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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31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마태오 25,14-30
하느님은 나의 능력이 얼마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믿으실까?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개발하거나 성장시키지 않고 게으르게 살다가 온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탈렌트는 ‘재능’입니다.
나의 재능은 어느 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요? 나의 재능은 내가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나에게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자아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능력을 지녔다면 그것은 반드시 누군가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먼저
믿어주었고 내가 그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습니다.
사람은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생명을 유지할 능력도 잃게 됩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진범인 이춘재 씨가 잡힐 때까지 20년을 억울하게 옥살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윤성여 씨입니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 보상금을 도박으로 다 날렸습니다.
혼자라도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어느 날 경찰이 들이닥쳤고 성여 씨는 영문도 모르는 채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당신 이 사건 때문에 많은 경찰 간부들이 해직을 당하던 터라 경찰들도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여 씨를 고문하여 자신들이 써 놓은 대로 읽고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특히 3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을 때는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백을 시키고 무기징역을 받게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그런 죄질로 들어온 사람은 집단 구타와 따돌림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그를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세상에 남겨진 그는 살 힘도 잃었습니다.
사는 것도 누군가가 기대해 주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 그를 믿어준 생명의 은인이 나타납니다. 박종덕 교정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는 범죄 자체를 전면으로 그것도 일관되고 부정하는 수용자는 처음 보았다고 하며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너는 끝까지 살아야 한다. 여기서 살아남는 길은 너의 인내심이다.”
그는 그렇게 감옥에서 20년을 버텼고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윤성여 씨는 박종덕 씨를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 감사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더 힘들다고 합니다. 친척들도 왜 왔느냐는 듯이 그를 문전박대하듯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여 씨 때문에 친척들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박종덕 씨의 믿음과 또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겠다고 결심합니다.
나는 이렇게 내가 믿어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내가 살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교만은 빨리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박지성 씨도 좌절에 빠져있을 때 큰 선수가 될 것이라는 히딩크의 그 한 마디가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믿음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기 위해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믿으려 합니다.
하지만 잘 믿어야 합니다.
뱀과 같은 이들을 믿었다가는 오히려 삶을 망치고 맙니다.
뱀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뱀과 같이 타인을 먹는 것만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마이클 타이슨과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감옥에서 살다시피 한 그의 젊은 시절에 그를 알아보고
세계 챔피언으로 키운 코치가 ‘커스 다마토’였습니다. 타이슨은 말합니다.
“커스는 나 자신을 믿게끔 도와주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목수건 오타구이건 말이다. 나도 이제 나 자신을 믿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지만, 그의 영예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커스 다마토가 죽고 ‘돈 킹’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 킹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돈 킹은 타이슨을 그저 자신의 돈벌이로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타이슨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범죄로 감옥 생활을 하고 링은 즐기는 곳이 아닌 물어뜯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망해서 많이 번 돈을 다 잃고 파산신청까지 하게 됩니다.
커스 다마토도 자신을 믿게 했고 돈 킹도 자신을 믿게 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것만으로는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 부족합니다.
자신을 믿게 만든 사람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믿음을 준 사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고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탈렌트를 가진 자는 그 탈렌트에 다른 탈렌트를 더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믿고 일하게 되면 나는 모든 능력을 잃게 됩니다.
능력을 키우기 위해 나는 분명 누군가 한 명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의 능력을 성장시켜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를 어떻게 단련시키는지
보면 됩니다.
돈 킹은 타이슨을 방탕한 생활로 길들였습니다.
그러나 커스 다마토는 그를 혹독한 훈련으로 길들였습니다.
사람은 방탕해지면 모든 능력을 잃습니다.
오늘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을 ‘게으름’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받아들였다면 게을러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나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커스 다마토는 말합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잠재적인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때 마음 깊이 스스로에 다한 강한 믿음을 가진다.
스스로를 믿을만한 이유를 줘야 한다.
스스로에게 자질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믿은 후에 육체적 훈련은 쉽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시며 우리가 당신 아드님처럼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지옥훈련을 거칠 힘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지게 하지 않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맙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31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25,14-30
눈만 뜨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이 하루는 너무나 은혜로운 탈렌트입니다!
탈렌트 비유를 묵상하면서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우울한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내면서, 주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주님, 저 사람들에게는 저리 좋은 탈렌트를 주셨으면서, 어찌 제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나요?
백번 천번 생각해도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니, 어찌 이리 사람을 차별대우 하시나요?” 하면서 많이도 따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공동선을 위해 사용할 탈렌트를 분명히 주셨다는 것을. 관건은 우리 인간 측의 노력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주셨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고, 캐내고 갈고 닦고, 엎그레이드 시키려는 우리 측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늦었지만 주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해봅니다.
제게 선물로 주신 재능, 장점, 오랜 기간 쌓아올린 전문성, 스펙 등도 탈렌트이겠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지니고있는 이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이 둘도 없는 탈렌트입니다.
아직 내게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이 좋은 탈렌트입니다.
조금 나이든 중년의 원숙함과 균형감각도 좋은 탈렌트입니다.
크게 뒤로 물러설 줄 아는 노년의 지혜로움도 멋진 탈렌트입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새 아침과 24시간이라는 하루가
너무나 은혜로운 탈렌트입니다.
하루 온종일 빈둥빈둥 영양가 제로의 하루를 보낸 날이 있습니다.
하루의 끝자락에 서면 무의미한 하루를 허송세월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하고 우울해집니다.
반대로 하루 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헌신한 날이 있습니다.
몸은 파김치처럼 녹초가 되고 너무나 고되어 자동으로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지만,
마음은 뿌듯해지고 영혼은 맑아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잘 사용했기 때문에 기쁨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 21)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강론>
(2024. 8. 31. 토)(마태 25,14-30)
<탈렌트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4-30)”
1) ‘탈렌트’를 ‘주님의 것, 주님께서 주신 은총,
주님의 선물’이라는 생각만 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탈렌트를 주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내가 구원받기를 원해서’, ‘내가 살고 싶어서’, 즉 ‘나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인데, 내가 나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은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종들에게 나누어 준 탈렌트를 돌려받지 않았고, 종들이 탈렌트로 돈벌이를 해서 더 벌어들인 탈렌트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종들은 처음에 받은 탈렌트와 더 벌어들인 탈렌트를 모두 각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탈렌트를 준 것은, 자신이 무슨 이득을 얻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 ‘종들을 위해서’입니다.
비유에서는 “종들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기 위해서”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21절, 23절).
‘많은 일’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나를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한다면, 그것은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처럼 되어버리는 일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의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그래서 받은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비유를 보면 주인은 세 번째 종에게 준 탈렌트를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갑니다(28절).
<돌려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주인은, 주인의 것이니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종을 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씨’를 주시는 분이고, 우리가 그 씨를 심고 가꾸고 잘 돌보아서 ‘구원’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도 그냥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2)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를 받는 것에 대해서, 비유에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탈렌트의 차이는 ‘은총의 양의 차이’도 아니고, ‘능력의 차이’도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다양성’을 나타냅니다.
그 다양성은 보통 ‘옹기장이와 진흙’으로 설명됩니다.
“옹기장이가 제 손에 있는 진흙을 제 마음대로 빚듯, 인간은 자신을 만드신 분의 손안에 있고, 그분께서는 당신 결정에 따라 인간에게 되갚으신다(집회 33,13).”
3) 세 번째 종이 주인에게 한 말,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은다.” 라는 말은, “주는 것 없이 빼앗아 가기만 한다.” 라는 비난입니다.
실제로, “나는 이렇게 바치는 것이 많은데도 받는 은총이 별로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 주인이 세 번째 종을 꾸짖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는 큰 죄에 속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루카 10,31-32).
어쩌면 그 두 사람은 “우리는 최소한 악행을 행하지는 않았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살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큰 죄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지 않은 것도 큰 죄이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 큰 죄입니다.>
‘저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에서 산상설교의 ‘소금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도, 또 이웃들에게도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