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추억이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훌륭한 맛이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 허영만 작가의 만화 <식객>에 쓰여있는 글처럼 엄마의 맛은 특별하고 소중하다. 평범한 음식이지만 맛내기는 어려운 칼국수, 비빔국수, 호박전에 담긴 김원선 씨 모녀의 추억 레시피를 소개한다.
베이커리 아루 Aroo 대표 김원선 씨와 어머니 윤경숙 씨 얼마 전 결혼한 내 오라비의 별명은 국수돌이다. 하루 두 끼는 물론 사흘씩 국수만 먹어도 좋다고 말할 만큼 국수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엄마는 평일 야식으로 비빔국수를, 주말 점심으로 칼국수를 자주 끓여주셨다. 엄마가 국수를 만들 때는 항상 호박전을 함께 주셨는데, 엄마의 호박전은 다른 곳에서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특별한 맛이다. 호박을 가늘게 채 썰어서 고춧가루를 약간 넣고 부쳐 전의 고소함과 호박의 달콤함, 고춧가루의 칼칼한 맛이 삼합을 이룬다고 할까. 가끔은 국수보다도 그 특별한 호박전이 먹고 싶어서 오빠가 국수를 삶아달라고 말하는 순간을 은근히 기다리곤 했다. 우리 엄마는 내 친구들이나 이웃에까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음식을 참 잘하신다. 그리고 즐기신다. “음식 만드는 일을 겁내는 여자들이 있는데, 재미있게 생각하면 한없이 재미있는 게 바로 음식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엄마를 빼닮았는지.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보석 디자인을 공부하러 떠났던 일본 유학에서 문득 빵 만들기에 꽂혀 파티시에가 되어 돌아왔다. 다른 많은 일도 그러하지만 맛처럼 경험치가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어려서부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란 덕에 내 입은 맛을 알아보는 기준이 꽤 까다로운 편이다. 내가 만든 케이크나 쿠키를 맛보고 만족스러우면 그 제품은 반드시 히트 치는 걸 보면 내 사업 성공의 은인은 어려서부터 먹어온 엄마의 음식이다.
엄마의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다. 억척스럽고 자식 사랑 유별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이북 사람. 오빠와 내가 한창 공부하던 학창시절 밤늦은 시간이면 똑똑 두드리며 “간식 먹고 공부해라” 말씀하시는 엄마의 목소리에선 비빔국수에 넣은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호박전을 씹을 때 느껴지는 달큼한 뒷맛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듯한데, 뚝배기에 된장을 휘휘 풀어 손 위에 올려놓은 두부를 무쇠 칼로 뚝뚝 떼어 넣고 무심하게 끓인 외할머니의 된장찌개 맛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두고두고 엄마와 내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외할머니의 된장 담그는 비법을 물려받지 못한 점이다. 외할머니의 단순하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난 된장찌개, 엄마의 국수와 호박전 그리고 외할머니와 엄마의 맛이 일치하는 온반(쇠고기와 닭고기로 우린 육수에 뜨거운 밥을 말고 양념한 쇠고기와 닭고기를 고명으로 얹어 먹는 국밥으로 이북 음식이다)은 문득문득 예고 없이 찾아와 군침이 돌게 만들곤 한다. 맛이란 엄마가 딸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리는 유산 같다. 나도 두 아이가 자라 오래 묻어두었던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릴 때면 음식 잘하는 엄마로 기억되고 싶다. 또 엄마가 만든 것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하나의 음식(아마도 케이크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에 대한 추억을 꼭 물려주고 싶다.
김원선 씨는 긍정적이고 경쾌한 성격의 그가 아루라는 이름의 베이커리 사업을 시작했을 무렵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김삼순을 닮은 그의 인터뷰를 많은 미디어에서 만날 수 있었다. 뛰어난 파티시에이자 사업가인 그는 “맛있는 케이크를 만드는 일은 엄마가 해주신 음식을 먹는 것 만큼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엄마 윤경숙 씨는 당신은 국수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들 때문에 평생 열심히 만들었다는 비밀을 털어놓으며 호탕하게 웃는 그는 바쁘게 살아온 인생이 자랑스럽다. 부지런하고 솔직하고 유쾌한 성격으로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요리를 배우고 손자들을 보살피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살림 못하는 사람이 사회생활 잘하는 것 못 봤어요. 여자가 밖에서 성공을 해도 살림 못하면 꽝이야. 난 딸에게 매일 그렇게 가르쳐요.” 음식 만들기 좋아하고, 나누기를 즐겨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 짱이라는 그의 솔직한 자기소개만큼 그가 만든 칼국수와 비빔국수, 호박전은 담백하고 개운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을 최초의 맛으로 기억한다. 첫사랑이 그렇고 첫날밤이 그렇듯 처음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깊은 상흔처럼 세월 속에서도 결코 희미해지는 법이 없다. 기억은 오히려 선명해지고 향수는 깊어만 간다. 거친 물살을 헤치고 기어이 태생지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우리에게는 최초의 맛을 찾아 헤매는 질긴 습성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년의 밥상에 올랐던 소박한 찬을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떠올리는 것은 그리움에 다름 아니다. 남루하고 고단한 삶이어도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에 함부로 좌절할 수 없듯 그 시절의 행복한 기억은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이다.” - <食客> 1권 중에서
1 냉비빔국수
재료 국수, 배추김치, 양파, 간장, 고추장, 설탕, 참기름, 깨소금, 맛술
만들기
1 배추김치와 양파를 잘게 썰고 간장, 고추장, 설탕, 참기름, 깨소금, 맛술을 조금씩 넣어 양념하는데 맛술이 중요하단다. 보통은 잘 넣지 않는데 조금 넣으면 국수 맛이 한결 개운해진다.
2 국수 삶는 법은 알지? 소면은 삶을 때 항상 찬물을 두어 번 끼얹어서 끓어오르면 바로 건지고 찬물에 여러 번 헹궈라. 물기를 잘 뺀 뒤에 양념을 조금씩 넣으면서 간을 보며 비비면 된단다.
2 호박전
재료 호박 1개, 파, 다진 마늘, 고춧가루, 소금, 우유, 밀가루, 전분
만들기
1 호박이랑 파는 채 썰고 다진 마늘, 고춧가루, 소금을 넣고 버무려 30분 정도 두어라. 그래야 밑간이 고루 배어 맛이 있단다.
2 재료가 고루 섞일 정도로 우유를 넣고 밀가루와 전분을 조금씩 넣으면서 되직하게 반죽해 전을 부치면 된다. 이때 커다랗게 부치지 말고 번거롭더라도 한입 크기로 예쁘게 부치렴. 그래야 보기도 좋고 맛도 좋단다.
3 칼국수
재료 칼국수, 멸치 1줌, 마른 새우 1줌, 다시마, 양파 1개, 대파 1대, 통마늘 6쪽, 홍고추(마른 것) 1개, 국간장, 다진 쇠고기 300g, 오이 2개, 고춧가루, 후춧가루, 소금, 물
쇠고기 양념 간장, 설탕, 고춧가루
만들기
1 커다란 냄비에 멸치와 마른 새우를 넣고 타기 직전까지 볶은 다음 물을 적당히 부어 끓어오르면 다시마, 양파, 대파, 통마늘, 홍고추를 넣고 푹 끓여서 국간장으로 간을 한 뒤에 건더기는 건져내렴. 국물을 낼 때 멸치와 마른 새우를 볶다가 끓여야 국물이 더 진하게 우러난단다.
2 다진 쇠고기는 쇠고기 양념에 재워두고 오이는 동그랗게 썰어서 소금을 뿌려 30분 정도 절여라.
3 프라이팬에 쇠고기를 볶다가 쇠고기가 익고 국물이 자작해지면 재워뒀던 오이의 물기를 꼭 짜서 넣은 다음 딱 30초만 볶아라. 너무 오래 볶으면 오이가 물러져서 맛이 없다.
4 ①의 국물이 끓어오르면 칼국수를 넣어 익으면 그릇에 담고 ③의 오이선을 얹어서 먹으렴. 이때 대파를 가늘게 채 썰어서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로 버무려 얹으면 보기도 좋고 맛도 좋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