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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9.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묵상글 (9/18. 21:55, 04:5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 이전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9/18 21:55)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4:5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4:50 추가.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11/29) 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이후)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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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15,35-37.42-49)
형제 여러분 35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 하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37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밀이든 다른 종류든 씨앗일 따름입니다.
42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4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45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복음<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8,4-15)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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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9.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5371
2026.09.18 21:49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쓰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8,4-15
아낌 주간의 마지막 날에 이 비유가 놓인 것이 뜻깊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풀이해 주신 몇 안 되는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네 가지 땅이 나오는데, 우리는 흔히 넷 가운데 하나를 고르려 합니다.
‘나는 어느 땅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교부들은 오래전부터 다르게 읽었습니다.
네 가지 땅이 네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안의 네 자리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밟혀 굳은 길도 있고, 물기 없는 바위도 있고,
가시덤불도 있고, 더러 좋은 땅도 있습니다.
그러니 물음은 ‘나는 어느 땅인가’가 아니라
‘오늘 나는 어느 자리를 갈아엎을 것인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오래 머물 자리는 세 번째 땅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이 대목이 유독 마음에 걸리는 까닭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나쁜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마도, 박해도, 시련도 없습니다.
다만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 함께 자랄 뿐입니다.
셋 다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닙니다.
걱정은 성실한 사람이 지니는 것이고,
재물은 살아가는 데 필요하며,
기쁨을 누리는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함께 자라’ 숨을 막습니다.
여기 쓰인 그리스말은 목을 조른다는 뜻을 지닙니다.
가시덤불은 씨앗을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그저 곁에서 무성해질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보면 씨앗이 숨 쉬지 못합니다.
우리 신앙이 시드는 방식이 대개 이렇습니다.
큰 배신으로 무너지는 일은 드뭅니다.
다만 너무 바쁘고, 너무 많고, 너무 즐거워서
어느새 기도할 자리가 없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낌이 필요합니다.
아낌은 나쁜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좋은 것이 너무 많아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땅의 설명이 아름답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
여기에는 세 개의 동사가 있습니다.
듣고, 간직하고, 인내합니다.
듣기만 하면 길바닥이고,
간직만 하고 견디지 못하면 바위입니다.
셋이 다 있어야 열매가 옵니다.
특히 ‘인내로써’라는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씨앗이 백 배 열매가 되기까지는 한 계절이 걸립니다.
그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땅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낌 주간을 매듭지으며 이 말씀이 우리를 격려합니다.
이번 주 우리가 줄인 물 한 통, 전기 한 등,
사지 않기로 한 물건 하나는 아주 작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김매기가 자리를 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언가가 자랍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내 안의 가시덤불은 무엇으로 자라고 있는가?
나쁘지 않아서 뽑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듣고, 간직하고, 견디는가?
오늘 내가 갈아엎을 한 자리는 어디인가?
주님,
나쁘지 않기에 더 위험한 가시덤불을 알아보게 하소서.
좋은 것이 너무 많아지지 않게 하시고,
듣고 간직하며 인내로 열매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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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9.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34?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18. 16:54
사랑의 설교자!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바오로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할 근거를 제시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바오로 사도의 삶을 변모시켜 준 환시
사랑의 설교자!
2026년 9월 18일 금요일
리처드 신부는 무엇보다도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포용적인 사랑을 선포하였음을 일깨워 줍니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근거를 주는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또한 그는 인간 존엄과 참된 인간의 성장에 대한 신학적이고 확고한 토대를 제시했습니다. 이 존엄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며, 보편적이고, 어떠한 평가나 기준—인종, 종교, 성별, 국적, 계급, 교육, 사회적 지위—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바는, 바오로 사도 한 사람이 짧은 시간 안에 큰 성공을 거둔 이유가 바로 잃어버린 인간 존엄을 세상에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또 하나의 신을 더한다고 해서 큰 의미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바오로가 수치와 멸시를 받던 이들에게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라고 선포했을 때, 그들의 마음은 갈망과 희망으로 뜨겁게 불타올랐습니다.
사도행전 2장 1–11절의 오순절 사건은, 하늘에서 불과 바람이 내려온 뒤 갈릴래아 사람들이 순례자들의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세상 모든 이들이 들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신학적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전적으로 민주적이며, 인간의 공로와는 무관하게 주어집니다. 이는 배타적이고 엘리트적인 종교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 소아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인간 존엄을 회복시켰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 지역은 노예 공급지로 여겨졌고,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 취급되었으며, 신전 매춘이 종교 행위로 존재했고, 가난한 이들과 주변부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불의가 만연했습니다. 세상은 아직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알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바오로는 이 부패하고 사람을 타락시키는 제국 속에서 크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코린토 12,13)
그는 모든 차별을 무너뜨리며 평등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갈라티아 3,26–28)
이는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처럼 분열된 세상 속에서 바오로 사도는 옛 세상은 이미 지나갔고 새로운 세상이 태어났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불가능하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존엄을 전혀 누리지 못하던 대다수에게는 매혹적이고 희망 가득한 소식이었습니다. 누가 자신이 존귀하고 선한 존재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겠습니까? 누가 사회적 수치가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인간의 몸은 노예제도나 성적·언어적·육체적 학대에 의해 값싼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학자들은 이제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가장 핵심적이고 조직적인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인간 존엄에 대한 이처럼 뜻밖의 확언은 로마 제국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했는데, 그곳은 신앙 안에서 성숙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향심 기도(Centering Prayer)'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 집중합니다. 우리가 가장 크게 성장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점점 더 ‘양 우리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관상적 삶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라 믿습니다.
—Carol T.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Essential Teachings on Love, selected by Joelle Chase and Judy Traeger (Orbis Books, 2018), 90–9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hris Chow, untitled (detail), 2020, photo, Roscoe Village, Coshocton, O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베틀 위에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무늬(패턴)를 기꺼이 내려놓을 때에만 더 큰 이야기를 짜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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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9.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19 02:24
- 나는 좋은 밭인가? 나쁜 밭인가?
오늘 주님의 비유를 잘 뜯어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도 문제가 있지만
말씀하시는 주님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는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되겠습니까?
농부로 치면 씨를 아무 데나 뿌리시는 농부잖습니까?
훌륭한 농부라면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밭에 뿌리지 않고,
삼십 배 육십 배 열매 맺는 밭에 뿌리고 더 훌륭한 농부라면
백 배나 열매 맺을 땅만을 골라서 거기에 씨를 뿌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 이렇게 비유하시는 것을 보면 뜻이 있겠지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뿌리시는 분이니
좋은 땅 곧 선한 사람과 나쁜 땅 곧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말씀을 내려주신다는 말씀이고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겠지요.
우리 인간은 이런 말을 종종 하고 아주 쉽게 합니다.
너 같은 사람에게 말하면 입만 아프니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애써 말했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입만 아픈 게 아니고
내 말과 내 사랑이 쓸데없는 것이 되기에 무척 속이 상하겠지요.
그리고 속이 상한다는 말은 내상(內傷)을 심하게 입는다는 건데
그 상처가 싫어 더 이상 사랑의 말을 포기해버리는 우리와 달리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말씀을 결코 포기치 않겠다고 하시니
이 사랑에 우리는 얼마나 감지덕지(感之德之)해야겠습니까?
어제와 그제는 요즘 가을 가뭄 때문에 배추 무밭에 물을 줬습니다.
딴 집들은 텃밭에 주기에 호스나 스프링클러로 물을 주지만
저희는 그런 밭이 아니기에 조리 두 개로 물을 날라다 주었습니다.
먼 곳은 한 50m 거리를 길어 나르자니 힘이 무척 들었고
그래서 한 방울도 낭비되지 않도록 한 구멍 한 구멍 신경 쓰면서 물을 줬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농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하느님의 마음도 더 조금이지만 알게 되었습니다.
타들어 가는 작물을 볼 때 드는 안타까운 마음과
그것을 살리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느끼는 생명의 소중함을 통해
농부의 마음과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작물들을 살리기 위해 겨우 조리 몇십 개의 물을 줬지만
하느님께서는 나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총을 베푸셨는지,
나는 그 물을 아끼고 아껴 줬지만
하느님은 얼마나 아낌없이 은총을 주셨는지 그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느낌은 느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몸소 느껴보기 전에는 추상적으로만 알았던 거지요.
어쨌거나 이렇게 소중한 생명의 말씀과 은총의 비를
우리의 마음 밭에 뿌리시는데 우리는 좋은 밭입니까, 나쁜 밭입니까?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시는 생명의 말씀과 넘치는 은총에
감지덕지합니까? 배은망덕합니까?
감지덕지란 그것을 느끼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덕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느끼지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자는 덕을 못 보고 말겠지요.
어쨌거나 우리는 좋은 밭입니까? 나쁜 밭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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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9.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35?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19. 04:49
우리 마음의 밭을 일구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사람의 내적 삶 전체를 가리키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참으로 신비한 자리입니다. 비어 있을 때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고, 가득 차 있을 때는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악한 것이 들어오면 더 많은 악을 불러들이고, 선한 것이 들어오면 더 많은 선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마태 13,12; 25,29; 루카 8,18; 19,26) 하시는 말씀의 본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마음을 "밭"에 비유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씨앗처럼 심겨지고 감추어져, 때가 되면 새 생명과 신선함으로 드러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밭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듯이, 우리의 정신은 "관성의 법칙"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긍정적인 것, 선한 것, 사랑스러운 것을 담고자 한다면 그런 쪽으로 그 마음의 밭이 일구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역시 가능하겠지요?!
그래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매일, 매 순간 하는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시며 우리에게 던져 주시는 도전이요 초대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한 가지 유형의 밭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 곧 씨앗이 떨어지는 밭은 태생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삶 속에서 메마름을 겪고,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건조한 시기를 지나며,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마음이 분산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다른 이들의 냉혹함에 짓밟히기도 하고, 가정과 공동체의 사랑이라는 단비를 받지 못해 메마르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의 실패나 끝없는 의무감에 짓눌려 숨이 막히기도 합니다. 뿌리가 깊지 못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더불어 '내' 삶과 '내'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함으로써 그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언제나 가까이 계시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믿음을 갈망함으로써 그 뿌리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수양이 바로 '기도'의 참된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질 때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셨던 것처럼, 저도 언제나 제 곁에서 사랑으로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을 상상합니다. 사실 여러분도 모두 그러하시겠지만, 저는 늘 그 손길이 필요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선택입니다. 날마다, 그리고 매 순간 우리가 깨어 의식하며 반복해서 내려야 하는 선택입니다. 태어날 때의 조건이나 삶의 환경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느님께서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은총 덕분에 우리는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밭이 되도록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때때로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로 된 땅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의미와 그 소중함을 의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의 밭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주시는 주님과 더불어 이 삶의 여정을 인내심과 믿음을 갖고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11,19)고 약속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마음의 밭을 일구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깨어 의식하며 그분께 우리 마음의 밭을 내어드리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일 겁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좋은 밭으로 일구어 주시어, 당신 말씀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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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9.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5344
2026.09.18 08:31
성심원 성당의 종소리
새벽달이 지리산 자락 너머로
아스라이 스러질 때,
산청 성심원의 아침은
오래된 종소리 하나로 깨어납니다.
손마디를 앗아간 모진 세월 끝에
남은 팔뚝에 밧줄을 칭칭 감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천천히 종을 울리던 사람.
손으로 잡을 수 없으니 몸으로 밧줄을 붙들었고,
몸으로도 모자라 마침내 삶 전체로 종을 울렸습니다.
그렇게 오십여 년, 하루 세 번 종은 울렸습니다.
새벽에는 미사시간을 알리고,
한낮에는 삼종의 시간을 알리고,
저녁에도 종소리로 기도하자고 알렸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 고단한 세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내려놓는 날이면
종은 평소보다 낮고 느리게 울렸습니다.
한 생이 다녀갔음을 알리는 조종(弔鐘).
그 울림은 성심원 낮은 지붕들을 지나
경호강 물결 위에 내려앉고, 지리산 골짜기로 스며들어
말로 다 하지 못한 사람들의 서러움까지
오래도록 어루만졌습니다.
그 종소리 아래 나의 젊은 날도 있었습니다.
서른둘부터 마흔셋까지,
세상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던 시절,
나는 이곳에서 열두 해를 살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그들과 부대끼며 울고 웃고,
떠나는 이들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며
삶이란 결국 서로의 아픔 곁에 머물러 주는 일임을
조금씩 배웠습니다.
부식거리를 마련하고, 후원회를 돌보고,
고장 난 곳을 고치고,
마침내 이 집의 살림을 맡아 살아가는 동안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상호 간에 필요성을 채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상처 입은 몸으로도 웃을 수 있었던 사람들,
가진 것 없어도 나누었던 사람들,
손가락이 없어도 서로의 등을 밀어 주었던 사람들,
그들의 가난한 손에서 나는 오히려 사람의 따뜻함을 배웠고,
그들의 상처에서 인간의 존엄을 배웠으며,
그들의 침묵에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하나둘 흩어지고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먼저 떠난 얼굴들은 이제 이름을 헤아리기조차 어렵고,
내 젊음도 어느덧 기억 저편의 풍경이 되었습니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의 강을 건너
이제는 젊음이 아니라 지친 영혼을 쉬게 하려고
한 주간의 피정을 위해 다시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어 그 종소리를 다시 듣습니다.
종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종은 여전히 허공을 가르며 울립니다.
뎅그렁― 한 번 울릴 때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얼굴 하나가 돌아오고,
뎅그렁―또 한 번 울릴 때마다 젊은 날의 내가 돌아옵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사랑, 그때는 너무 바빠 지나쳤던 눈빛,
그때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하루들이
종소리의 긴 여운을 따라 하나씩 내 앞에 앉습니다.
그리고 문득 깨닫습니다.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사람은 떠났어도 함께 나누었던 사랑은 남아 있고,
몸은 흙으로 돌아갔어도
서로에게 건네었던 온기는 남아 있으며,
젊음은 지나갔어도 그 시절 내 안에 심어진 삶은
아직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손이 없어도 온몸으로 밧줄을 당겨
세상을 깨우던 사람들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자신에게 없는 것을 슬퍼하는 일이 아니라
남아 있는 모든 것으로 사랑을 울리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종은 쇠로만 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처로 울렸고, 가난으로 울렸으며,
눈물로 울렸고, 견디어 낸 삶으로 울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울렸습니다.
오늘 새벽 그 오래된 종소리가 다시 나를 깨웁니다.
기도하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어쩌면 더 깊은 곳에서는
다시 사랑하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사랑하고, 먼저 떠난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남아 있는 나의 날들을
조금 더 가난하게,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사람 곁에 머물며 살아가라고.
눈을 감으면 팔뚝에 밧줄을 감고
온몸으로 종을 당기던 그 사람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가 당긴 것은 한 가닥 밧줄이었지만,
그 밧줄 끝에는 수많은 사람의 아침과 저녁이 매달려 있었고,
기도와 죽음과 사랑이 매달려 있었으며,
어느 젊은 수도자의 열두 해 청춘도
가만히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돌아
그 종소리는 다시 늙어가는 나의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 그대로여서 눈물겨운 곳.
사람은 떠나고 세월은 흘렀는데,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지난날과 오늘 사이를 이어 주며 울리는
나의 성심원, 나의 젊은 날,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아침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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