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가수 많이 아니? 내가 아는 남자가수 말해볼까? 으음~ GOD, HOT, 량현량하... 으음 그리고 서태지..."
추석 전날 초등학교 1학년생인 딸이 자기 친구에게 한껏 뽐내며 하던 소리다. 도대체 서태지 노래라고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8살짜리 딸이 뚱딴지같이 자기가 아는 남자 가수의 반열에 서태지를 떡하니 집어넣는 허풍을 떠는 게 아닌가? 추석날 밤. 전국의 안방을 강타한 서태지공연을 딸은 내내 지켜봤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1학년생이 소화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는데도 공연이 끝나자 딸은 "엄마~ 우리 서태지 CD사자!" 하고 소리쳤다.
"오잉?"
도대체 서태지의 이 위력은 어디에서 온 걸까? "그것이 알고 싶다. 서태지 모든 것 밝힌다"(스포츠투데이) "서태지 새음반을 듣고"(스포츠 서울) "태지 컴백쇼 네티즌 반응" (스포츠서울) "서태지 공연과 앨범전망"(MBC뉴스), "올림픽공원 울린 서..태..지" (조선일보)...
서태지 공식 홈페이지의 "What's New!"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서태지 관련 수백건의 기사들이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이 서태지를 만났다는 소식밖에 뚜렷하게 서태지가 언론과 직접적으로 만난 흔적을 영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12년간 기자생활을 해 온 처지에서 나는 이번 서태지 위력의 핵심 중 핵심으로 '탁월한 언론플레이'에 주목한다. '언론인을 가장 적게 만나고 가장 많이 기사화된 인물'로 서태지는 국내 최고기록 보유자의 자리에 우뚝 선 셈이다. <한겨레>도 <인터넷한겨레>도 서태지를 직접 인터뷰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태지'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인터넷한겨레> 로그파일분석에서 단일기사로는 최고 기록을 연일 갱신했다. 고백할 일도 있다. 서태지가 온 지 얼마 안 돼 <일간스포츠>가 서태지 컴백 타이틀곡이 <울트라맨이야>라고 특종보도한 일이 있었다. 사이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저작권이고 뭐고' 당장 퍼다 올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퍼올려~!" 하고 부원에게 소리쳤다가 <한겨레> 문화부 기자에게 슬그머니 전화를 걸어봤다. "현재 상황에서 확인을 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는 '울며 겨자먹기(?)'로 못 퍼올렸지만, 속으로는 "크윽~ 그거 올리기만 하면 50000 클릭은 기냥 들어오는 건데~ 크윽" 하면서 가슴을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급기야 <인터넷한겨레> 홈에도 "서태지컴백 특집"을 만들고 토론방도 열었다. 토론방에는 보름도 안돼 1500여개의 글들이 쏟아졌다. 오늘도 계속 올라온다. "한겨레가 무슨 서태지 컴백 특집을 만들고 뭘 토론하라는 거야?" 하는 비난도 빗발쳤지만 서태지를 둘러싼 진지한 논쟁도 이어졌다.
휴~ 서태지가 깔끔한 보도자료 챙겨들고 겸손(?)하게 찾아와 인사한 것도 아닌데 언론이 알아서 박박 기면서 이렇게 홍보 최전선에 나선 이유는 뭘까? 그야 뭐 장사가 되니까. 진짜? 그렇지 장사가 되니까. 팔리는 상품이니까.
그런데 그것만이었을까? 언론사에는 매일매일 "한줄이라도 좋으니 기사화 좀 해줍쇼"하고 몰려드는 수백 수천개의 보도자료와 취재원들로 숨돌릴 틈이 없다. 거기다 "이사람 내 친구의 애인인데~" "선배 친구의 딸인데..." 등등 온갖 수식어가 달린 내부 청탁도 줄을 잇는다.
이런 풍토 속에서 서태지의 '언론플레이 없음'을 표방한 고차원의 언론플레이는 적중했다. 담합해서 서태지를 물먹일 수 없는 것이 언론의 현실이다. 언론을 철저히 물먹인 서태지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홍보해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서태지는 언론을 '완죤히' 갖고 놀았다.
인터넷도 매한가지다. "서태지, 신곡은 mp3로 먼저 공개한다" 기사처럼 인터넷 사이트에는 서태지 음반이 mp3로 올라오고... 검색사이트 라이코스 홈에는 문화&엔터테인먼트 카테고리 분류에서 영화, 만화, 음악...다음에, '서태지'를 떡하니 배치한 게 아닌가?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나도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언론을 물먹인 태지 너 두고보자!"라는 생각보다는 "통쾌하다! 통쾌해! 참말 통쾌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이것도 서태지의 고도 언론플레이에 놀아난 걸까?
이번 사건은(나는 이걸 사건이라고 부르고 싶다. 진짜 최소 언론인을 만나고 최고 기사화를 기록한 사건 말이다.) 언론과 서태지 모두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이제 "내게 와서 굽신거리는 놈만 키워준다" "까부는 놈은~" 하는 식의 오만한 자세는 이제 그만!이라는 거다. 서태지는 기성 언론이 안 써줘도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활용할 수 도 있었다. 앙큼하게 음성사서함에 인사말을 남기는 새로운 수법까지 동원하지 않았던가. "우리한테 박박 기면서 인터뷰 안 당하면 넌 죽어~" 뭐 이런 언론 횡포의 시대는 끝나가는 시점이라는 걸 정신 번뜩나게 실감케 해준 거다.
그리고 서태지 너! ('휴! 오금저려~') 잘 들어! 서태지도 언제까지나 정상에 있을 수는 없다. '언론플레이 없음'이라는 고도의 언론플레이는 요번엔 적중했지만 계속 그러기는 힘들걸... 카멜레온 같은 언론은 언젠가 담합을 해 당신을 깔아뭉갤 수도 있을걸? 그때를 위해 '언론플레이 없음'의 철학을 좀 더 정교화시켜 놓아야 될걸? 더 많은 사람들이 왜 서태지가 언론을 만나지 않는지, 고도의 쇼가 아니라 진짜 엄청난 철학에 근거한 거란 걸 고개를 끄덕끄덕이며 납득할 수 있도록, 그래서 진짜 언론에 대항할 만큼 당신편이 많아질 수 있도록 해둬야 할걸?
검색엔진에 쏟아져 나와 있는 '태지문화사랑회'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 'TaijiZone New!' '그니의 서태지와 아이들' '김동휘의 서태지와 아이들' '태지러브' '태지보이스'... 수백개의 이 사이트만으로는 힘들걸? <태지통신사> 하나쯤 만들어둬야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