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conte)>
『환상』
靑山 손병흥
그가 요즘 한창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는 전화방에 회사 동료 친구들과 호기심으로 한 번 가게 된 동기는 순전히 어느 주말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다 무턱대고 전화데이트를 통해서 실제로 미팅까지야 이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겠지만, 하여튼 미지의 이성과 신분노출이 없는 익명성을 전제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삭막하고 산업화된 사회생활을 통해 누적되어 왔던 스트레쓰를 어느 정도야 다소 해소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그저 막연한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다.
다함께 쭈빗거리며 들어선 그들에게, 카운타에 앉아 있던 아가씨는 먼저 선불쪼로 기본 입실료를 받고서 연령을 확인한 뒤에 각각 한 평 남짓한 방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방안에는 양다리를 쭉 뻗고 앉을 수 있는 안락의자와, 탁자위에는 약간의 과자 및 메모지가 놓여져 있었다.
정면의 약 36인치 쯤 되는 TV 수상기에선 볼륨을 아주 낮춰 소리를 죽인 채로 현란한 외화 DVD의 화면이 심란스레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아 야릇한 영상을 보며 이런저런 망상속에서 그냥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마침내 기다렸던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마구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서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이제 미지의 여성과 그야말로 '폰 데이트'가 시작 되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답답한 마음을 풀어 놓고서 마음껏 대화를 통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이를테면 교양과 매너를 갖춘 상대방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설레이는 기대감과 내적 갈등이 첩첩이 쌓이다 보니, 미처 응답하는 것 조차도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평상시에 전화받는 목소리 보다 좀 더 굵게시리 목에 힘을 준 채로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라는 말을 간신히 내뱉게 되었다.
그러자 상대 여성은 거침없이 처음부터 이것 저것 신상에 대해 갖가지 질문들을 마구 던져 오는게 아닌가….
그는 오늘 정말 일이 어째 잘 풀리려나 보다해서 너무나 허술하게도 속속들이 쉽사리 훌훌 털어 버리고야 말았다.
하기야 전화데이트에 성공하기 위해선,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느 정도의 대화력과 조금은 허풍이 깃든 그냥 듣기 좋은 목소리가 필수라고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게 왠 떡이란 말인가. 나의 말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주는 것을 보니 내심 기대하였던 환상(?)이 실제의 만남으로 까지 이어질지도 모를일….
그날 그가 제풀에 죽기까지에 도달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평소처럼 덜렁거리며 왜소하고 들뜬 목소리로 미주알 고주알 거리는 그에게, 결국 생각지도 못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손님이 왔네요."
그 여성이 이런 말만을 남긴 채 일방적으로 전화를 덜컥 끊어버린 거였다.
그런 일이 있고난 훨씬 뒤에서야, 그 말의 뜻이 상대남성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하는 거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그는, 아마 그 순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도 잠시나마 일시적으로 정서적인 혼란의 수렁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함에서 비롯 되었다는 막연한 추측이 얼핏 들기는 하였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