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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달콤한 꿈을 선물하는 동화 원문보기 글쓴이: 김동석
― 인종주의를 중심으로 ―
박 지 향*1)
1. 일반적 유사점과 차이점 비록 항상 해가 비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해가 지지는 않았던 영제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영제국은 그 인구와 영토에 있어서 인류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제국이었다. 근대에 들어 非백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식민 제국을 지배하였던 일본. 두 제국의 경험은 역사, 동기, 지배 이념, 지배 방식, 그리고 해체 등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여준다. 우선 가장 현격한 차이는 두 제국의 시간적, 공간적 차이에서 발견된다. 영국은 이미 16세기 중반부터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면 식민성 장관조차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제국을 전세계에 소유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의 공식적 제국의 존속 기간은 1895년 대만 영유로부터 시작하여 50년밖에 되지 않는다. 영제국이 6대륙에 골고루 퍼져있는 광대한 원격지들로 구성되었다면 일본 제국은 본국의 근린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두 제국의 이러한 시간적, 공간적 차이는 식민지 경영에서의 차이로 나타났다. 영제국이 행정적, 구조적 지속성을 결여하고 있었고 광대한 제국을 총괄하는 획일적인 정책을 만들어내지도 못하였고,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면 일본은 짧은 시일 내에 제국을 본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처음부터 일사불란한 정책을 추진해 나아갔다. 영국의 제국 팽창이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면, 일본의 그것은 열등감의 표현이었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개국과 더불어 서양 여러 국가들과 어쩔 수 없이 불평등 조약 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어떤 점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이 겪은 수모를 동양의 이웃들에게 보복 삼아 되풀이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 많은 영국인들에게 제국의 소유는 영국적인 것의 본질적 부분으로 이해되었다. 제국은 영국적인 가장 숭고한 가치들, 즉 남자다움, 용기, 기율, 자기희생, 타인에 대한 이기심 없는 봉사 등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도 대처 수상은 영연방 수상들에게 그들이 영국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환기시키곤 하였다.2) 그러나 일본의 경우 제국 영유의 경험은 일본 국민에게 거의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못하였다. 일본에는 키플링이 존재하지 않았고 일본 수상이 근린국 지도자에게 식민지 경험을 고맙게 여기라고 말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감으로 제국 통치를 정당화하였다는 데 영국 제국주의의 특징이 있었다. 그들의 우월감은 특히 영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영국 헌정 질서에 대한 자부심의 반영이었다. 반면 그러한 도덕적 우월감을 결여하고 있던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비로운 민족 개념을 만들어내어 주변 아시아인들과의 차별성을 시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천황을 이용하여 민족 말살로 이어지는 황민화 정책을 실행한 것, 그것에 일본 식민지 지배의 최대의 특징이 있었다.3) 마지막으로 탈식민화의 과정을 본다면 영국의 식민지 해방이 비록 2차대전 후의 변화한 국제 정세에 의해 어느 정도 강제된 것이기는 하지만 자발적 과정이었던 데 비해,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독립 후 영국의 이전 식민지들이 영연방을 구성하고 이들 지역에서 영어가 여전히 중심 언어로 사용되는 데 비해, 일본은 이전 식민지 지역에 그러한 유산을 남기지 못하였다. 한편 몇 가지 공통점도 발견된다. 가장 먼저 언급될 것이 제국 팽창의 동기로서 소위 문명화의 사명이다. 영국과 일본은 둘 다 문명의 척도를 사용하여 제국주의적 지배와 종속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두 나라 간에는 차이가 존재하는데 영제국 팽창의 큰 특징이 자신들의 제도를 전세계에 퍼뜨리려는 사명감이었다면, 일본의 경우에는 딱히나 내세울 자기 것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주도하에 서구화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열등한 인종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문명화의 근저에는 인종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인종주의는 제국주의적 팽창의 동기에도, 지배 이념에도 작용하였다. 특히 19세기 영국에서는 앵글로색슨 인종을 고양하고 타 인종을 멸시하는 인종주의가 극성을 부렸는데, 이러한 인종적 편견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 같은 백인이고 같은 국가 제도 내에 편재되어 있으면서 차별받아야 했던 아일랜드였다. 유사한 인종주의가 발견되는 일본의 경우에도 역시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조선4)이 가장 큰 희생자였다. 물론 일본의 인종차별의 과제는 더욱 어려웠다. 본국인과 식민지 주민들의 엄연한 인종적 유사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유사점과 차이점들을 본고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다. 본고는 따라서 인종주의가 제국 팽창의 동기와 식민정책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고자 한다. 인종주의는 영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에서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서양과 동양의 제국들을 비교하는 연구는 거의 없었으며, 더구나 동서양의 인종주의를 중심으로 한 비교연구는 행해진 바 없었다는 사실에서 본 연구의 작은 의미를 찾고자 한다. 2. 문명화의 사명과 인종주의 (1) 영제국의 팽창과 인종주의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 책 잉글랜드의 팽창이라는 책에서 실리 Seeley 교수는 영국이 ‘방심한 상태에서 제국을 얻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영제국의 확장이 중심부의 뚜렷한 의도로 일관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자유무역 제국주의(free trade imperialism)라는 개념 역시 영제국의 느슨한 동기를 지적하는 말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실리의 유명한 경구가 의미하는 바와는 달리 영국은 실상 제국의 팽창과 경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세기 팔머스턴 정부 하에서의 소위 ‘포함외교’는 영국의 이해관계를 세계적 차원에서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영국 정부는 명령하지 않은 점령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전쟁을 일으키거나 공격을 가한 책임자들을 사후에 소환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5) 그러나 대단히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충동에 의해 제국적 팽창에 동참하였기 때문에 이 다양성 가운데에서 어떤 의도된 기획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실리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교역, 땅, 관직, 지식, 모험 등에 대한 충동들이 제국 존속의 전기간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다.6) 모든 제국주의적 팽창에는 여러 동기가 혼재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경제적 동기로서, 영제국의 초기 팽창에서도 상업적 동기가 지배적이었고, 19세기 자유무역주의가 횡행하기 전에는 영국 정부도 상업적 동기에 의한 제국 팽창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도 애초에 상업을 목표로 한 동인도회사에 의해 개척되고 통치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19세기 중반이래 자유방임이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된 후에도 영국인들이 굳이 공식적 제국을 유지하고 확장할 필요가 있었는가이다. 자유무역 체제에서 모든 나라가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다는 가정을 영국인들이 믿었다면 제국이 없더라도, 즉 식민지들이 독립 국가이어도 여전히 영국과 교역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을 유지해야 할 경제적 이유가 무엇인가? 왜 굳이 통치 비용, 식민지 방어를 위한 비용을 부담하며 제국을 유지해야 했는가?7) 실상 19세기 중엽 미국 등의 독립 국가들은 영국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시장에의 접근을 허용하였다. 문제는 독립 국가의 경우 언제라도 제한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미국이 실제로 1861년부터 그런 정책을 택하였다. 그 때문에 자유무역의 시기에도 제국이 필요하였던 것이다.8) 그 외 영제국의 팽창에는 군사적 충동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이 식민지와의 교역에서 창출되었는데 이처럼 제국으로부터 얻는 부가 영국의 군사력과 해군력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명확하였다. 1870년 이후의 팽창에서는 이때 영국인들이 가지게 된 사회심리적 현상, 즉 빅토리아 중기의 번영 후에 찾아온 자신감의 상실이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였다. 독일 통일 제국의 수립으로 인해 영국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치에 대해 불안감이 고조되었을 뿐 아니라 산업의 쇠퇴, 후발산업국들의 경쟁으로 인한 무역수지의 적자 등으로 고심하게 되자 상인, 제조업자, 언론, 정치인 그리고 일반 대중 모두의 정서에 감지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1870년 이후의 신제국주의는 유럽 국가들의 경쟁이 아시아/아프리카에서 표출된 것이었다.9) 무엇보다도 영국의 제국적 팽창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 문명화의 사명이었다. 자신들의 정치제도, 특히 그들이 누리는 자유와 헌정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던 영국인들은 그 자부심에 촉발되어 ‘미개인들의 지도자,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게 된 것이다. 특히 앵글로색슨 인종은 이 세상 다른 모든 인종들과 구별되는 통치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신들뿐만 아니라 남들도 통치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서, 그 능력은 고대의 색슨인의 자유에서 연유하며, 자신들만이 자유와 정의를 최고의 효율성과 결부시킨 헌정적, 법적 체제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는 믿음이었다. 19/20세기 전환기 식민성 장관이던 죠셉 챔벌린은 영국 인종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배 인종으로 프랑스인들보다 프랑스를 더 잘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시기 인도 총독이던 커즌은 ‘세계사에서 영제국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었다. 이처럼 인류를 위해 유익한 기구는 없다’고 공언하였으며, 캐나다 수상 알렉산더 맥켄지(1873-78)는 영국의 우위가 이 세상 끝까지 지속될 것을 기원하였다. 그것은 ‘보편적 자유, 모든 타락한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10) 영제국은 동양적 전제로부터 아시아인들을 해방시키고, 야만적 습관으로부터 아프리카인들을 해방시키며, 국제적 공격으로부터 백인 정착민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웹 부부조차 영국은 ‘가장 훌륭한 스승이고 가장 완벽한 제국 건설자로 자부할 만하다’고 인정하였다.11) 외국인에 대한 영국인의 전형적 태도는 디킨즈의 작중인물인 포즈냅씨에 의해 대표될 수 있는데, 그는 한마디로 ‘영국 외의 나라들은 모두 잘못’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신감은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 우월감, 영국 해군의 우세, 사회적 균형과 국내적 안정, 그리고 강력한 종교적 추진력과 사명감 등에 근거하고 있었다.12) 영국인의 우월감은 무엇보다도 도덕적 우월감이었다. 1904년의 티벳 침략의 지도자였던 프란시스 영허즈번드 경의 다음과 같은 공언을 보자.
어떠한 유럽인도 비유럽인과 만났을 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비유럽인의 지적 수준이 어떤지를 떠나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즉각 느끼게 된다. 그리고 사실상 그렇다는 것이 입증된다. 우리가 인도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보다 머리가 더 좋거나 더 크거나 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그들보다 강하기 때문이다.13) 인도 총독 커즌 경도 영국은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덕적 힘에 의해 인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확신하였으며,14) 유력한 자유당 정치인 찰스 딜크 경은 영국의 법과 영국 정부의 원칙은 단순히 영국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의 존속은 인류 전체의 자유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념 하에서 세슬 로즈, 루가드 등 수많은 영국인들이 영국의 통치를 전세계로 확장하는 것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어떤 외국인들도 우리의 보호를 예절바르게 혹은 감사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영국인들은 불만스러워하였다. 그들은 이집트를 실정으로부터 구제해 주었고 부패로 찌든 정부로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구해냈는데, 그런데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만에 놀라게 된다. 우리가 준 것이 우리가 얻은 것보다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15) 이러한 ‘선하고 좋은’ 제국에 대한 담론의 기저에는 3장에서 상술할 영국인 특유의 인종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2) 일본의 팽창 동기와 문명의 개념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상황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서양과의 연관 속에서 형성, 추진된 현상이었으며, 시기적으로도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과 제국주의 시대가 맞아떨어졌다는 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19세기 후반 봉건체제를 청산하고 서양식의 근대 국가 형성을 시작한 일본에게 성공적인 근대국가의 표본은 영국, 프랑스 등 강력한 제국이었다. 제국주의는 일종의 세계관이 되었고 식민지를 소유하지 않은 국가는 결과적으로 부패하고 소멸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19세기 말부터 금세기에 걸치는 일본의 담론 공간은 식민제국의 이데올로기로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16) 이들에게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자연도태에 따른 국가간의 침략은 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우승열패는 자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류 사회에서도 일어나는데, 그 근저는 힘에 의한 것’이라고 이해되었다.17) 일본인들은 국민주의가 발달하면 필연적으로 제국주의가 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긍정적 제국주의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신제국주의는 이전의 로마제국이나 지나제국처럼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열국의 공존을 바탕으로 하며 국가 상호의 존재를 허용하기 때문에 ‘각국 특수의 문화를 발달시켜 상호 경쟁을 하게 하고, 人文進化의 이치와 법에도 어울린다’는 것이었다.18) 동시에 동아시아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중국이 이때 몰락하게 되자 그 공백을 상승하는 일본이 메우기가 쉬웠다는 사실도 중요하였다. 일본 자신도 서양제국주의의 희생자였다. 개국과 더불어 서양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 등 선진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한 일본은 스스로도 제국주의 국가로서 같은 침략에 참가하는 것만이 국운 신장의 유일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우리 일본의 제국주의는 열강의 촉진도발에 의한 것으로 자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속히 제국주의에 나서서 자립자존의 계획을 위하지 않는다면 하루도 평안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9) 따라서 일본제국의 문제는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세계의 구조 변화와, 그 구조 변화의 과정에서 일본이 동아시아의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지위를 확보하려고 하였는가, 또한 확보하였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즉 아편전쟁을 계기로 전통적인 아시아의 화이질서가 급속히 붕괴된 와중에서 동아시아의 ‘소중화’ 제국이고자 한 근대 일본의 국가로서의 존재 방법과도 관계되는 문제인 것이다.20) 그러나 스스로를 소중화제국이라고 자부하고 제국의 상속인이 되었지만, 식민지와 동일한 동아시아 문명권에 속하였다는 사실이 일본에게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19세기 중엽 개국과 더불어 요시다 쇼닌 등이 주장한 근린 침략론과 국방론의 결합이 후일 메이지신 정부의 대외정책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메이지 신정부의 과제 가운데 하나는 불안정한 극동 정세 가운데 일본의 국경을 확정함과 동시에 확실한 국방 전략을 세우는 것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外交政略論(1890)은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과 이익선을 방위하여 자기의 요충지를 잃지 않는 것이 곧 일본의 전략임을 명시하고, ‘우리 나라의 이익선의 초점은 바로 조선에 있다’는 지정학적 전략의 확립을 주창하였다.21) 일본의 국경 확정은 따라서 간단히 국경 확정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세계 제국의 문명권 내에 있는 일본이 어떻게 구래의 동아시아의 제국적 관계들을 계승하면서 유럽적인 근대 주권국가를 확립하는가라는 이중적 과제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 과제가 내포하는 자기 모순은 조선과의 국교 문제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다.22) 당시 조선은 아직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고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개국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계속되어 온 청나라의 약체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머지않아 강력한 보호자를 가지지 못한 조선이 구미 열강, 특히 러시아에게 정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일본 지도자들은 판단하였던 것이다. 물론 막부 말기 단계부터 주장되기 시작한 소위 征韓論에는 당시의 긴박한 정세와 더불어 그전부터 있었던 조선을 멸시하고 속국시하는 관념도 작용하였다.23)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은 처음부터 이율배반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한 아시아’라는 의식에 괴로워하면서 동시에 ‘아시아를 깔보는’ 우월감을 팽창시킴으로써 국가의 위세를 인접 아시아 국가에 심고자 했던 국책은 아시아에 대한 지정학적인 헤게모니의 확립으로 돌진해갔다.24) 후쿠자와 유기치로 대표되는 脫亞入歐論은 비서구 세계, 특히 오리엔트를 일종의 폐쇄된 무대로 조망하는 서구에 자신의 입지점을 접근시키려는 노력이었으며, ‘구태의연한 근린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일본을 구별하려는 자의식’이 강화되어 양극으로 분해되고 있었다. 이제 미개한 아시아의 전형인 중국적 가치와 학문 체계를 거부한 이들은 ‘중국’을 ‘지나’로 고쳐 부르고 동양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작업을 행하게 되었던 것이다.25) 일본은 지나나 그 속국으로 여겼던 조선에 대해 ‘완고, 고루, 편협한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었고,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는 아시아를 대신해서 그들을 대표해야 한다는 도착된 자부심으로 문명화의 사명감을 강화시켜 나아갔다. ‘미개한 아시아’와 달리 일본의 특색은 진보라고 주장되었다. 일본 동양사학의 창시자 시라토리는 아시아의 한구석, 그것도 동쪽 맨 끝에 있는 일본국이 ‘유독 광채를 내뿜으며 이처럼 융성해진 까닭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후 그 원인에 대해 일본은 세계의 모든 장점을 흡수하는 지위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즉 일본이 유교의 근본주의 중에서 ‘우리의 국체에 합치되지 않는 것은 교묘하게 피하면서 수용했던 것처럼 서양의 문화도 틀림없이 같은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일본은 동양의 일부이면서 동양문명의 정수를 모으고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혼합시켜 서양과 동일한 ‘진보=문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대만 정무총감을 지낸 고토 신페이는 ‘일본 민족의 동화력, 즉 정신적 정복력은 도저히 타민족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진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평하였다.26) 한마디로 선별적 모방인데, 중요한 점은 모방이 일본에서 더 나은 결과를 야기할 것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일본의 제국적 팽창 초기에는 서양에 대한 강한 흠모와 모방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지리적 위치로 보아 자신을 ‘동아시아의 영국’으로 인식한 이들은 유럽에서 영국이 행한 의무를 자신은 아시아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27) ‘일본도 그 위치상으로 볼 때 영국에 흡사한 국토’이므로 가까운 대륙 및 남양 방면의 유리한 곳으로 경제적 세력을 확장하고 특히 세계적으로 크게 그 상업적 세력을 신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8) 일본인들이 상정한 문명은 전적으로 서양 문명이었다. 서양 문명은 곧 인류가 가야 할 보편적 길이기 때문에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자기 분해도 아니었다. 서구와 일본의 차이는 문명의 발달 단계에서의 양적 차이에 불과하며, 노력하면 서구와 같은 문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29) 1910년대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인 웹 부부가 아시아 방문 중 일본의 가츠라 수상과 면담할 기회를 가졌을 때 가츠라는 끊임없이 ‘문명’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모든 서양적인 것은 문명이고 다른 종류의 일본식 문명은 없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 같았다’고 웹 부부는 관찰하고 있다.30) 자객이 던진 다이너마이트로 폭사할 뻔했던 오쿠보는 ‘낡은 도구인 칼이나 그런 물건이 아니라 진보적인 서양 발명품에 의해 부상당한 것이 기쁘다’고 말해 문병객들을 놀라게 했으며, 외상 이노우에 카오루는 1887년 노골적으로 ‘우리 제국을 유럽 스타일의 제국으로 변화시키자. 우리 국민을 유럽식의 국민으로 바꾸자. 동양의 바다 위에 새로운 유럽식의 제국을 건설하자’고 열변을 토하였다.31) 이것은 문화적 열등감의 적나라한 고백이었다. 물론 맹목적 서구화의 지향은 일본적 문화 정체성의 재확인이라는 반발 조류를 낳게 되어 맹목적 서구파들도 1895년경이 되면 일본의 전통과 과거를 자부하게 되지만 여전히 서양에 대한 흠모와 열등의식은 남아 있었다.32) 서양 문명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곧 서구화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 인종적 우열 개념을 낳았으며, 그것은 당시 전래된 사회적 다윈주의에 의해 심화되었던 것이다. 3. 지배 이념으로서의 인종주의 (1) 앵글로색슨주의와 인종적 태도 영제국의 식민정책에서 인종주의가 시종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초까지는 인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서 피지배인들에 대한 영국화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점차 인종주의에 입각한 차별주의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전성기의 유럽의 인종적 태도는 네 가지 기본 요소에 의거하고 있었다. 즉 인류의 동질성에 대한 믿음; 피부 색깔이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믿음; ‘고귀한 야만인’에 대한 낭만적 이상화; 마지막으로 비유럽 문명, 특히 중국과 인도 문명에 대한 존경심 등이 그것이다.33) 이처럼 인류 보편성을 믿었기 때문에 18세기 사람들은 자연에 어긋나는 모든 낡은 제한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하고 원주민 사회를 새롭게 만든다는 목표를 상정할 수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전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지가 발전하여 자치화하고 나아가서 민족들의 연방으로 진화할 것을 기대하였다. 19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인 매콜리는 1830년대 인도에 영국식 교육제도를 도입하면서 영국이 언젠가 인도인들에게 권력을 넘겨줄 날을 기대하였다.34)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안목은 19세기를 거쳐 사라져 버리고 비유럽인들을 깔보고 트집잡는 태도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영국인들은 ‘앵글로색슨주의(Anglo-Saxonism)’라고 부를 수 있는 독특한 인종 의식을 발달시켰는데, 앵글로색슨주의의 핵심은 앵글로색슨 인종이 자유와 정의와 효율을 합친 헌정 체제를 통해 그들 자신은 물론 남들도 통치할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믿음이었다. 이것은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색슨인의 자유에서 유래하는 앵글로색슨의 천재성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전될 수 없는 특별한 재능으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해 영국의 우월함은 교육이나 기후나 경제 같은 쉽게 정의될 수 있는 것들의 결과가 아니라 ‘영국 인종의 독특한 속성’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이었다.35) 19세기를 지나며 영국 인종이라는 용어가 더 자주 사용되었는데, 당시 인종이라는 개념은 요즘의 국민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36) 비유럽인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후반 사회적 다윈주의가 팽배하기 전에도 이미 이들과의 잦은 접촉, 산업화, 공리주의 등에 의해 변화하고 있었다. 우선 영국 자체의 물질적 발전의 속도가 빨라지고 그들과 비유럽 사회 사이의 갭을 인식하게 되면서 열등한 문화에 대한 비판과 멸시가 고조되었다. 특히 공리주의가 비유럽 인종에 대한 인식 변화에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공리주의를 인도 역사에 적용하여 파악한 제임스 밀의 영국 치하의 인도사(1817)는 인도 관리들의 필독서가 되었는데, 밀은 ‘효용이 정확히 얼마나 모든 노력의 목표인가의 정도에 따라 우리는 문명을 측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사회 조직에 있어서 효용이 얼마나 적용되고 있는가가 문명의 척도이며 이 척도에 따르면 힌두인은 문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37) 이처럼 문명의 정도에 따라 만들어진 사다리의 맨 위에는 앵글로색슨이 위치하였고 다음에 독일인이, 다음에 프랑스 등 라틴 국가들의 순으로 배치되었으며 훨씬 밑에 아시아, 아프리카 사회가 위치했다. 흥미롭게도 아일랜드도 이 마지막 그룹과 같은 위치에 놓여졌다. 영제국에서의 노예제폐지(1833) 후 인종적 태도가 급격하게 경직되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문필가 칼라일은 「깜둥이 문제에 대한 논의」("Occasional discourse on the nigger question")(1853)에서 해방노예들을 ‘자비로운 채찍’으로 일하도록 강제되어야하는 ‘게으른 두발 달린 짐승’이라고 표현하고는 ‘다음에는 말들이 해방될 것인가?’라고 비아냥거렸다.38) 특히 1857년 인도반란과 1865년의 자마이카 반란의 충격은 대단히 컸다. 이 사건들은 영국의 정책과 영국적 가치의 거부로 받아들여졌다. 문명화와 급격한 변화에 대한 기대감은 실망으로 바뀌고 이제 비유럽인들이 영국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가정이 의문시되었으며, 흑인은 정치적 권력을 갖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일종의 전제적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되었다. 게다가 당시 알려진 다른 발전 사항들, 즉 북미 인디안, 마오리 등 원주민들의 수가 급속히 줄고 멸종되기조차 한다는 사실은 이들이 생존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탓으로 해석되었다.39) 19세기 후반에는 앵글로색슨주의에 소위 과학적 인종주의가 가세해서 인종이 모든 것이 되었다. 물론 다윈 스스로는 자신이 발견한 법칙을 인간사회에 적용하기를 꺼렸지만 그의 종의 기원은 말할 것도 없이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다윈에게서 결정적 영향력을 받은 기독교 사회주의자 찰스 킹슬리에게 있어 인종은 인류 문화의 중요한 ‘하나의 영향력’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바뀌었다. 과학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었다. ‘보다 우월한 인종이 보다 열등한 인종을 멸종시키는 것. 혹은 그것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강제하는 것. 이것이 모든 생명체의 보편적 법칙이다’고 확신하게 된 킹즐리는 ‘다윈이 모든 곳에서 마치 홍수처럼 정복하고 있다. 진실과 사실만 가지고’라고 관찰하였다.40) 물론 인종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구분되기 전에도 인종주의적 태도와 증오감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제 인종은 더욱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고, 더욱 엄격하게 분류되었다. 인종은 현실로서 가정되었고 비유럽인들에게 느끼는 실망과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설명해주는 틀이 되었다. 영국 인종이 아니라 유대 인종 출신인 디즈렐리도 그의 소설 탠크리드에서 잉글랜드의 위대함은 ‘순전히 인종의 문제’이며, ‘모든 것이 인종이다. 다른 진리는 없다’라고 쓰고 있다.41) 두개골의 크기 측정 등 ‘사이비 과학적’인 가정에 의해 비백인에 대한 백인의 우월을 단정한 인종주의 이론서인 The Races of Men(1859)을 저술한 의사 녹스에 의하면 ‘문학, 과학, 예술 등, 한마디로 문명이 이것에 달려 있다.’ 인종적 태도의 경직화에는 정치인, 과학자, 인류학자들만이 아니라 선교사들, 여행가들의 영향력도 발견된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인을 단순히 동물로 취급하였는데, 이들은 ‘불평등한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며 유해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42) 그러나 ‘영국 인종(the English race)’이란 과연 무엇인가? 영국 인종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브리튼 섬의 원주민이던 켈트인, 앵글로-색슨인, 그리고 또 다른 침입자 노르만적 요소가 혼합되어 형성된 것이었으며, 이 사실은 매튜 아놀드 등에 의해 지적되었지만 편리하게 무시된 채 ‘영국 인종’에 대한 고양은 지속되었다. 앵글로색슨주의는 어떤 한 정파, 한 사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보수주의자에게서 가장 많이 발견되지만 찰스 딜크, 조셉 챔벌린 같은 급진주의자, 프리만 등의 자유주의자, 그리고 찰스 킹즐리, 제임스 안쏘니 프라우드 등의 지식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아주 특별한 영국적인, 그리고 빅토리아적인 인종중심주의를 대표하는 이 믿음은 정치적 불안정과 빈곤에 시달리는 세상의 다른 지역으로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정당화를 제공해 주었다.43) 어떤 인종들은 결코 문명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되었으며 비백인들은 자치나 사회적 발전에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니그로와 유럽인 사이에는 우리를 짐승과 구별해 주는 것과 같은 간격이 있다. 열등 인간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달라서 그들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다.’44) 아시아인들은 백인들이 같이 살 수 없는 ‘유해한 동물’이라고 규정지어졌으며 ‘동화보다는 없애버리는 것이 훨씬 쉽다. 교육은 경제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잔혹한 판정이 내려졌다.45) 1883년 인도 판사들로 하여금 인도 거주 영국인들을 재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일버트 법안이 큰 반발을 야기한 것도 이러한 인종주의적 태도가 표현된 전형적 사건이었다.46) ‘남성적’ 영국인에 대비되는 인도인들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는데, 남성다움에 대한 두개의 안티테제는 ‘여성다움’과 ‘어린아이 같음’이었다. 인도인은 ‘여성적’이고 ‘겁이 많으며 유약하다’고 규정되었으며 영국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강한 지도자로서 인종에 의해 지도자가 될 운명과 어린아이를 지도해야 할 가부장적 권위를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힌두교도들은 어린아이 같고 여성다운 두 가지 속성을 다 드러내는 데 반해 이슬람교도들은 어린아이지만 남성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이 힌두교도보다 문명의 정도가 높다고 판단하였다는 사실이다.47) 그렇지만 영국의 인종주의자조차 일본인들을 그들보다 하위에 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일본인들은 서양 문명을 성공적으로 수용한 유일한 동양인이기 때문이었다.48) 이렇게 해서 18세기식의 인류의 평등과 완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반전되어버렸다. 영제국 내에서 원주민들의 지성과 교육은 결코 인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교육받은 원주민들의 등장과 더불어 원주민들의 관직보유 비율은 줄어들었고, 한 아프리카 총독은 ‘교육받은 친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싶지 않다’고 자백하였다. 이제 교육을 통해 인도의 영국화를 시도하였던 매콜리의 정책은 완전히 버림받게 되었다. 인도에서 그의 정책은 불만에 찬 선동가들을 키운 것밖에 안 된다고 결론지어졌던 것이다.49) 아프리카의 골드코스트에서는 1890년대부터 아프리카인들이 중요한 직위로부터 배제되기 시작하였다. 관리에 대한 보다 높은 자격 제한과 훈련 계획 등이 세워졌고, 은퇴하거나 사망한 아프리카인 자리를 영국인들이 채웠다.50) 인종에 대한 담론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능력에 대한 담론과 연결되었다. 킹즐리는 ‘내가 보아 온 바에 의하면 인종간의 차이가 너무 커서 어떤 인종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켈트인들은 자치정부에 매우 부적합하며, 어떤 로마카톨릭 국가도 입헌정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언하였다.51) 녹스는 ‘색슨인으로서 나는 모든 왕정, 모든 군국주의 정부를 혐오하지만 켈트인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적합한 정부 형태인 것 같다’고 단정지었다.52) 인종적 태도는 곧바로 식민지 경영에 반영되었는데, 영제국에서 자치정부를 허락받은 곳은 캐나다, 오스트렐리아, 뉴질란드 등 백인들의 정착식민지뿐이었다. 반면 주민 대부분이 비유럽인으로 이루어진 왕실직할 식민지는 영국왕의 권위에 직접적으로 종속되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인종주의에 근거한 정책의 차이였다. 식민 문제, ‘아일랜드 문제(the Irish Question)’, 그리고 자치 문제가 한데 어우러져 있던 영제국의 골칫거리 아일랜드에서 영국인들의 인종적 편견이 지배 정책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가가 가장 잘 드러난다. 왜 영국의 식자층 가운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일랜드에 자치정부를 허용하는 것에 그처럼 반대하였는가의 문제는 결국 앵글로색슨주의와 그것이 내포하는 신념, 즉 아일랜드인은 인종에 있어 앵글로색슨인과 다른 사람들이고 문화에 있어 열등하다는 확신으로 귀결된다. 이는 물론 튜더 시대로 소급되는 침략과 약탈의 역사에서 그 기원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17세기 이래 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등 주변부에 대한 잉글랜드의 정치적, 군사적 통제에는 노르만-앵글로색슨 문화가 켈트 문화보다 본래부터 우월하다는 인종적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었다.53)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빅토리아 시대에 점차로 유행하게 된 인종과 국민성에 대한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물론 인종 이외에도 아일랜드인의 종교인 카톨릭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계급적 편견 등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앵글로색슨인의 인종적 우월감은 1829년 카톨릭 해방을 기점으로 한 공격적 신교주의, 그리고 오코넬로부터 시작되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의 강화와 더불어 점차 증가하였다. 1811년 한 의원은 의회에서 ‘나는 중국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톨릭에게도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였다.54) 최근 로이 포스터 역시 단순한 인종적 편견의 일반화를 거부하고 인종보다는 계급과 종교가 아일랜드에 대한 편견에서 더욱 중요한 요소였다고 주장하였다.55) 그렇지만 종교와 계급적 편견이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고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한 요소였다면, 그처럼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인 인종주의라는 사조가 그처럼 급격하게 그리고 감정적으로 중요하게 빅토리아인들을 휘어잡았다는 사실은 시대적 특수성과 인종주의의 중요성을 반영한다 하겠다. 19세기 말 영국 정계를 뒤흔들었던 아일랜드 자치법을 둘러싼 아일랜드 문제는 결국 이러한 잉글랜드인들의 인종 의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미개하고 뒤떨어진 인종이라는 아일랜드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화는 자치 문제가 걸려있는 정치적 場에 직접적 영향을 미쳐, 아일랜드인들은 자치에 적합하지 못하며 스스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배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의 자치의 부적합성, 경제적 무능, 지적 능력의 결핍, 과학적인 것에 대한 둔감함 등에 대한 언급은 무수히 많이 발견된다.56) 칼라일은 아일랜드인의 성격을 ‘차분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이며, 비참한 놀림감’으로 규정하였고, 켈트족은 열등하고 어린아이 같으며 ‘이 거칠고, 무분별하고, 게으르고, 불확실하고, 미신을 잘 믿는 인종은 잉글랜드적 성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롭고 비옥한 제도를 증오한다’고 주장되었다.57) 켈트인은 난폭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고도로 중앙집권화되거나 권위주의적 제도를 필요하며 무식하고 경험이 없고 불안정한 아일랜드인의 손에서 앵글로색슨의 자유는 무정부와 내란이나 혹은 로마카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의 독재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에 자치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58) 빅토리아인들은 아일랜드와 중국인, 호텐토트인, 마오리 등 야만인들을 모멸적으로 비교하였다. 1886년 아일랜드 자치 문제가 의회에서 토의되었을 때 보수당 당수 솔즈베리 경은 아일랜드인들을 호텐토트인과 비유하였는데, 솔즈베리는 나아가 동양인과 러시아인들도 자치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배제하고 단지 튜톤종만이 자치에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59) 1860년대부터 영국 만화에서는 평범한 아일랜드인을 표현하는 패디(Paddy)가 원숭이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원숭이(apes)의 반대 이미지는 천사(angels)였다. 잉글랜드인들은 에인젤, 앵글, 앵글로색슨 등의 말장난을 하면서 자신들을 천사에 비유하였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만화에서 패디는 어리석고 비합리적이지만 깨끗하게 수염을 깎고 날카로운 이빨도 없는 것으로 그려졌으며, 정치나 민족적 문제에는 무관심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존 불(John Bull)과 브리타니아(Britannia)는 패디를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였고 만화가들은 그를 온전한 인간으로 대우하였다.60) 그러던 것이 1860년대 피니언주의가 발생하고 자치 문제가 본격화하면서 원숭이에 비유하는 경향이 강해졌던 것이다. 찰스 킹즐리는 1860년 아일랜드를 여행한 후 이 끔찍한 나라에 널려있는 자신과 마찬가지 피부 색깔을 가진 ‘하얀 침팬지들’을 보고 경악하였다.61) 앵글로색슨과 켈트인들간의 차이는 너무나 확실하게 보였으며 대부분의 상류 및 중간계급 영국인들에게 소위 ‘켈트 변두리’라는 말은 지리적 표현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였다. 영국인의 눈에 아일랜드인은 ‘하얀 깜둥이’였다.62) 앵글로색슨주의의 신화와 선전은 1860-9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영국의 힘과 영향력이 절정에 도달한 시기인 이때 잉글랜드 국민의 인종적, 문화적 성취를 다른 인종과 다른 문화의 실패라는 관점에서 측정하려는 시도가 활발하였던 것이다. 물론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류계급의 속물 근성에서 켈트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을 찾은 문필가 매튜 아놀드는 이러한 적대감과 의혹을 한탄하고 켈트적, 게르만적, 노르만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잉글랜드인에 구현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영국민의 혼합된 유산에서 나오는 새로운 통일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63) 1895년에 윌리엄 배빙턴은 국민성에 적용되는 인종론의 오류라는 책에서 잉글랜드 인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를 통해 그 땅에 몰려들어온 사람들의 혼합을 무시한 것으로 본래부터 켈트적, 혹은 잉글랜드적인 미덕이나 결함은 없다고 지적하고, 문화들간의 차이는 사회적, 환경적 영향에서 결과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19세기 말 서아프리카를 탐험한 메리 킹즐리도 아프리카인들을 끔직한 미개인이나 어리석은 어린애로 보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인종적, 문화적 차이를 인정할 것을 주장하였다.64) 보어전쟁을 겪고 난 후 1880-90년대의 팽창적 제국주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약해지자 앵글로-색슨 인종에 대한 맹목적 고양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키플링조차 국민적 교만함이 야기할 위험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영국 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예찬은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절대적이기보다 상대적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65) 인종적 편견은 그 표적이 된 아일랜드인보다 잉글랜드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아일랜드는 영국인들의 굴절된 이미지가 투영된 전형적 케이스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아일랜드 인종이라는 개념이 언급될 때는 언제나 영국 인종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반드시 영국 인종에 대비되는 변증법적 개념으로서 논의되어졌던 것이다. ‘담론은 他者에 대해서보다 자기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는 사이드나 그외 학자들의 지적대로 잉글랜드인들이 켈트족의 특성이라고 규정지은 것들은 영국 국민성에 대한 변증법적 안티테제의 상이었다.66) 결국 아일랜드 문제는 본질적으로 영국 문제였으며, 아일랜드인의 왜곡된 이미지는 바로 문명화와 신사적 행동 규범이 야기한 영국인들의 좌절이 만들어낸 희생양이었던 것이다.67) (2) 일본의 인종주의와 동화정책
반세기에 지나지 않은 짧은 역사지만 일본제국의 지배 정책은 제국 형성 초기부터 1920년대까지의 전반기와 그후 제국의 몰락까지를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반기는 서양을 모방하려는 의지가 강한 시기였던 반면, 후반기는 동아시아를 서양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소위 대아시아공영권이라는 개념으로 서양 제국주의를 배척한 시기였다. 혹카이도의 식민화가 1873년부터 진행됨에 따라 식민주의(colonialism)와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식민화(colonization)의 경험이 시작되었지만 1895년 대만 영유에 이르러서도 식민지배에 대한 일관된 원칙이 없었다. 이것은 서양에서도 제국주의에 대한 원칙이나 이론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제국주의, 이민, 식민화 등의 개념이 구분 없이 혼용되었다.68) 전반기인 1895-1920년에는 점차 아이디어 및 형식에 있어서 유럽 식민주의와의 동일시가 진행되었다. 이때 나타난 식민지 문제에 관한 전문가 집단의 주장은 당시 유럽 식민정책이론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특히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개념이 두드러졌다. 도쿠토미 소호 등은 ‘마치 로마인들이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했던 것처럼’ 일본의 정치 조직을 동아시아 다른 지역과 남태평양까지 확대시켜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사명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문명화는 서양을 모델로 하는 아시아의 근대화라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고, 서양 제국주의의 구축을 주장한 1930년대의 범아시아주의와는 구별되는 것이었다.69) 일본 식민사상에 있어서 처음부터 일관되게 발견되는 한 가지는 인종적 이데올로기였다. 일본의 인종주의는 서양으로부터 사회적 다윈주의가 도입되기 전부터 잠재해 있었다. 일본 사회 내에서 사회 관계를 정의하는 데 혈연(blood)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을 생각할 때 일본인들에게는 혈연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당연한 경향이었던 것이다. 분석적 카테고리로서의 인종이라는 개념은 메이지 초기에 일본에 소개되었는데 19세기 말에 이르면 과학적 이해의 수단이라는 것으로 포장되어서 인종은 일본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측정할 때 쓰이는 표준자가 되었다.70) 그리고 그것은 당시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19세기 말 유럽으로부터 다윈주의와 생물학적 인류학이 도입되자 피식민지인들의 생물학적 열등성에 대한 이론이 1905-1920년간의 일본 식민사상에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71) 오쿠보를 회장으로 1908년 시작된 大日本文明協會는 ‘구미 최근의 저서 가운데 가장 건전하게 우리 나라에 추천하기에 적당한 것을 선택하여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 위한 모임으로 지식층의 대부분을 포함한 회원이 5천명에 달한 큰 조직이었다. 이 협회가 프랑스의 인종주의자 르봉의 민족발전의 심리를 1910년에 번역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72) 인종론은 이때 가장 선구적 서양 이론으로서 인식되었다. 서양의 압도적 힘과 지식 체계에 억눌린 일본인들은 서양에 대비한 자신들의 인종적 열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경대학의 초창기 철학교수였던 이노우에 데츠지로는 스펜서의 이론을 받아들여 일본은 서양의 우월한 인종들과 경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일본인들은 ‘지력, 금융상의 능력, 체력, 그리고 다른 모든 면에서 서양 사람들에게 뒤떨어진다.’ 서양인의 두개골 모양이 그들의 우월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73) 그러나 곧바로 생리학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다른 종류의 인종론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각 종족의 근대화의 능력을 평가 기준으로 하는 인종론이었다. 이러한 인종론에 근거해서 일본인들은 이 세상을 ‘문명권’과 ‘비문명권’으로 나누어 자기들을 인접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분리하는 문화적 계서제를 만들어내었다. 문제는 영국과 달리 일본은 자신과 종속민과 사이에서 피부색은 물론 인종적 차이와 문명의 차이를 크게 강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의 과거, 문화, 그리고 인종적 유산의 공유를 알고 있었고,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74) ‘원래 내지인과 조선인은 동일 민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선조가 같다’거나 ‘우리 일본인의 많은 수가 조선에서 이주해 온 것’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히 인정되었던 것이다.75) 물론 일본을 다른 아시아 근린국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매우 이상한 인종론도 제기되었다. 타구치 유키치와 다케고시 요사부로 같은 문명과 계몽의 선전가들은 일본인들이 서양 문명의 요소들을 너무나 쉽고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곧 ‘일본인이 아리안족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는 억지를 폈다. 일본인들은 중국인이나 다른 아시아인들에 비해 ‘지적으로 너무나 뛰어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유럽인이나 미국인들과 관련 있는 게 틀림없다’는 주장이었다.76) 시라토리 같은 국수주의 학자들도 일본이 아시아 대륙에서 ‘인종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역사상으로도 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비할 바 없어서 지나나 인도, 이집트 등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며 일본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분리시키려 노력하였다.77) 그러나 조선인과 일본인이 얼핏보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의 외양이 비슷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외양상의 유사함을 넘어서는 차이를 발견해야 하였다. 영국인들이 ‘하얀 검둥이’ ‘하얀 침팬지’의 이미지로서의 아일랜드인을 만들어 내었듯이 일본인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청해 보이고, 입은 열려있고 눈에는 총기가 없으며 무언가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조선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옷을 잘 입은 아이누’, ‘두발로 서서 걷는 원숭이’라고 비하해서 불렀으며,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르고, 무지하고 비위생적이고, 냄새나고, 심한 육체노동에는 적합하지만 복잡한 과제를 행할 능력은 없으며, 복종적이고, 따라서 어린애로 다루어져야 하는’ 열등 인간이었다. 역사적으로 조선인은 ‘글러먹은 민족’이고 ‘놀기 좋아하고, 게으름이 습속이 되어 있고, 혐오스런 풍속습관을 가진 민족’으로 진단되었다.78) 그렇게 가깝고도 비슷한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이 그렇게 멀고도 다를 수가 있을까의 또 다른 해답은 조선인들이 그 동안 잘못 통치되어 왔다는 것에서 찾아졌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근대성을 기준으로 한 비대칭적 비교를 통해 조선의 후진성을 확인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선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조선인이 덜 ‘문명화’되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제도와 관습을 고치고 혹은 일본의 정치적 통제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문명화의 사명에는 무엇보다도 일본의 지배가 영제국처럼 좋은 정부를 제공한다는 구실이 사용되었다. 조선 사람은 아프리카 노예나 인도의 최하위 천민처럼 억압에 대해 저항할 방법이 없으며 어떠한 공적 생활의 경험도 없기 때문에 조선인에게는 공적 정신 혹은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무력한 조선인의 이미지를 이용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조선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경멸을 표현하지 않고 조선인은 일본인에 비해 열등하지 않으며 육체적, 정신적 능력에서 중국인보다 못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문제는 국익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엘리트의 부패와 후진성에 있기 때문에 급선무는 이들의 부패와 후진성을 싹쓸이하는 것이라고 공언하였다.79) 이러한 공적인 발언과는 달리 그는 사적으로는 조선인에 대해 매우 권위주의적이었고 멸시감을 가지고 대하였다. 그는 야마토 인종이 인류 보편적 흥망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으며 다른 민족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을 무시하면 우리 나라의 멸망은 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정당한 권리를 가진 다른 민족’은 서양에 국한되었다. 그는 서양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였지만 조선과 같은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교활함을 보였다.80) 인종적 유사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종속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식민지배를 정당화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는 ‘공동사회’의 건설을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결합될 사람의 차이점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을 낳았고, 특유의 동화정책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다. 흔히 일본의 동화정책은 프랑스제국의 동화정책을 따른 것으로 이해되지만 일본의 동화정책은 프랑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동양적 색채를 강하게 띄고 있었다. 원래 동화주의의 배경에는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배경인 자연법사상과 계몽주의의 인간관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이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일보편의 진리나 자연법을 감지할 수 있으며, 유일보편의 자연법의 기본에서 만인은 평등하며 사람들간의 격차는 탄생이 아니라 교육과 환경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고였다. 이런 가운데서 계몽주의가 나타났고 이 사상에서 혁명과 인권선언만이 아니라 동화주의도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식 동화주의와는 구분되는 일본제국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양상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 同文同種, 즉 식민본국과 식민지가 함께 중국문화권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로 천황의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평등한 은혜를 받음을 뜻하는 一視同仁이라는 개념이고, 세 번째는 천황을 일본 민족 및 국가의 우두머리로서 동화의 이념에 결부시킨 것, 즉 민족 전체가 천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발달시킨 점이었다. 황족은 상상된 공동체의 우두머리 가족으로서, 그리고 사회적 윤리의 근원으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마지막으로 일본인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외국인이나 외래사상을 동화시키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는 확신이 동화주의의 기저에 흐르고 있었다.81) 그들은 일본 민족이 단일민족이라 아니라 여러 인종들이 혼합되었음을 인정하고, 자신들에게는 동화와 융합을 통해 천황에 충성하는 하나의 민족을 만들어 내는 재능이 있다고 믿었으며, 일본 역사를 통해 여러 인종들의 동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일본 특유의 국체라고 주장하였다.82) 동화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문제는 어떤 속도로 진행하는가일 뿐이라고 주장되었다. 급격한 동화정책을 옹호한 자들은 문명화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언어를 말살하고 급속하게 일본적 가치와 제도를 강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오야기 추나타로는 조선인들은 성질과 경험에 있어서 근대적 문명의 복잡함에 준비되어 있지 않고,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에 인종적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강제적 동화만이 조선인들의 문화 수준을 일본의 그것에 맞도록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합병은 조선인의 ‘도덕적 전락’과 물질적 탐욕을 일본의 ‘정신적 자질’로 대체할 수 있게 해주는 ‘구제 활동’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의 문화와 언어를 말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이라는 ‘쌍둥이 죄악’을 부추길 뿐이라는 것이었다.83) 물론 동화정책에 대한 반대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모두에게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은 한발자국 더 나가면 민족자결론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비판은 여러 민족의 평등과 존중을 전제로 하는 민족자결의 이념과는 질적으로 다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으니, 그 요소는 인종주의였다. 1911년 日本及日本人에 「비동화정책론」 등 몇 개의 동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였다. 이들 비판은 원래 동화주의가 프랑스혁명사상, 루소의 평등설에서 발생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식민지인들의 지식의 정도가 낮기 때문에 내지법은 연장될 수 없다’든가, 열등한 인종은 교육에 의해 변할 수 없다는 ‘냉정한 르봉씨의 명설에 따라 차별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84) 1911년 대만 총독부 고급 관료인 도오고 미노루가 「비동화론」이라는 평론을 발표하였다. 삿포로 농과대학에서 농정학을 전공하고 대만 식민정부의 관리가 된 도오고는 서양 이론을 대폭 적용하여 식민 문제에 대해 여러 저술을 남겼다. 베를린대학에서 식민정책학을 배운 경험이 있어 독일 영유의 폴란드계 주민들에 대한 동화정책의 실패를 알고 있던 도오고는 알제리아와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 동화정책을 실패로 보았고, 인도에서 영국이 자초한 반란과 무질서도 인도 엘리트에게 서구식 교육을 시키고 거의 무제한한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였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식민지에서는 ‘원주민 사회에서 가장 적합한 종류 및 정도’의 교육만을 실시하고 전통적 관습을 존중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높이는 ‘모국인 및 土人 간의 공생주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85) 비록 공생주의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도오고의 동화주의 비판은 확실하게 식민지에 대해 인종주의적 태도의 반영이었다. 1925년 출간된 식민정책과 민족심리에는 르봉의 강한 영향뿐만 아니라 다윈, 스펜서는 물론 많은 철학자, 인종사상가들이 인용되어 있다. 르봉의 주장인 혼혈의 기피, 유전에 근거한 민족심리의 불가변성, 인류평등설의 오류, 식민지에서의 고등교육 유해론 등을 열거한 그는 이민족 간에 어느 정도의 풍습과 사고의 전이가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쟝 타르드의 말을 따랐다. 따라서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연장이 아니라 분리되어야 하고 식민지로서 지배되어야 하며 ‘절대로 동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86) 자유주의자 가운데에서도 동화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일본 식민정책학을 학문으로 수립한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크리스찬으로서, 그리고 대만 주재 식민관리로서 자신의 기독교 정신과 식민지 경험을 바탕으로 동화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동화주의는 ‘800년의 장기간을 요하는 비현실적 정책’이라는 말로 식민지 주민과 식민지 사회의 본국화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강조한 그는 조선 인종이 일본 인종과 더 많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에서 동화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또한 식민지 주민에게만 동화를 강제하지 말고, 본국인도 원주민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일본은 식민의 성공이 ‘자비로 간을 맞춘 정의(justice seasoned with mercy)’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87) 그는 대만의 원주민들을 총독부가 토벌하려는 것에 반대하고 아이누의 보호를 주장하는 등 인도적, 박애주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지만 ‘식민은 문명의 전파’라는 주장에서 제국주의적 사명에 대한 그의 신념을 볼 수 있으며, ‘인종간의 우열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열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그의 말에서 르봉이나 라이슈의 인종주의 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니토베의 사상에도 일본민족우월론이 발견된다. 일본인은 정치적 재능과 사람들을 통제하는 능력에 있어 뛰어나다는 것인데, 이러한 인종차별론은 식민지민족의 정치적 독립권, 민족자결권을 전적으로 부정하게 만들었다. ‘식민통치자들은 자부심을 지켜야한다. 단순히 원주민에게 친절한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미개인들은 공포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그의 주장 역시 마치 영국의 권위주의적 제국주의자였던 커즌이나 크로머가 할 법한 말이었다.88) 니토베보다 더욱 확고한 자유주의적 기반에서 동화정책을 반대한 사람이 동경제국대학에서 니토베의 후임으로 식민정책학을 가르친 야나이하라였다. 인종의 우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식민정책학자가 야나이하라였다. ‘양복을 입고, 영어를 말하고 영문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인도인이 영국인이 되지는 않았다’는 말로 동화정책의 한계를 지적한 그는 프랑스와 일본이 다같이 중앙집권적 관료/군대 국가로서 과거 절대군주적 전통을 많이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이 식민정책에 있어서 군사적 및 동화적 특색을 나타내게 된 사회적 기초임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89) 동화주의 식민지 통치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리고 교육적으로도 전부 본국적이고 본국 중심’이며 ‘본국 정부의 强固, 본국 자본의 이윤, 본국 언어의 보급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그는 동화정책이 원래 식민지인에 대해 경제적, 사회적 동화를 요구하는 동시에 정치적 권리의 동화를 거부하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90) 동시에 그는 식민지로부터 본국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프랑스식 제도에 반대해서 식민지의회의 설치를 제의하였는데, 그의 모델은 영제국 본국과 자치령의 제휴협동이었다.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영구히 지배, 착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는 민족주의의 필연적 승리를 믿었다. ‘조선에 가보라, 길가의 돌조차 자유를 부르짖고 있다.’91) 그렇지만 야나이하라조차 한민족의 완전 독립을 상정하지는 않았으며 평화적인 한 식민지영유와 분할을 찬성하였다는 한계를 보였다. 그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민족이 최대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해방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자치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92) 그 역시 인종의 우열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내심으로는 문명의 차이를 믿고 있었다. 그는 자치를 허용한다해도 조선이 반드시 독립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선의 자주적 존재를 인정한다면 조선은 ‘일본에 대한 반항할 심리적 이유를 잃게’ 되며 따라서 ‘경제적 군사적 이해관계의 공통은 그 결합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93) 식민정책론을 연구한 학자 및 정책결정자들만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를 방문한 일반인에게도 동화정책의 어려움은 쉽게 인식되었다. 한 평자는 ‘이민족의 통치에 하등의 경험도 없는’ 일본으로서는 조선이나 대만의 통치를 혹카이도나 오끼나와의 개척이던가 아이누의 지배와 같은 식으로 간단하게 생각한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인정하고, 그러나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 민족을 동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성급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내지연장주의에 이르러서는 ‘대담, 무모하다고까지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의견을 피력하였다. 3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1천 7백만 명의 민족을 동화시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94) 특히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의 모범으로 존경한 영국이 아일랜드에서 겪는 어려움은 일본인들에게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해주었다. 영국의 ‘아일랜드에 대한 700년의 내지연장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동화주의, 내지연장주의는 도저히 조선, 대만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던 것이다. 동화는 저급한 식민지인들로 하여금 당국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여 그들을 불행하게 하고 원성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에 각 민족의 민도에 상응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95) 특히 풍속습관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동화정책을 주장하면 원주민의 반감을 도발하기 쉽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여기서는 영국의 인도에서의 통치 방법 즉, 풍속습관에는 하등 간섭하지 않으면서 ‘그 정치경제생활에 있어서 요점을 확실히 장악하는’ 등 ‘큰 문제는 장악하면서 작은 부분은 인도인 동지의 협력에 의해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점’이 더 교묘한 식민정책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96) 동화정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진정한 융합의 필요성을 상정하였지만,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는 그러한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환경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동화정책은 실제로 일본과의 이념적, 문화적 동화와 현지의 오랜 습관의 존중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이념의 조절에 있어서 심각한 내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시행착오 끝에 일본이 채택한 길은 영국식도, 프랑스식도 아닌 애매모호한 타협의 길이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각지 주민들과 일본과의 문화적 통합이 달성되지 않자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의 제국의 통합을 강조하고 실현하고자 한 점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식민지에 확장하려는 의지는 결코 없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독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는 수상 하라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소위 다이쇼 민주주의 시기에도 그러하였다. 그 결과 단지 물질적 동화, 즉 일본 음식을 먹고 일본말을 하고, 일본식 집에서 살고, 일본식 옷을 입는 등의 기계적 수준에서 동화가 멈추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계적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식민주의에 대한 일본인들의 이율배반적 태도, 즉 동화를 주장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동화를 믿지 않고 식민지인과의 차별성을 강조한 인종주의 때문이었다. 난폭한 인종차별의 실상과 동화정책의 허구성은 일본인들의 눈에도 명백하였다. 동경제대 법학교수이면서 자유주의자인 요시노 사쿠조는 조선 방문 후 일본인과 조선인의 인종적, 문화적 유사성을 얘기하는 데라우치 행정부의 ‘분별없는 레토릭’과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바라보는 ‘인종적, 문화적 모멸감’ 간의 차이를 간파하였다. 요시노가 보기에 비교적 진보되어 있고 독특한 문화를 가진 조선인 같은 사람들을 동화하는 것은 어쨌든 어려운 일이었다.97) 소에지마 백작도 ‘中古 처음에는 문화를 우리 나라에 수입한 것이 조선인이고 내지인 가운데에는 지나인 및 조선인의 자손이 매우 많다’며 ‘우리 나라가 근대에 一躍하여 강국의 판도에 든 것에 자만하여 동포인 조선인 및 同文同種인 지나인들을 멸시하는 것과 같은 일은 일본의 天職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조선인들에 대한 멸시를 경고하였다.98) 日本及日本人의 한 평자도 ‘조선인 가운데에는 열등한 천민도 있지만 고상한 선비도 있어 그들을 일률적으로 여보, 이누마 등 비속어로 부르는 것은 난폭한 짓’이라고 한탄한 후, 일본인은 식민적 능력이 없는 국민이라고 자평하였다. ‘동화는 정치가의 일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교육가, 종교가 등등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충고였다.99) 그러나 식민지 정부는 일본인과 식민지인들의 결혼을 방해하고 위축시켰으며, 식민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우월감을 지닌 채 그들만의 고립된 사회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고집하였다. 일본은 서양 국가들과는 달리 결코 식민지인들로 구성된 분리된 병력을 편성하지 않았는데 2차대전 중에 대만인과 조선인들이 징병되었지만 주로 노무부대에 편입되었고 별도의 전투 단위를 구성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100) 1930년대 보다 혹독한 재무장과 착취 및 획일화와 더불어 동화의 개념은 대동아공영권과 동일시되어 아시아인들의 인종적 조화와 통합이 어떠한 서양제국주의의 문명화의 사명보다도 고귀한 것으로 주장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에서 그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 조선민의 언어는 물론 이름까지도 말살하려는, 그레고리 헨더슨이 ‘식민적 전체주의’라고 표현한 형태로 나타났다.101) 이제 동화주의는 부족한 정책으로 비판되었다. 대동아전쟁 중 永雄策郞은 세계식민정책을 종속주의, 동화주의, 자치주의로 분류하고 일본의 식민정책은 그 중 어느 것도 아닌 ‘一視同仁主義’라고 주장하였다. 종속주의는 노골적인 착취이며, 동화주의는 ‘가면 쓴 종속주의’에 다름 아니고, 자치주의는 식민지의 성숙을 방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기존의 세계식민정책들을 모두 비난한 그는 일본의 일시동인이야말로 ‘진정한 인류애적 식민통치’라고 자화자찬하였다. 일본제국은 지역적으로, 인종적으로 볼 때 ‘어디까지나 운명공동체’이며, 공영권 내의 각 주민이 고락을 함께 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협력하는 일시동인주의가 일본식민정책의 근본이라는 것이었다.102) ‘운명공동체’의 의미는 전쟁에의 강제징병으로 구체화되었다. 황당하게도 그는 조선에 이미 징병령이 적용되고 있는 것은 구미제국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근세적 식민운동에 있어 전례 없는 일’로서, ‘조선은 이미 일본 본국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103) 4. 맺는 말 영국이 식민지로 삼은 곳은 대체로 제국주의 본국과 비교해서 문화 수준과 경제발전이 현저하게 뒤떨어진 원격지인 반면 일본은 역사적으로도 거의 같은 문화권에 속한 인접 지역에서부터 팽창하였는데, 그 사실이 일제의 부담이 되었다. 영국인들이 문명의 차이를 근거로 만들어낸 종속민의 이미지가 본국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을 정책을 식민지에서 실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면, 조선인과의 인종적, 문화적 유사성을 잘 알고 있던 일본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인종적 유사성을 인정하면서 종속적 차별을 실시하는 정책이 필요하였다. 식민지인의 정체성을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 내용과 목적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된다. 공정한 체제 가운데서도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성격과 가치관을 그렇게 단기간에 변화시키려는 생각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일본제국에서처럼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근본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는 강조하면서 권리는 인정받지 못한 곳에서의 ‘황민화’정책은 언어도단이었던 것이다.104) 1930년대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더욱 착취하기 시작하면서 본토에 가깝고 동심원적 지배의 안쪽에 위치한 조선 등의 직할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지배의 바깥 원이 확대됨에 따라 강화되어 구시대 제국주의적 지배의 성격이 더욱 강하게 되었다. 지배의 이러한 복합 구조는 영제국 하에서 식민지의 확대와 함께 구래의 식민지가 자치령화, 준자치령화하면서 점차 자립성을 가지게 된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경우에는 식민지권의 확대에 따라 구래의 억압 체제가 더 한층 강화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105) 서양에서도 식민지는 근본적으로 식민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에는 비록 오도된 것이기는 하나 종교가 뒷받침한 강한 사명감이 식민정책의 기저에 흐르고 있었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사고에는 서로 반대되는 그러면서도 영원히 공존하는 두 개의 흐름 즉, ‘강력하면서도 선하고 싶은 욕구(the desire to be powerful and good)’가 공존하고 있었다.106) 권위주의적 제국주의자의 전형인 나이지리아의 고등판무관 루가드를 보더라도 신에 대한 대단히 강한 경외심이 그의 생애를 사로잡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인들에 대한 의무감을 포함하는 식민주의 윤리(ethos)를 결코 발달시키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제국 초기에는 이념상으로는 적어도 미약하나마 식민지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경제적 이윤과 식민의 성공과 실패를 대차대조표의 원칙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지배적 관심이 되었다.107) 일본 제국주의를 관찰한 서양인의 눈에 도덕적 요인의 결여는 명백하였다. 식민지의 영국인 관리가 ‘공복 公僕이라는 개념의 이상형’이라면 일본제국 관리에게는 개인적인 동정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108) 타자로서의 아일랜드, 타자로서의 조선인은 결국 영국인의 정체성과 일본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각각의 방법이었다. 우월하고 열등한 국민 사이에 내재하는 차이에 대한 가정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던 영국과 일본의 식민정책은 종속민에게 종속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인종적으로 결정된 잠재력에 상응하는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두 제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종주의의 요소를 보더라도 영국인의 인종적 편견이 자신만만한 영국인의 정체성의 확인으로부터 발생하였다면, 일본인의 인종주의는 다른 동아시아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도 미개한 아시아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정체성의 혼란에서 야기된 것이고,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이 인종주의를 더 심화시켰던 것이다.
출처:홍익대학교 영국연구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