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 이기양 요셉 신부
복음; 루카6,6-11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8 예수 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 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11 그들 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행할 바를 깨닫게 하시며, 깨달은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어느 병원 게시판에 재미있는 글이 적혀 있어서 소개합니다. 「전갈에 물렸던 분이 여기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분은 하루만에 나아서 퇴원하였습니다. 또 어떤 분이 뱀에 물렸습니다. 그 분은 치료를 받고 3일만에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였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미친개에게 물려 현재 10일 동안 치료를 받고 있는데 곧 나아서 퇴원할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어떤 분이 인간에게 물렸습니다. 여러 주일이 지났지만 그 분은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회복할 가망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극도로 악에 받힌 사람의 입김을 모아 독극물 실험을 해보면 코브라독보다도 강한 맹독성 물질이 나온다고 합니다. 반면에 사랑을 하거나 즐겁게 웃는 사람의 뇌에서는 암세포도 죽일 수 있는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일 때와 부정적일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긍정적인 사고로 세상을 사는 것이 당연한 하느님의 뜻일 터인데 예수님을 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는 대단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들은 틈만 나면 트집을 잡으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서 있었을 뿐 아니라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로 예수님 일행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태도를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보시고 통렬하게 비판하셨지요. “마치 장터에서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하는 아이들과도 같다.”(루카7,32) 오늘 복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고 계셨는데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찾아와 고쳐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한편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병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안식일 법을 어긴 자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그들 눈앞에 서게 하신 후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다. 율법에 어떻게 하라고 하였느냐?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루카6,9) 명확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의 정신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틈만 나면 예수님을 걸어 넘어뜨리려고 벼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형식적인 안식일의 법규만을 들 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답답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상관없이 불쌍한 병자를 고쳐주시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고 해석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지극히 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서로 의논”(루카6,11)하는 것으로 오늘 복음이 끝이 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율법으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위법에 해당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을 제약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안식일 법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법이지 사람의 자유를 속박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법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 법 조항을 들어 이웃을 단죄하고 억압하려듭니다. 법의 취지는 어디까지나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칙은 많은 사람들이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장치일 뿐이지 우리의 삶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면 규칙을 떠나서 어떠한 경우에도 좋게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바르게 볼 줄 아는 시각의 중요성을 깨우쳐주고 하느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정적인 마음으로 보는 사람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보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수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습니까? 말 할 필요도 없이 긍정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부활 신앙이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과 부정적인 선입견이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 삶의 자리에서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적이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주님의 오늘 말씀을 잘 실천하는 참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