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36편: 변정도감을 혁파하라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권력의 대들보 하륜이 사건에 휘말렸다. 첩자(妾子)의 양부 변겸(卞謙)의 노비쟁송 사건이다. 하륜에게는 첩이 낳은 아들 하장(河長)이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머리는 영특했으나 첩의 자식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안방마님과 적자(嫡子)들 등살에 기죽어 살았다.
이때 하륜의 향리 고령서 왔다는 변겸이 하대감댁 드나들며 하장에게 끔찍이 잘해주었다.
아버지의 사랑에 굶주린 하장이 아비처럼 따랐고 하륜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이목 때문에 자신이 챙겨주지 못하는 핏줄에게 아비역할을 하니 하륜도 눈감아 주었다. 이렇게 눈도장을 받은 변겸이 하륜의 천거로 사직(司直) 벼슬을 꿰차고 자신이 영의정이라도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웠다.
세도가 주변에는 이런 잡배가 있게 마련이다.
변겸이 데리고 있던 사환노비(使喚奴婢)를 은근슬쩍 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국가 소유를 사유화한 변겸의 부정을 적발한 사재감에서 노비를 국가에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든든한 뒷배가 있는 변겸은 사재감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사재감이 노비변정도감에 쟁송을 의뢰했고 도감은 내자시(內資寺)에 속공하라고 판결했다.
변겸은 하륜의 권세를 믿고 도감의 판결을 외면했다. 도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은 변겸은 도감판관(辨正都監判官)의 판결이 오결(誤決)이라고 사헌부에 고했다. 사헌부에서 면밀히 조사해 보았으나 도감의 판결은 정당했다. 이에 불복한 변겸이 신문고를 친 것이다.
든든한 배경 영의정을 믿고 천방지축으로 날뛴 것이다.
세도가 주변 서성거리는 잡배:
변겸으로 인한 곤혹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변겸의 처남 한상량의 고령 집에 변겸이 은닉해 두었던 금덩어리 10개가 발각되어 관찰사 추궁을 받자 '금덩어리는 하대감 댁에 뇌물로 갈 것'이라고 우쭐대며 거들먹거렸다. 영상대감 하륜 댁에 전해질 것이라 하면 지레 겁먹고 물러날까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변겸의 예상을 빗나갔다.
관찰사는 '의문의 금덩어리'를 의정부에 보고했고 승정원을 통해 태종에게 알려졌다. 태종은 호조참의(戶曹參議) 황자후를 경상도 고령현에 급파하여 사건의 의혹을 밝히라 명했다. 다급해진 하륜이 잠자코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고령으로 떠나는 황자후에게 미리 손을 써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 했었다.
변겸이 신문고를 친 사건에 대하여 승정원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형조와 대간에 사건의 진실을 철저히 밝혀 보고하라 명했다. 영의정이 관련되어 있으니 적당히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륜의 비호를 받아 권겸이 망동을 저질렀다면 권력형 비호사건으로 하륜을 신뢰하는 임금 자신의 통치력에 누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권겸을 잡아들여 순금사 옥에 가두고 조사한 형조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변겸의 송사를 핵문(覈問)하니 도감 판관의 판결은 옳았으며 이를 헌부에 고(告)한 것은 변겸의 망령됨이 드러났습니다. 일찍이 내린 교지(敎旨)에 의하여 장(杖) 1백 대에 몸을 수군(水軍)에 충당하고 변겸의 사환
노비(奴婢)는 속공(屬公)하소서."
임금이 직접 챙긴 사건의 중대성을 간파한 하륜이 미리 손을 써 도마뱀 꼬리 자르기의 결과였다.
"오결(誤決)이라고 망령되게 고(告)하였다가 일찍이 수군(水軍)에 충당된 자는 이미 석방하여 돌려보냈으니 변겸에게 장(杖) 80대를 속(贖)받도록 하라."
하륜은 큰 사고를 치지 않았지만 재물은 좋아했다. 통진 간척지 땅을 비롯하여 정동 정릉 터 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태종의 변함없는 신뢰로 위기를 탈출했다. 하륜의 꾀주머니를 아끼는 태종의 배려였다.
(태종의 꾀주머니 하륜,
일생일대의 실수)
변겸처럼 잡배스럽고 어리석은 자는 멀리해야 하는데 하륜의 실수였다. 변겸 사건으로 곤혹을 치른 하륜은 훗날 변겸 사건이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았고 태종의 배려로 기사회생했다. 탄핵을 빠져나온 하륜은 보복의 칼을 갈았다. 자신을 향한 위해세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회한 하륜이 던진 마지막 승부수가 오히려 자신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가 되었다.
변겸 사건을 처결한 태종은 변정도감에 판관 등 20명의 관원을 증원하여 노비송사를 강력하게 진행시켰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옛부터 도감(都監)을 설치하는 것은 해묵은 송사를 변별하고자 함인데 강한 세력이 시비를 어지럽혀 중단한 사례가 허다합니다. 변정도감을 설치하여 1만여 건이나 분변하여 결절(決絶)을 끝마쳤으니 천재일우의 성사입니다. 이제 쟁송은 날로 줄고 문권은 많지 않으니 도감을 혁파하고 본부로 하여금 고찰하여서 쟁송을 끊게 하소서."-<태종실록>
아직 노비변정도감에서 다루어야 할 일이 많은데 노비쟁송을 마무리하잔 것이다. 태종은 망설였다. 아버지가 손을 댔으나 대소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했던 노비문제. 자신만은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것만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건국이념에도 부합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도에서 그만 두자고 한다. 갈등이 생겼다. 물론 노비변정도감을 운영함으로서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소란스러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후유증은 새로운 질서를 잡아가는데 있을 수 있는 홍역으로 받아들이고 신료들이 따라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뜨거운 감자, 손에서 놓다
국가의 백년대계는 생각하지 않고 목전의 사사로운 이권에 발목이 잡힌 신료들이 야속했다. 대의를 중하게 여기는 성리학을 공부했다는 신료들이 이토록 재물을 밝히는지 이제야 처음 알았다. 변정도감을 중단하자는 대사헌을 비롯한 모든 대소신료를 내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누구와 함께 나라를 끌고 가고 누구와 정치를 한단 말인가?
아쉽지만 1만건에 위안을 받은 태종은 변정도감을 혁파하라 명했다. 더불어 노비의 옛 문적과 함께 도감에서 판결할 때의 문서도 불태워 버릴 것을 지시했다. 조사 문서가 빌미가 되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까봐 내린 조치다. 노비변정도감을 혁파한 태종은 노비문제로 신문고를 치는 것을 금했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는 백성들이 임금의 행차 길을 기다렸다 어가가 나타나면 길바닥에 엎드려 억울함을 호소했다. 태종은 대가 앞에서 노비문제를 신소하는 것마저 금했다. 뜨거운 감자를 결국 손에서 놓은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마음에 뜻을 둔 것은 다 이루었던 인물이다.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다. 고려를 멸하기 하기 위하여 정몽주를 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혁명의 깃발을 거침없이 올렸다. 권력의 동반자 아내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열정과 욕망이 강했던 그가 중도에 하차한 것이 유일하게 노비문제였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태종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노비문제. 그가 열정을 보였던 노비변정도감은 당사자인 노비는 철저히 배제한 채 가진 자들의 쟁투장이었다. 인간성을 도외시한 추악한 싸움터에 노비정책의 당사자 노비도 '백성이다'는 앞선 시대성을 조금만 반영하여 노비변정도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면 봉건왕국 조선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로부터 6백년이 흐른 우리의 최근세사에서도 변정도감과 흡사한 임무를 띠고 수많은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좌초한 일이 많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저항이 거세고 끈질겼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가 반민특위라 불리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다. 특위가 와해되지 않고 친일잔재청산을 확실히 하였다면 후손들의 갈등과 짐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그 바탕에서 대한민국은 정체성을 회복하고 똑바로 갔을 것이다. 허나 대한민국은 그 길로 가지 않았다.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후유증이 남아있다. 개혁(改革)은 문자 그대로 피부를 가르는 아픔을 동반 한다. 그 아픔을 극복하자는 모두의 함의가 이루어졌을 때 성공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37편~
첫댓글 이방원은 참 대단하네요.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느껴지네요. 다만 개혁하려고 애쓰는데 난관도 부딪쳤군요.
대장님 깊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