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하나님
성경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러 곳에서 쓰여졌습니다.
특히 헬라어로 쓰여진 신약성경에서는 이 사랑이 3종류(에로스,필로스,아가페)로 구분되어 쓰여졌습니다.
에로스라는 단어는 남녀간의 사랑을 의미하고.
필로스라는 단어는 친구와의 우정을 말할 때 쓰여지며.
아가페라는 단어로 쓰여진 사랑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에로스와 필로스는 서로 조건을 두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아가페 사랑은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어떤 조건도 없이 베풀어주는 사랑이에요.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때에는 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요.
사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사랑이고 이 세상이 창조됐을 때에는 바로 이 아가페 사랑을 공유하는 세상이었죠.
죄로 인해서 이 아가페사랑이 변질되어 이기적사랑으로 바뀌고,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사랑을 주는 Give&Take식의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나타내주고 있는 변질되지 않은 사랑이 있는데
바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아직까지는 사랑의 성역은 남아 있는 것이죠.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에게서도 이 사랑이 본능적으로 남아있지요.
어머니의 사랑은 왜 이렇게 특별하고, 크고 위대할까요?
성경에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묘사할 때 종종 쓰여지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이 여기지 않겠느냐’(사49:15)
‘내가 그로 인하여 애를 태우나니 내가 반드시 그에게 긍휼을 베풀리라’(렘31:20)
긍휼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라함’인데 어머니의 태와 같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애태우다는 말과 같아요.
‘창자가 끊어질 만큼 아프다’는 뜻이죠.
출산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 아이를 낳을 때는 자기목숨을 내어줄지언정 이 아이는 반드시 살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발동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다는 거에요.
어머니가 자신의 몸을 찢어서, 고통중에 아이를 낳은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로 그분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몸과 마음을 찢겨지는 고통 속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어머니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진짜 우리를 위해 죽으셨잖아요.
그러니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이지요.
어머니의 그 위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인간의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건도 따지지 않고 그분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풍성하게 한없이 베풀어 주신다는 것은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묘사하는 동일한 표현이 복음서에서도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크게 두가지이죠.
현실의 고통과 영적인 고통이 있죠.
사고를 만나거나 건강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삶의 다양한 형태로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복음서는 곤경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분은 긍휼히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우리의 긍휼과 예수님의 긍휼은 천지 차이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에 그저 공감해주고, 걱정해주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동정심은 있지만 실제로 그 문제를
책임지고 도와주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고통당하실 때, 우리를 진심으로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과 용서를 우리가 경험하고 누렸다면 이제는 그 사랑을 내 삶에 적용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나눠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4-8)
우리가 다 아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항상 정답을 말하고 이상적인 것을 요청합니다.
이 사랑장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삶에 반영하느냐가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이 사랑은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아가페 사랑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의 본능 자체가 이기심과 욕심으로 가득찬 죄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전혀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가지 희망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전13장은 사랑에 대한 개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사랑장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장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가장 완벽한 사랑에 대한 정의입니다.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존재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 하신 예수님은 진리라는 것도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라고 하셨죠.
마찬가지로 사랑도 개념이나 철학으로 국한되는 어떠한 사상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라는 존재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사랑장에 기록된 사랑을 ‘하나님’으로 바꿔서 읽으면 그 의미가 더 선명해지고 더 은혜롭습니다.
‘하나님은 오래참고, 하나님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랑이 없으며, 할 수도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연결이 되면 우리 안에
있는 변질된 사랑은 사라지고, 우리 안에 없었던 사랑의 에너지, 무아적 사랑의 품성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음을,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결국 사랑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 비로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축복인 것입니다!!
통로는 한가지뿐입니다.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아름다운 사랑의 품성을 받으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해요.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봄으로 그 에너지를 얻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저 바라보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의 에너지를 받는 해바라기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성령님께서 이뤄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간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분께 간구하고, 도움을 구해서 사랑의 힘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받을 수 없는 변질되지 않는 사랑을 주님께 달라고 간구할 때 주님은 그 사랑을 주십니다!!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엡4:22)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습니다.
여기 유혹의 욕심을 따랐다는 말은 오늘 우리가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것이 포함 되지만, 이 본문은 아담이
유혹에 빠져 사망이 되어서 썩어져가는 옛사람이 된 것과 그의 후손이 되어 썩는 옛사람의 삶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고 썩는 것뿐입니다.
거기에는 악취가 나지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생명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오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그 생명이 사랑입니다.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얻을 때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일4:18).
[25년 4과 과정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