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
“일본군과의 결전 장소는 둥베이다.
그런즉슨 괜히 평양에서 힘 뺄 거 없다.”
신임 총사령의 돌출 발언으로 청군 지휘부는 대뜸 혼란에 빠졌다.
비적 소탕의 공로로 황마괘(최고 무공훈장)까지 받은 둥베이 부대의
노장 좌보귀는 대뜸 반발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골에게 허위 보고로 총사령이 된 자의
퇴각론이 탐탁할 리 없었다.
"평양은 튼튼한 성곽에 드넓은 대동강을 해자로 끼고 있는 천혜의 요새다.
이만한 성을 의지해 싸우지 않으면 또 어디서 싸울 것인가?
1만 3천의 대병으로도 싸우지 않겠다면
도대체 어떤 군대라야 싸우겠단 말인가?
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갈 궁리부터 하는가?"
조근조근 따지며 대들었다.
그러나 섭지초는 노장의 용기를 높이 사지 않았고
황마괘에 경의를 표하지도 않았다.
"당면의 적은 귀관이 지금까지 싸운 비적들과는 다르다."
단 한 마디로 깔아뭉개 버렸다.
“일본군이던 비적이던 적은 적, 적과는 싸울 뿐 무슨 말이 필요한가?"
버럭 핏대를 올리다 제 성질에 못 이겨 벌러덩 넘어간
좌보귀는 결국 부하들에게 업혀 돌아갔다.
노령의 그는 고혈압과 풍기에 시달리는 몸.
하지만 업혀가면서도 뻗대었다.
"갈 사람은 가쇼, 혼자서라도 싸울 거요."
다른 장령들 역시 평양 포기론에는 갸우뚱 했다.
마옥곤, 풍신아 등 영관급들도 성에 의지해 싸우는 쪽을
선호했다.
그들은 애시당초 섭지초를 믿지 않고 있었다.
허위보고나 일삼는 자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의 고만고만한 장령들을 장악하려면
카리스마가 필요했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북양군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지연과 인맥 위주로 발탁된 북양군의 비극이었다.
휘하 병력으로만 본다면야 평양의 청군 중 가장 큰 부대를 거느린
성군盛軍 수장 위여귀가 총사령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당포업자 출신.
고리대금이 본업이고 장군은 부업인 자였다.
그가 부대 운영비나 급료, 식비 따위를 횡령한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부대는 유독 군기가 문란하고 부패도 심했다.
이홍장이 보기에는 그나마 섭지초가 나았다.
하지만 장령들이나 병사들 생각은 달랐다.
성환 전투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섭지초 부대 꼬락서니는
다들 보았다.
거지꼴로 나타난 패잔병들은 지휘가 얼마나 졸렬했는지
또 철수과정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저마다 하소연했다.
소문이 퍼지자 사기는 뚝 떨어졌다.
“전투에 진 작자가 처벌은커녕 더 막중한 자리에 오르다니!”
"주둥이만 나불댄 놈이 상을 받아?"
"열심히 해봤자 공은 섭지초 몫, 우린 따라지신세 될 게 뻔하다."
풍기風氣를 달래며 누워있던 좌보귀는 일본군 척후를 생포했다는 보고에
벌떡 일어났다.
당장 신문해 최신정보를 캐내야 했다.
이윽고 영장(대대장 급) 한 명이 포로와 순찰대를 데리고 나타났다.
흡족한 얼굴로 대원들을 살피다보니 끄트머리의 앳된 얼굴에 눈길이 간다.
“몇 살이냐?”
“예, 19살 입니닷.”
‘어린 병사도 이렇게 싸우는데...’
새삼 섭지초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큰 공을 세웠구나. 상으로 석 달 치 봉급을 주마.
조장은 특진이다.”
부관을 돌아보자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예. 장군님.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순찰조원들 어깨를 한명 한명씩 두들겨주다 보니 맨 끝이 아까 그 19살짜리였다.
“이름은?”
“옛, 이병 장·작·림.” 군기가 바짝 들었다.
“작림아, 어린 나이에 고생하는구나. 애로 사항은 없느냐?”
노장군의 인자한 시선을 받은 작림은
지금이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용기를 있는 대로 짜내며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자지 끝이 짜릿해진다.
“병사 장작림, 감히 장군님께 독대를 청합니다.”
"호오..?“ 호기심이 어리는 노장군,
옆에서 불그락푸르락 하고 있는 영장에게
“포로들 데리고 잠시 나가 있게.”
잠시 후 나타난 좌보귀는 곧바로 포로들을 신문했다.
이어서 단련군 풍신아와 밀담을 나누었다.
봉군과 단련군은 다 같은 성경(봉천의 옛 이름)장군 예하부대.
비록 5천명에 불과하지만 평양성의 핵심전력이었다.
오합지졸 성군이나 성환 전투의 패잔병을 긁어모은 섭지초 부대는
있으나마나한 허수아비였고 나머지는 포병이었다.
그날 저녁,
좌보귀 진영에는 각급 부대장과 참모들이 긴장한 얼굴로 모였다.
일본군의 열악한 보급 상황을 알려주자 비로소 화색이 돈다.
좌보귀는 단언했다.
“ 저들은 속전속결을 원할 터. 하지만 우린 버티기만 하면 된다.
배낭 속 건량이 다인 주제에 얼마나 싸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탄약도 병사들이 지닌 30발씩이 전부.
이참에 조조군 화살 10만개를 털어먹은 제갈무후의 수단을 한번 써먹어 보세.”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약간 풀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긴장된 표정.
‘결전은 둥베이에서...' 라는 원칙을 천명한 총사령 섭지초가
어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이 모임은 영락없는 항명으로 비칠 것이다.
포로가 지닌 빈약한 실탄, 곡식을 챙기던 척후병, 패잔병의 증언,
이 모두가 일본군의 물자 결핍을 증명한다.
그러나 아집에 사로잡힌 섭지초가 이 모든 증거들을 부인한다면...?
청군은 적전 분열의 위기를 맞을지도 몰랐다.
“나와 풍 상교(대령 급)가 총대를 메겠네. 제군은 잠시 밖에서 기다려주게.”
비장한 표정과 겁에 질린 표정들이 엇갈린다.
‘위팅이 잘 하고 있을까?’
경석은 조바심이 났다.
위팅과 순찰조가 사라진 빈 막사에 감시역인 덩치와 둘만 남았다.
말인즉슨 증인 보호라지만 이건 감금이나 진배없었다.
소 닭 보듯 멀뚱멀뚱 마주 보던 덩치가 심심했던지 문득 수작을 건넸다.
“이봐, 우리 말은 어서 배웠어?”
“대대로 평안감영 역관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웠지요.”
“그래?”
미련하게 생긴 얼굴이 헤벌쭉한다.
“관원이란 말이지? 뽀얀 게 부잣집 도련님 티가 나네.”
말투가 점점 삐딱해졌다.
“그럼 예의범절도 잘 알겠구나.
난 봉군 정목 正目(분대장) 슝빙쿵이다.
타향살이에 지친 이 몸을 위로해줄 생각은 없는가?”
” ..... ?“
“내숭 떨기는... 객고 좀 풀어달란 얘기다.”
음흉하게 웃는다.
객고라니...? 뭐야, 이 자식. 색주가로 데려다달라는 수작인가?
어이가 없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가기는 좀...”
느닷없이 어깨를 싸안은 슝이 구린내 나는 입 냄새를 풍기며
아랫도리를 슬슬 만진다.
“바깥은 무슨, 난 너처럼 예쁘장한 사내 녀석이 좋더라.”
‘아니, 이 자식이 어딜... !’
소름이 쫘악 돋았다.
반사적으로 끌어당긴 팔꿈치로 명치를 냅다 찍어버렸다.
팔매 날리기로 나름 단련해온 다부진 팔뚝이었다.
헉 하며 허리를 접는 뒤통수에 정권을 냅다 꽂아 넣자 우당탕 쓰러졌다.
눈을 까뒤집더니 대번에 혼절했다.
“까아~불고 있어... 지저분한 뙤놈 주제에.... !”
징그러운 느낌에 머리를 털며 부르르 떠는 데
문이 벌컥 열리며 보초가 뛰어들었다.
침상에 쓰러진 덩치를 보더니 대뜸 총부리를 겨눈다.
“너 뭐냐? 정목님을 어떻게 한 거냐?”
“아니... 그게 아니고.”
실랑이 하는 사이에 덩치가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보초의 총을 홱 낚아채더니 총열로
경석의 목울대를 겨냥해 냅다 찔렀다.
졸지에 당한 경석이 목을 움켜쥐며 쓰러지자 마구잡이로 걷어차고
개머리판으로 내려쳤다.
놀란 보초는 더듬댔다.
“정목님, 아까 조장님이 잘 지키라 하셨는데 이러시면...”
“놔! 이 새끼야. 전시에 조선 놈 하나 뒈지는 게 무슨 대수라고...!”
다시 개머리판으로 내려찍었다. 그런데...?
전혀 반응이 없었다.
들여다보니 어느새 숨이 끊어져 있었다.
돌아온 순찰조와 장작림은 기함을 했다.
경석은 일본군의 열악한 보급 상태를 제보한 중요 증인.
좌 장군이 찾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리날 일이었다.
다급한 중에도 군의는 믿을 수 없어 들쳐 업고 평양 감영으로 달려갔다.
감영에는 내의원 출신 의원이 있다 들었다.
같은 중인계급인 의원은 평소 왕래하던 신 역관 댁 자제,
경석을 알아보았다. 심한 충격으로 기혈이 막힌 상태라며 응급조치를 했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뜸을 뜨자 잠시 후 숨이 터졌다.
그러자 막상 놀란 것은 의원이었다.
보호자 앞이라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미 가망 없던 환자였다.
헛일하는 셈 치고 간단한 응급처치만 해주었는데
한참 전에 숨이 끊겼던 사람이 되살아나다니...!
하지만 내막을 모르는 순찰조장은 원래 그러려니 했고
자기가 변을 당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작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진상은 누구도 몰랐다.
역관 신경석은 이미 죽었고 누군가가 그의 몸을 대신 차지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의원 못지않게 놀라고 혼란스러웠던 것은
졸지에 경석의 몸을 차지한 유병호였다.
깨어보니 생면부지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조선시대의...
양자 감응은 같은 시간대에서만 있는 현상인줄 알았다.
내가 살던 21세기에도 아직 이론상의 이야기일 뿐이었는데...
‘막상 겪고 보니 시공을 훌쩍 뛰어 넘는 현상이었어!’
모르는 일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다가오는 평양성 전투. 청나라, 일본군...!
아마도 이 몸의 주인이던 청년의 기억이리라.
나라와 가족을 아끼는 순수한 마음.
중국 근대사를 전공한 나는 그 단어들만으로도 지금 시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게 고스란히 전이된 청년의 기억.
중국어 실력. 그리고 장작림과의 인연까지...
그 기억들과 백년을 격한 내 지식이 섞이면 전혀 새로운 그림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
다음 순간, 숙명이라는 생각이 와락 들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늘그막에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다.
진실로 큰 은혜였다....!
상상조차 못해본 초자연의 신비.
왜? 를 따지기보다는 그냥 주어진 기회에만 충실하고 싶다 !
마음을 다잡은 나는 새로 얻은 몸을 뒤척여보았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의 고통을 겪어본 내게 그 정도는 가볍게 긁힌 정도에 불과했다.
달려온 식구들은 나를 감영 의방에서 집으로 서둘러 옮겼다.
그리고 며칠 내내 자리보전만 하며 지냈다.
치료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삶을 얻은 내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실로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이윽고 털고 일어난 내 앞에 청색 군복의 작달막한 사내가 나타났다.
장작림.
누워있는 동안에도 매일 다녀갔었다고 들었다.
“이제 정신이 드는가?”
와락 손을 잡으며 묻는 얼굴에 투박한 진정이 넘쳤다.
“왔는가? 위팅”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맥 빠진 반응에 작림은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다 내 잘못이야. 자넬 병영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었어.”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됐네. 다 잘 끝났으니. 그보다 정보는 어찌... ?”
쩔쩔 매던 작림의 표정이 그 말 한 마디에 휙 밝아졌다.
“그게 말이지, 기대이상으로 잘 풀렸어.”
보급 난 얘기를 들은 섭지초는 둥베이 결전 전략을 바꾸었다고 했다.
좌보귀를 부사령으로 삼아 수성전 준비가 한창인데
군복 입힌 제웅(짚 인형) 수백 개를 성벽에 늘어세울 계획이라 했다.
또 곧고 굵은 나무들을 벌채 중이라 했다. 위장용 포대를 세울 요량이라고...
통나무에 검은 칠을 해 바퀴만 달면 멀리서는 대포로 보일 것이니
적군의 포탄 소모용으로 딱 이라는 얘기였다.
가뜩이나 부족한 저들의 탄약을 빨리 바닥내려는 술책.
조조군 화살 10만 개를 털어간 공명식 작전이었다.
“저들의 군량과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만 버티면 이긴다!”
모두가 경석의 제보를 바탕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섭지초의 헛소리와 지휘부 분열로 사기가 바닥을 치던 청군 진영은
이제 활기차게 움직이는 중이라 했다.
“이게 다 자네 덕분이라네.”
작림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난 초장(소대장 급)으로 진급했네. 좌 장군님 특명으로.”
제 아무리 오합지졸 잡탕인 청군이라 해도 일개 병졸이
바로 장교 계급장을 달기는 쉽지 않다.
이는 지휘부 분열로 위축된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