닐까? 가장 진지한 것은 가장 웃긴 것과 통할 수 있다. 근엄하기 짝이없는
국무회의 광경을 뉴스에서 보고있으면 왠지 코믹하지 않은가. 대의명분 옳으신 말씀을 비장하게 선포하는
사람의 표정은 큭,하는 웃음을 동반한다.
진지함에 방심하지 마라. 하다못해 당신의 인생이 영화의 줄거리처럼 항상 진지하고 예정대로 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