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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루카 4,16-30
말씀을 듣고 화가 난다면?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가난은 겸손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키웠기에 안다고 착각합니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결국 거북한 말을 하는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여 성경을 먼지가 쌓이도록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말씀이 거북할 때 더욱 그래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이 거슬려도 아이들은 잘도 배웁니다.
며칠 전 제가 아는 세실리아 자매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직속 상사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누가 들어봐도 직속 상사가 문제였습니다.
자기 명예가 깎이는 것처럼 느껴지자 세실리아 자매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치며 야단을 쳤습니다.
집에 돌아와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그건 네 탓이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말은 듣기에 거북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덮어버리고 기도도 끝내지 않은 채 잠을 자버렸습니다.
다음 날 주님께 그렇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다시 말씀을 잡았습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있는데, 그 신부님은 방 안으로 빛이 들어오면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나에게 잘못이 보이면 그게 빛이신 주님과 가까워졌다는 뜻이라고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의 탓도 있다고 인정이 되니까 나도 그리스도와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사에게 전화하여 차나 한잔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이 잘 풀렸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듣기 거북하다고 예수님을 절벽으로 던져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세실리아 자매는 말씀이 듣기에 거북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머물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은총이 왔습니다.
말씀을 주시는 분은 그것을 실현할 힘도 주십니다.
힘을 받기 위해서는 거북한 말씀과 오래 머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말씀은 은총과 결합할 때 진리가 됩니다. 진실해라. 누구나 다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말했을 때는 그것이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으니까 말씀도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가 거짓말하는 게 제일 싫다고 하셨을 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계속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말씀은 거북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기다리면 언젠가 옵니다.
그러나 만약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말씀의 전례는 가볍게 여기고 성찬의 전례만 중요하게 여기면 성찬의 전례에서도 어떤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김범석 교수에게 찾아온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들어본 바로는 거창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또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러 번 의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사실 6개월이란 시간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이 있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었습니다.
말씀이 있는 사람은 6개월이 은총의 시간이었고 말씀을 거부한 사람에게는 마지막 6개월이 불만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가 먼저 있고 성찬의 전례가 오는 것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거북합니다.
강론이 길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을 통해 내가 변해야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잡고 살려고 하면 은총을 주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려는 말씀을 잡으니 “다 주었다!”라는 은총으로 힘을 주셨던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말씀으로 삶을 변화시킬 결심을 합시다. 그러면 은총도 따라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4,16-30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입니다!
안식일을 맞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며 당신에게 해당되는 구절을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히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외아들이자 메시아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파견되신 이유도 분명히 밝히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우리 인간들의 위로자요 해방자, 구원자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양한 속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씀에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무거운 죄의 사슬, 아무리 노력해도 호전되지 않는 영혼의 병,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라는 굴레...
이토록 오랜 노예 생활과 유배 생활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해방자로 오셨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반가운 말씀인지요?
육체적으로 눈먼 이들의 시력을 되돌려주시는 것은 일종의 표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회복은 영적인 시력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눈 멈, 본질적인 것, 특히 하느님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암흑으로부터의 회복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이제 우리 인간 이성의 빛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이성의 빛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빛을 통해 더이상 어두워지지 않을 참된 광명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성의 빛(lumen rationis)은 계시의 빛(lumen revelationis)으로 변형되고 드디어는 영광의 빛(lumen gloriae)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낭독이 끝나고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촌철살인의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명료한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그런 말씀이 흘러나온 것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구원의 기쁜 소식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불신과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목소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해버린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자렛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순식간에 자신들의 처지를
180도 뒤바꿔주실 분으로 기대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지상적 번영이나 물질적인 부, 강력한 정치력,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실 메시아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빵, 기적, 권세,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력히 요구하신 것은 회개와 새 생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간단한 예수님의 요구조차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해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들의 눈앞까지 다가온 구원을 발로 차버리는, 그래서 그 구원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차지가 되고 마는 불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강론>
(2024. 9. 2. 월)(루카 4,16-30)
<회개가 없으면, 기쁨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6-21)”
1)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레위기에 규정되어 있는 ‘희년’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메시아 시대’를 뜻합니다.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희년 선포’로 해석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희년’이 이렇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레위 25,8-10).”
구약시대 때에,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의 소유권이 원래의 주인들에게로 되돌아갔고, 모든 빚이 탕감되었고, 모든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메시아 시대’는 그런 희년처럼 ‘모든 사람’이 온갖 억압에서 해방되는 시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메시아 시대 선포’는 곧 ‘기쁜 소식 선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선포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선포하신 순간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그 희년 제도는 제대로 실행되었을까?
실제 현실을 보면, 희년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오히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급한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돈을 꾸려고 해도 꿀 수가 없었습니다.
희년이 다가올수록 이자율은 점점 더 높아지고,
그러다가 희년이 바로 코앞에 닥치면 아예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탕감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희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고, 어떻게 하면 손해를 덜 보게 될까를 따졌습니다.
그러니 그 좋은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흐지부지하다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인데도 ‘죽은 규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기쁜 소식’인데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권층 사람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기득권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메시아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해방과 자유를 누린다는 말은 곧 그 나라에는 특권층과 기득권층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진 것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작은 이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권층과 기득권층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 기득권층에 속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복음을 기뻐하지 않게 됩니다.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달갑지 않은 소식’으로 받아들입니다.>
4) 기득권층 사람이든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든지 간에,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 되려면, 우선 먼저 사람들 쪽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변화는 참된 회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회개’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희년’이라는 제도가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없어진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익과 손해만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그런 식으로 대합니다.
그 모습은 부유하거나 가난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와 신앙을 갖는 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익인가, 손해인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따지고 있습니다.
“세속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다.” 라고 아무리 말해도, 비웃기만 하고,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으로만 가는 사람들이, 옛날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니 회개 없이는 기쁨도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