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 큐티
마태복음 26:20 ~ 30
떡과 살 그리고 포도주와 피
관찰 :
1) 마가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가지시는 중에
- 20절.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 예수님의 안배로 마가다락방에서 유월절의 만찬을 가지시는 중에 예수님은 두 가지의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팔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만찬의 제정입니다.
2)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 21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언제나 그렇듯이 주님이 모르시다가 당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 염두에 두시고,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모든 것을 다 통제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민요가 날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유월절이 지나서 할 것을 결의했지만 예수님께서 예정하신 시간과 장소에서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졌듯이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셨고, 그대로 이룰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 22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 제자들은 근심했지만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아셨기에 오히려 담담하셨습니다.
- 23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 24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인자를 파는 유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라도 가룟 유다가 그 마음을 돌이켰다면 좋았을 것을 안타까운 모습니다.
- 25절.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 가룟 유다는 “랍비여 내니이까?” 묻고, 주님은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기이한 대화이고, 비밀스러운 대화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르고 예수님과 가룟 유다만 아는 대화였습니다. 주님은 아직도 가룟 유다에게 기회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나가서 대제사장들의 관원들을 부르러 나갔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가룟 유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주님은 다 아셨지만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가룟 유다를 대하셨고,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고, “내가 알고 있다”라고 사인을 주시고 있지만 유다는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좋았을 정도로 비참하고 악하게 끝이 납니다.
3) 성만찬의 제정
- 26절.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 27절.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 28절. “이것은 죄 사람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떡은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열매를 생각나게 합니다. 먹는 문제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고, 먹는 문제의 심각성을 아시는 주님은 먹는 것을 통해 다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버지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 하늘로부터 내려온 양식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우리가 새로워지고 말씀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주님과 연합을 이루게 되는 신비를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자 하심입니다.
=> 피는 가죽옷을 입히기 위하여 희생된 동물 즉 어린양의 피를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어 무화과 나뭇잎으로 무성하게 옷을 지어 입어도 소용이 없는 인간을 주님이 만나주시기 위해 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힘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된 인간입니다. 그 이후의 수없이 많은 양과 소가 희생을 당했지만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만 완성되어지는 바로 그 제사, 그 속죄의 제사입니다. 이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심으로 주님의 보혈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들어와 죄사함을 입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 떡을 먹어 생명을 얻고, 그 잃어버린 생명을 피로 되찾는 은혜의 역사를 주님은 성만찬을 통하여, 먹는 문제를 통하여 새롭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천국 잔치
- 29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먹으며 잔치를 벌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을 미리 바라보시며 알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5) 감람산으로 가시는 예수님
- 30절.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 감람산에서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하시기 위하여 가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곧 체포당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과 제자들은 찬미하면서 갔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처절한 기도의 모습과는 또 어긋나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십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주님은 찬미하며 맞이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의연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급변하는 겟세마네의 기도의 모습과 큰 대조가 일어나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겟네마네의 기도를 묵상하며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으시고, 가룟 유다의 자신을 팔 것을 지적하시고,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찬미하면서, 기쁨으로 감람산으로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못하도록 방해하거나 내치거나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가룟 유다의 발도 씻겨 주셨고, 그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생각나도록 하는 떡과 포도주도 동일하게 나눠주셨습니다. 끝까지 기회를 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러한 예수님의 기회와 사람을 끝까지 저버린 것입니다. 여기서도 사탄은 예수님께 패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끝까지 인내하시고, 진실한 사랑으로 가룟 유다를 대했고, 이정도면 예수님도 가룟 유다에 대해 성질을 내실 것이라 기대한 사탄의 전략은 그렇게 패배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살과 피는 구약 전체를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리고 가죽옷, 십계명, 모세의 율법, 성막, 성전, 희생제물. 이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이 떼신 떡과 나눠주신 포도주,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담겨지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을 두려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서 고통스러워하시며 갈등을 하시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것을 감람산에 제자들과 기쁨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이동하시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적용 :
1) 주님의 사랑. 내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팔아넘길 제자, 배신자마저도 그렇게도 사랑하시는 모습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나에게 원하시는 모습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할 수 없는 모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 나를 배신하는 자 마저도 나는 용납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가? 사실 나는 못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앙이라면 정말 높은 부르심이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라가는 나는 갈 길이 멀고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키시기에, 날마다 죽는 연습을 통해, 어느 순간 진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죽임으로 그러한 것이 가능한 존재가 될 것을 믿습니다. 나는 죽어서 사는 존재, 혹은 죽어서 진짜 죽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의 성만찬에 진실함으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성만찬에 참여할 때, 예수님의 살과 피, 구약의 모든 주님의 사랑을, 또한 신약의 예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묵상하고 겸비함으로 참여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3) 죽음을 앞둔 자의 담대한 찬양. 주님이 본을 이미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의 길을 아시는 주님이 이러한 본을 보이셨기에 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죽음을 앞두고서도 찬미하며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붙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도 막을 없는 찬양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