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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 [연중 제22주일]
마르코 7,1-8.14-15.21-23
마음을 빼앗기는 법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알 바꿔야 거룩해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음은 원하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자기가 신이라 믿고 소유하고 먹고 이기는 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고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는 일이 구원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전갈과 개구리’ 이야기에서도 개구리처럼 착해지고 싶었던 전갈이었지만, 정작 수영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자기를 태워주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습니다. 마음으로 자신이 전갈이라 믿고 있으면 아무리 개구리처럼 살려고 하더라도 전갈의 본성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믿는 대로 이뤄집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 10,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믿으면 마음이 고쳐집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는 어떻게 자기 마음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김 씨는 회사에서 잘리고 애인과도 헤어졌는데 빚 독촉도 심해지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런데 한강 밤섬에 표류합니다.
표류한 김에 사는데 다른 사람 간섭 안 받고 혼자 사는 삶이
즐겁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라는 섬에서 자신이 왕입니다.
그리고 생존에 집중합니다.
김 씨는 짜파게티 봉지를 보고 그것을 만들어 먹고자 합니다.
그를 지켜보던 극도의 대인기피증으로 방 안에서만 살아가는 김정연이라는 여자가 김 씨를
사진기로 보고는 그 섬까지 짜장면을 시켜줍니다. 김 씨는 짜장면을 거부합니다.
그것을 받으면 간섭받아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농사지어서 결국엔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허무함과 그 달콤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는 중에 여자 김 씨와 소통하며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결국 섬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는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김 씨도 집 밖으로 나와 남자 김 씨에게 달려옵니다.
이제 둘은 서로의 섬이 되어줍니다.
갈 곳이 생기자 이제 이전의 자기를 지배하던 섬,
곧 마음을 버리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방법은 피를 받음으로써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줍니다.
자녀는 마음으로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마음 안에서 살지 않고 부모의 마음으로 삽니다. 부모가 기뻐하는 일을 하려 하고 마음 아픈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세계로 성장하며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고 조금씩 하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로 예수님께 계속 마음을 빼앗깁시다.
그분의 마음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전래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는 나무꾼에게 자기 옷을 빼앗겨 아기까지 낳습니다.
미안한 선녀에게 옷을 내어줍니다. 선녀도 아기 둘을 데리고 올라와 나무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고안하여 나무꾼을 하늘로 불러올립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서로 마음을 빼앗기는 관계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일 [연중 제22주일]
복음: 마르 7,1-8.14-15.21-23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교회 행사를 주도해 나가다 보면 가끔 크게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례나 미사의 가장 중심, 핵심, 본질, 주체는 당연히 하느님이시지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강렬한 표현인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언젠가 제법 큰 행사를 한번 주관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할 일이 많더군요.
기획안을 제출했습니다.
승인을 받자마자 행사를 추진할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각 분야의 실무자를 선정해 즉시 실무에 착수했습니다.
제 성격상 적당히 하는 것,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됩니다.
그야말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행사는 아주 경건하고 아름답게 진행됩니다.
1부 전야제, 2부 미사, 3부 친교의 마당... 행사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피드백을 받아보니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만족이었습니다.
다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그 행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깊은 하느님 체험을 했습니다.
행사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 자신은?
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사 내내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행사가 완벽하고 정확하게 끝나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저 일만 죽으라고 했던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 안에 하느님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정작 제 안에는 아무 변화도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 안에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저 과로에 찌든 한 영혼이 힘겨워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주객이 전도됩니다.
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보다는 개인적, 사적, 이기적 욕구나 기대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보다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만 잔뜩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백성의 인도자들이었던 그들은 하느님 보다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율법에, 지극히 세밀한 생활규칙에 더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수도회나 교회 안에도 많은 규칙들, 법조항들이 존재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을까요?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을 들으면 보다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규칙들이 왜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규칙들은 사랑 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한 수단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심하게 질타 당하는 가장 큰 이유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강조하는 율법에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들의 외양은 무서웠습니다.
어딜 가든 율법이란 잣대를 들고 다녔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율법을 어기면 여지없이 율법서를 들이대었습니다.
싸늘한 눈초리, 냉랭한 얼굴, 엄격한 잣대, 호시탐탐 이웃의 실수를 노리는 표정...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 생략된 법이요, 인간미가 상실된 규칙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일 강론>
(2024. 9. 1.)(마르 7,1-8.14-15.21-23)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5-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1-23).”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겉만 깨끗하고 속은 깨끗하지 않은’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정결 예식’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 실행한 것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거룩하다.’ 라는 말과 ‘깨끗하다.’ 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깨끗이 씻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는데, 그게 위선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고, ‘삶’을 깨끗이 해야 한다.”
몸을(몸만) 깨끗이 씻는다고 해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11장을 보면,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7-41)”
우리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긴 겉옷’을, 즉 사제복과 수도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온 삶으로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3)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라는 말씀에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일이 연상됩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창세 3,6).”
하느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창세 2,16-17).
그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는 선악과 탓일까?
‘먹음직하고 소담스럽고 탐스럽게’ 보인 그 열매의 잘못일까?
만일에 정말로 맛없게 보이는 열매였다면, 하와가 안 따 먹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명령을 어기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 명령을 하신 하느님 탓일까?
아담과 하와의 죄는 그들 자신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그들 자신들이 지은 죄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말은, 열매를 준 하와 탓을 하는 말이고, 또 하와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 탓을 하는 말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남 탓’만 하고, ‘외부 탓’만 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깨끗한(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과 온 삶을 깨끗이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