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헌생활의 해 르포 ‘봉헌된 삶’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기도하고 일하며 하느님을 만나다
▲ 오후 8시 끝기도를 바치기 위해 입당하고 있는 수도자들.
고요하고 어두운 성당. 숨소리마저 조심스럽다. 이윽고 적막을 깨는 불빛과 함께 수도자들의 거룩한 발걸음이 제대를 향한다. 감실에 고개를 숙이고 각자 자리에 앉은 수사들이 그레고리안 성가 선율에 기도를 담아 노래한다. 마치 천상에 온 듯 아름다운 청아한 성가가 울려 퍼지는 이곳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하 왜관수도원)이다.
봉헌생활의 해를 맞아 수도자들의 삶을 지면에 담고자 기자는 1박2일 동안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위치한 왜관수도원을 찾았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기본정신 아래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모습을 엿보면서, 그들의 ‘축성된 삶’에 들어가 봤다.
기도하고…
오전 5시부터 네 차례 시간전례
“기도는 수도생활 기본이자 핵심
하느님과 일대일 관계 형성 중요”
1월 28일 오전 5시20분,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행여나 늦을세라 걸음을 재촉했다. 한 손에 성무일도를 꼭 쥐고 불 꺼진 성당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자마자 불이 켜지더니 ‘해빗’이란 모자 달린 검은 색 수도복 차림의 수사들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
수사들이 한목소리로 바치는 기도소리. 평소보다 이른 기상시간에 하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경건한 분위기에 압도돼 정신이 바짝 들었다. 40여 분 정도 계속된 아침기도 후 미사가 봉헌되며 왜관수도원의 하루는 시작됐다.
왜관수도원은 독일 성 오틸리엔 연합회에서 1909년 한국에 진출, 105년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남자 수도회다. 본원에만 70여 명 수사들이 정해진 일과에 따라 기도하고 노동의 생활을 한다. 연령대도 19세부터 101세까지 다양하다.
오전 5시 일과를 시작하는 수사들은 아침기도부터 하루를 마무리하는 오후 8시 끝기도까지 총 4차례 정해진 시간에 성무일도를 바치고, 오전 6시30분에는 미사를 봉헌한다(평일 기준).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오사 저를 도우소서.”
수도자들은 제대 양편에 별도 마련된 자리에서 기도를 바친다. 신자들은 수사들을 따라 신자석에서 시간전례에 참여할 수 있다. 매일 외부에서 찾아오는 피정객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날도 10여 명의 성인들과 비슷한 숫자의 어린이 피정 손님들이 기자와 함께 기도를 바쳤다. 성무일도 책을 보며 열심히 따라 했지만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언제 앉을지 또 일어설지 처음에는 헷갈려 계속 수사들의 몸짓을 훔쳐봐야 했다. 하지만 계속 따라하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고, 기도문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 모든 삶을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로 바친다는 내용이 무척 아름다웠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하느님을 향한 묘한 이끌림이 느껴졌다.
기도와 묵상이 수도생활의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라고 강조하는 고진석(이사악·선교총무국 담당) 신부는 “규칙적인 시간전례 외에도 아침 30분 묵상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도생활은 형제들과의 친교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그 관계가 굳건한 형제들이 공동체 생활도 원만할 수 있다”고 했다.
일하며…
기도시간 이외 각자 소임 수행
‘일이 기도 되게 하라’ 실천 노력
제구 등 생산품 전례발전에 기여
“땅~ 땅~ 땅~”
성작에 문양을 내려 망치질을 해봤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곳은 수도원 내 금속공예실. 전국 성당에 놓일 성작과 성반, 감실, 촛대 등의 성물을 제작하는 곳이다. 강형규(세례자 요한) 수사가 성반과 성작을 합친 모양의 제구를 만들고 있다. 양형영성체(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는 방식)를 위해 어느 본당에서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했다.
왜관수도원 수사들은 기도 이외 시간에 각자 맡은 소임에 따라 일을 한다. 오전 8시부터 11시40분 낮기도까지 오전 업무, 오후 1시부터 6시 저녁기도까지 오후 업무가 진행된다.
수도원에서 생산되는 전례 용구 등은 한국교회 전례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며, 완성도 또한 높다. 분도가구공예사는 제대와 신자석 등 교회건축에 쓰이는 다양한 제품들을 제작한다. 유리화공예실은 전국 성당에서 쓰이는 스테인드글라스 절반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분도출판사는 국내 성서학 및 신학 저술의 저변을 넓혀왔다. 금속공예실은 지난 교황 방한 때 대전 월드컵경기장과 해미성지 미사의 제구를 제작하기도 했다.
“찌이잉~ 칙~ 치지직~”
강대식(고르넬리오) 수사가 기계를 이용해 평평한 동판을 눌러 성합을 만들고 있었다.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적당한 두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한다. 경력이 쌓여야만 할 수 있는, 웬만한 내공으로는 어림없는 작업이라고도 했다.
“예전에는 미사제구들도 망치질로만 만들었어요. 대량생산될 수 없는 제품들이니 최대한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손으로 대부분 작업합니다. 일일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요.”
강 세례자 요한 수사는 “일하는 순간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일도 힘들어진다”며 “선배 수사들로부터 늘 ‘일이 기도가 되게 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망치질 할 때에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면 소리가 다르다”고 덧붙였다.
분도출판사와 분도가구공예사도 들러본 후 분도식품으로 향했다. 이곳은 정통 독일 방식의 명품 소시지를 제작하는 곳이다. 강대봉(알빈) 수사를 비롯한 수도자들과 평신도 직원들이 돼지고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저희는 고기를 손질하고, 간단한 양념을 넣고, 갈아서 삶는 등 간단한 공정으로 제작합니다. 아질산나트륨 등 해로운 건 넣지 않아요.”
왜관수도원은 독일 수도회가 진출한 곳인 만큼 수도원 내에서 오랫동안 독일 정통방식의 소시지를 만들어왔다. 올해로 14년째 소시지 제작을 맡아온 강 알빈 수사는 10년 전 독일로 건너가 3년 동안 소시지 만드는 법을 배워오기도 했다. 그동안 수사들의 식탁에만 올렸던 소시지는 4년 전부터 정식 법인 ‘분도식품’이 출범하며 일반인들에게도 소개되고 있다. 설립 때부터 줄곧 분도식품 책임을 맡고 있다는 강 알빈 수사.
“기도하는 것만큼 일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죠. 소시지 찾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업무에 대한 부담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팔의 인대가 늘어날 만큼 업무량이 많아졌다는 강 수사. 쉬어야 낫는다는 의사 충고에도 쉴 수 없는 현실이 때로는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하지만, 수도공동체 형제들 도움과 수도자로서의 신념이 그때마다 그를 바로 세운다고 밝혔다.
“이 일도 따지고 보면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하느님 섭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현재까지 아무 탈 없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흘러간 것 같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묵묵히 소임에 임합니다.”
하느님 만나다
“봉헌생활의 해, 전 교회구성원이
각자 축성 되새기는 기회 삼아야”
과연 손을 쓰는 노동을 비롯해 매사의 모든 것을 기도로 끌어올리는 법을 짧은 시간 터득할 수 있을까? 성당으로 돌아와 본원장 이석진(그레고리오) 신부, 고 이사악 신부를 만나 기도와 봉헌생활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기도할 때가 행복하고, 늘 기도시간이 기다려진다”는 이 그레고리오 신부는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기도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막연히 기도를 하다 때가 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반드시 해결해주지 않아요. 그 사실을 하루빨리 깨닫고, 시간을 창조해 때를 앞당겨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고 신부도 “저 역시 입회 후 침묵의 시간 속에 하느님과 만나며 그분께서 저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그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며 “이 세상 소음에서 하느님 목소리를 듣는 연습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봉헌생활의 해에 대해서 이 그레고리오 신부는 수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해야 할 중요한 때라고 말했다.
“하느님을 찾겠다는 서약인 세례성사 의미를 생각할 때, 봉헌생활의 해는 수도자뿐 아니라 평신도와 사제들에게 자신의 축성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그에 대한 응답을 새롭게 다지는 적절한 기회가 돼야 합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과에 따르며 끊임없이 기도문을 바치고, 동일한 차림으로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그들에게서 저마다의 개성을 살린다거나 시선을 끄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수도공동체 형제들과 닮아가고, 성인들 모습을 따르는 자세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었다.
▲ 수도자들이 오후 일과를 끝내고 저녁기도를 바치고 있다.
▲ 본원장 이석진 신부(왼쪽)와 선교총무담당 고진석 신부가 봉헌생활의 해를 소재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왜관수도원 금속공예실에서 미사제구를 제작하고 있는 강 고르넬리오 수사.
▲ 분도식품에서 강 알빈 수사(맨 오른쪽) 등이 소시지 제작을 위해 고기를 손질하고 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전경.
2015. 2.8
우세민 기자
사진 박원희 기자
첫댓글 기도하고
일하며 ᆢ
하느님을 만나는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개 잘 보았고
은혜로웠습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