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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 45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 - 요 4: 54 두 번째 표적
요 4: 45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 -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
예수께서 갈릴리에 이르시자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였다.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명절은 요한복음 2: 13, 23에 언급된 유월절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며 여러 가지 표적들을 행하셨다.
* 요 2: 23 -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그는 그 후 유대 땅에서 약 8개월 가량 지체하신 것 같다.(4: 35의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라는 말씀은 그때가 겨울임을 나타내며, 그것은 봄인 유월절 이후 8개월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였음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그의 갈릴리 전도사역은 그 후에 시작된 것 같다.
1]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예수님의 하신 일(권능 있는 일)을 본 까닭이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보다 떨어진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었다(41절). 어떤 권능을 보지 못하고 말씀만 듣고 믿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신앙이다.
2]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 갈릴리로 들어가실 때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명절 중에 행하신 표적을 목격한 자들은 예수를 영접했다. 주의 능력은 사람들의 완고한 편견을 깨뜨려 버리셨다.
주께서는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에게 복음을 믿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 표적을 베푸셨다.
① 배척당한 예수
* 마 13: 57-58 –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② 목수의 아들이라고 힐난 함
* 마 13: 54-55 –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요 4: 46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 -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 그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다. 사도 요한은 포도주 기적의 확실함을 다시 한번 더 증언한다.
왕의 신하인 한 사람이 있었다. ‘왕의 신하’라는 헬라어(바실리코스)는 ‘왕에게 속한 높은 관리’를 가리킨다. 그는 사회적 신분이 있었고 아마 부유한 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있었다.
1]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잔치”는 종말에서의 메시야 왕국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기 위해서 즐겨 쓰고 있다. 잔치는 하나님이 대표요 하나님이 source이다.
우리는 그의 손님이다. 잔치에 가면 풍요함이 있다. 배부르면 만족하고 기쁨이 있다. 잔치라는 것은 모든 것이 사랑의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구원의 실재를 잔치로 비유할 때는 인간의 실존을 결핍성으로 제약성으로 설명한다. 모든 죄가 이 결핍성에서 온다. 결핍성에서 욕구불만 채워질 수 없는 욕구불만이 있고 배 고품과 기쁨이 없고 사랑이 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인간에게 예수께서 구원을 약속한다. 이 구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풍성한 기쁨이 있다. 이유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베푸는 잔치이기 때문이다. 구약 유대교에서 종말에서 전치는 메시야 왕국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었다.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것은 이 잔치는 풍성한 잔치가 아니다 결핍성의 잔치이다. 흥이 깨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깨뜨려져 버렸다. 이 잔치에 커다란 유대 정결의 예를 갖추기 위한 물동이들만 앉아 있다.
유대교의 정결의 예(레위기)를 다 갖출 수 있는 물동이가 흥이 깨진 잔치에 아주 소용이 없다. 이것은 맥 빠진 유대교를 상징한다. 여기에 예수가 나타나서 아무 쓸모 없는 정결의 예의 물독을 제일 맛있는 포도주로 만들었다.
다시 생명력이 넘치는 잔치로 바꾸었다. 이것을 요한은 표적이라고 한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 이것을 표적으로 더 깊은 하늘의 진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이적의 표적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한 본질을 영광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진정한 본질은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것으로 깨달았다. 하늘에서 오는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푸심으로 결핍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셔서 하늘의 기쁨과 생명력에 참여하게 할 시대를 여셨다.
2]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왕의 신하"는 헤롯 안디바의 신하를 말함이다.
여기에서 "그 아들"이란 말의 헬라 원어(*)에 관사(冠詞)가 있음을 보아 "외아들"을 의미한다(Grosheide).
"가버나움"은, 수리아에서 애굽으로 갈 때에 지나게 되는 도시로서 거기 관리들과 세리들이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갈릴리 가나와 가버나움은 나사렛을 경유하여 약 4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이다. 그의 집무실은 가나에 있었으나 그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었던 것 같다.
49, 51절에 ‘아이’라는 말(파이디온)[어린아이]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렸던 것 같다.
요 4: 47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그가 예수님께 와서 그렇게 청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기적 행하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1]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왕의 신하로서 사환을 보내지 않고 친히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그의 존경이 컸다.
다행히 그는 갈릴리 가나에 오신 예수께 그 일을 청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2]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는 소문에 의해 예수께 대한 약간의 믿음이 생겼다. 물론 그 믿음은 아직 매우 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고 아들을 위한 다른 방도가 없었다.
요 4: 48 표적과 기사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는 탄식어린 말투로 사람들 속에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도 그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신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실 것은 믿었으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저 사람의 불신앙을 간접적으로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인격을 믿는 것이 건전한 신앙이다.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의 수단이다. 그 왕의 신하의 마음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굳건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아마 예수께서 내 아들을 고쳐주시면 그를 믿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요 4: 49 죽기 전에 -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
그 신하는 자기 아이가 죽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서 고쳐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확신한 것 같지는 않다.
1]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왕의 신하의 신앙은 저렇게 약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1) 거리나 시간에 제한를 받을 듯이 생각하였으며,
(2) 죽은 다음에는 못 고칠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맡아 취급하신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신적 구주로 확신하였다면, 아마 한 백부장처럼 “주여, 말씀으로만 하소서. 그러면 내 아이가 낫겠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수고스럽게 그의 집까지 내려오시기를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굳센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요 4: 50 가라. 살아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
* 롬 10: 17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사람이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시면 말씀을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예수님은, 그 사람과 같이 가시지도 않고 그의 아들을 고쳐 주셨다.
그는 어떤 방법도 사용하시지 않고, 먼 거리에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한 마디 말씀으로 고쳐 주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신 증거를 보여 주심이다.
여기 "살았다"란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 동사로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 바로 살아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 "살아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 것일까? 그것은, 여기서 질병을 고침 받음에 관하여 사용된 말이니만큼, 물론 육신의 생명이 살아남을 가리킨다.
그러면, "살아난다"는 말이 요한복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영생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이 말이 예외의 의미(곧, 육신적 생명의 뜻)를 가진다는 말인가?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이, 물론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 구원도 마침내 영생의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것이니만큼, 그것이 도외시(度外視) 될 것은 아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도 육신적 생명과 관계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으로써 영생에 관한 설교(요 11: 25-26)의 기회를 삼으신 것이다.
* 요 11: 25-26 –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스밀데(E. Smilde)는 말하기를,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곧, 4: 46-53의 말씀은, 5장에 있는 영생의 생명 주시는 (영생은 몸을 제외하지 않음) 그리스도 복음에 관한 말씀의 예비적 계단이다.
요한복음에 있는 '생명'이란 말씀(살린다는 말씀) 구절들을 영화(靈化)하여 버리는 해석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6).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부딪혀 믿음을 얻었으니, 그것이 과연 건전한 신앙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의 심령의 병을 고치고 믿음을 주셨으니, 그것이 그의 아들의 육신의 병을 고친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지만 심령의 병(불신앙 병)을 고치시는 것을 위주한다.
2]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는 말씀을 믿고 갔다. 그가 갔다는 것은 말씀을 믿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그가 믿지 못했다면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었기 때문에 가버나움으로 갔다.
요 4: 51 내려가는 길에서 -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
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왕의 신하는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집안의 종들을 만나게 되었다. 주인을 만난 종들은 아이가 살아 있다고 보고를 하였다.
요 4: 52 낫기 시작한 때 -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1]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이 말씀은,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상고한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그 아이가 어느 시간에 나았는지 상고해 보므로 그 낫기 시작한 시간이 예수님의 말씀하시던 그 시간과 일치한 줄 알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예수님의 능력의 신기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신앙은 한층 굳세어졌다.
2]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일곱 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한 시 경이다. 그러면 ‘어제 제7시’라는 말은 그가 밤을 지나서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종들을 만났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인하였고 그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였다.
요 4: 53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
그 신하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체험하였고 그와 그 온 가족이 믿었다.
1]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의 역사성을 알아야 한다.
2]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아비가 예수님을 믿음에 따라 그의 온 가족이 믿음은, 계약 원리(契約原理)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실현이다.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그 집의 대표자인 만큼,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 온 집을 축복하신다.
* 창 17: 7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 시 105: 8-10 – 8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요 4: 54 두 번째 표적 -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다.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사역은 이런 일들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신다.
* 요 20: 30-31 –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1]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표적"이란 말의 의미에 대하여는 2: 11의 해석을 참조하자.
첫 번째 표적은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신 표적으로써, 예수님은 자연계의 주님이신 사실을 나타내셨다.
여기 "두 번째 표적"은, 예수님께서 거리(距離)를 초월하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거리 관계로 못하시는 법이 없다.
2] 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4:43-54)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각계 각층의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간구 하였다.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가버나움까지 내려오셔서 고쳐달라는 요청이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의 간절하고 끈기 있는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아들을 병에서 살려냈다.
(1)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이 헤롯 왕의 신하는 이 같은 재앙이 흘연히 그의 인생길에 임했을 때, 그는 재앙을 만난 인생이 찾아가야 할 바른길을 찾아간 것이다.
① 본질을 알아야 한다.
그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주님을 찾아갔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애 중에 어떤 문제가 찾아와도 그 문제를 가지고 달려갈 곳은 예수이시다.
우리들이 인생길에서 만나는 어떤 일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갈 곳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이미 믿음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이다.
② 요청(기도)해야 한다.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의 병을 고침받기 위하여 주님을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초청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의 해결자되시는 예수님을 문제가 있는 곳으로 요청해야 한다.
* 약 5: 14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오늘날은 주님을 청할 수는 없지만 주의 종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아야 한다.
③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 왕의 신하는 응답을 받기까지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는 한번 간구하는 기도에서 절망적인 말을 들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자 응답을 받은 것이다.
기도에 가장 두려운 대적은 낙심이다. 낙심은 기도를 좌절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2) 표적과 기사의 신앙
주님은 이 왕의 신하의 간구를 들으면서 책망 비슷한 탄식을 하셨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① 바른 믿음
표적물 직접 보기를 원하는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그의 이 같은 간구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의미이다. 표적을 보여달라는 믿음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이다.
② 은사주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 믿음이 표적 위주의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을 은사주의이다. 유대인의 신앙이 바로 이런 신앙이었다.
그들은 주님께 모세가 광야에서 행한 것과 같은 표적을 보여주면 메시야임을 믿겠노라고 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지 아니하셨다.
* 마 12: 39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주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그 몸을 보이신 후에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표적을 가지고 믿는 신앙은 바른 믿음이 아니다.
③ 불신앙을 책망하신다.
주님은 사람이 죄로 인한 영혼의 병은 모르고 육신의 병만을 고치려는 불신앙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 왕의 신하인 경우만 해도 주님 앞에 나와서 안타깝게 호소한 것은 자기나 아들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질병에 관한 두려움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진실한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신다.
(3) 왕의 신하의 믿음
왕의 신하는 그의 간구함을 통하여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 그 응답은 말씀으로 나타났다.
① 그는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다.
주님은 그를 향하여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셨다. 이 왕의 신하는 주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의 신앙이 성장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이 말씀을 믿었다고 했다. 그에게는 이제 말씀을 믿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② 왕의 신하는 그 말씀을 믿고 집으로 내려갔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자기 아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았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간 것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단호히 말씀하신다.
* 막 11: 24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③ 왕의 신하는 응답의 증거를 바라보았다.
그가 집에 내려가는 길에 아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 집 하인들이 올라오는 길에 주인을 만났다.
왕의 신하는 하인들로부터 아들이 나은 시간을 물었다. 그 시간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신 시간과 일치됨을 알고는 더욱 큰 믿음을 가졌다.
④ 온 집이 다 믿었다.
왕의 신하의 집안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집은 그리스도를 믿는 복된 가정이 되었다.
아마 이 가정은 아들이 살아난 기쁨으로 시작하여 그 후에 그들은 아들로 말미암아 온 집이 구원받은 일에 더욱 감사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세상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서 고상하고 부유한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심한 열병으로 거의 죽게 된 아들처럼, 세상에는 죄로 인해 지옥에 던지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기 전에, 지옥에 던지우기 전에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 믿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 것이다.
둘째, 예수께서는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
그의 병고치시는 일은 그 왕의 신하와 그 온 가족들이 그를 믿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육신적으로 죽을 병자들을 고쳐주실 수 있는 구주가 아니고, 마귀의 종이 되어 죄만 짓던 자들,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을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고 영생할 의인을 만드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셋째,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왕의 신하는 단지 아들의 병 고침을 받은 것뿐 아니라, 그와 그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다.
믿음에는 세 단계가 있어 보인다.
① 예수님에 관해 듣고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와 간청하였다.
그의 믿음은 비록 약해도 예수께 나아와 무엇을 간구하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한다.
②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갔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믿을 수 있다.
③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그를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그와 그의 온 가족들이 다 예수님을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를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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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움켜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꽃이고 열매라고 합니다.
오늘도 꽃피고 열매 맺는 행복한 하루 힘차게 만들어 가시길 기원 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