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 해변
나아 해변은 경북 경주시 양남면에 자리 잡고 있다. 해변은 몽돌과 모래가 섞여있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특히 소나무 숲에는 무료로 텐트를 설치할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캠핑을 즐긴다. 취사는 금지이지만 차크닉과 차박을 즐기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주변에 나산들 공원, 경주 문무대왕릉이 있다.
◆ 나아해변
옛날 신라의 동방에 용성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전한다. 용성국의 왕과 왕비가 자식을 얻기 위해 기도했는데 왕비가 임신한 지 7년 만에 알을 낳고 말았다. 일관과 신하들이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고 하자 용성국의 왕은 왕비가 낳은 알을 비단에 싸고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붉은 용의 보호를 받으며 바다를 떠돌던 궤는 먼저 금관국에 닿았지만 사람들은 반기지 않았다. '인연이 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라.' 금관국 사람들은 기도를 드린 뒤 궤를 다시 바다로 띄워 보냈다. 마지막으로 닿은 곳이 신라의 동쪽 포구 아진포(阿珍浦)였다.
어느 날 아진포에 사는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포구에서 해초를 거두고 있다가 궤를 발견한다. 궤 주위에는 수많은 까치들이 울며 호위하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노파가 궤를 열어보니 허리에 칼을 찬 사내아이와 보물이 있었다. 아진의선은 아이를 거둬 정성껏 길렀다. 그리고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날려 보내고 석(昔)자를 성으로 삼고, 궤를 열고 알을 깨치고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한다. 그 아이가 신라 4대 왕인 석탈해 왕이다.
탈해왕이 건져 올려진 아진포가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앞바다라고 한다. 아진포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이후 사라져 전설적인 지명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다 1985년경 나아리 주민들에 의해 나아천 하구의 홈바위 언덕에서 조선 헌종 때 세운 '석탈해왕탄강유허비각'이 발견됐다. 탈해왕의 사연이 새겨져 있는 비다. 현재 유허비각은 월성원전 남문 앞의 넓은 공원에 자리해 있다.
나아천은 현재의 나산천인 듯하다. 나산천은 봉길리 서쪽의 상라리에서 발원해 나아리 서쪽의 나산리를 지나고 나아리 솔밭 사이를 흘러 바다에 닿는다. 나아해변에서 물길은 잘 가늠되지 않는다. 알에서 태어나 무럭무럭 자란 아이는 왕이 되었고, 그는 재임 시절 철기를 최대한 활용해 태평성대를 구가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탈해왕은 철로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을 진작하고 철로 병기를 만듦으로써 훗날 삼국통일을 이루는 힘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나아해변에는 '제철왕(製鐵王) 석탈해'를 소개하는 조형물들이 늘어서 있다.
나아리에는 4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그중 석탈해가 자란 언덕이라는 '장아(長阿)', 작은 고개와 보리밭이 있었다는 포구인 '모포(牟浦)', 소나무가 많았던 마을 '송하(松下)'는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헐리었다. 그리고 신라 석탈해를 거두어들인 곳이라는 '수아(收兒)'만 남았다. 예전에는 '나아천 남쪽 나아리 당수 나무가 있는 지역'으로 구분되었지만 지금은 나아리에 사람의 자취가 있는 모든 땅이 '수아'다.
옛날 나아리 사람들은 대부분 물고기를 잡거나 벼농사를 했다고 한다. 더러는 소와 돼지를 키웠고 계절 따라 감이나 엄나무를 내다 팔며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수아'에는 원전 건설 이후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주민의 8할 이상이 원자력 관련 종사자이거나 상업에 종사한다. 2천년이 흘러도 이 땅은 여전히 먼 곳의 사람들을 거두어들이는 '수아'다.
나아 해변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