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8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루카 1,26-38
혼자 있는 것도 죄고 혼자 있게 하는 것도 죄다
오늘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인사합니다.
성모님은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 함께 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죄를 짓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치 않아서
숨었습니다.
이것 자체가 죄입니다. 인간은 혼자 있을 수도 없는데 혼자 있겠다고 합니다.
빛을 떠나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은 어둠과 있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혼자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혼자 사는 분들은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머물기 위해
혼자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일까요? 99%는 부모나 배우자, 혹은 형제입니다.
만약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자아’나 사탄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정신이 이상하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섬에서 혼자 사는 바다 자연인’이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이 주인공은 섬에서 혼자 살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은 사업 실패로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섬으로 와서 혼자 사는데, 동생까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치료하고 동생을 공기 좋은 자신이 사는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음식 탓인지, 병원이 없는 탓인지 좋아지는 것 같다가 치료도 못 해보고 죽었습니다.
이에 동생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섬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실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동생과 함께 있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동생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 혼자 있고 싶은 것이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그 삶에 만족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혼자는 행복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점점 어둠과 가까워집니다.
여성이 혼자 살겠다고 결정했지만, 실제로는 마귀와 함께 사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자신이 마귀와 잠자리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혼자가 좋다고 합니다.
혼자가 좋은 게 아니라 마귀랑 사는 게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려주는 가브리엘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아기가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장난감 가지고 재밌게 놀지만, 어머니가 안 보이면
불안해서 우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게 느껴져야 밖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 사탄의 손아귀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니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자연인들에게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은 가브리엘 천사의 역할입니다.
산속에서 수십 년간 혼자 살아가는 이들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스스로 자기를 가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방송국의 스텝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그리고 그 추운 곳에서 그들과 함께 머뭅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존재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이 스텝들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자꾸 고향인 부산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브리엘 천사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 오래 혼자 있게 해 드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혼자 있는 것은 결국 자기를 망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것도 죄이고, 혼자 있겠다는 사람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8일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
복음: 루카 1,26-38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 합니다!
원래 3월 25일에 경축하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올해는 훨씬 뒤로 밀렸습니다.
이유는 올해 이 대축일이 성주간과 겹칠 경우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 지낸다는 로마 미사 경본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맞아 중세 신비가 마이스터 엑가르트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늘 새롭게 태어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여기 이 자리에서 매일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버리고 떠나있기 연습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도 빈 그릇으로 존재할 때 그 빈 그릇에 겸손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잉태되실 것이고 탄생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이루어 낼 때, 비로소 한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런 큰 기쁨과 영광을 원한다면 반드시 먼저 우리 마음의 밭갈이 작업이 필요합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탄생하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하는 일은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에 도전하는 어려운 일이 분명합니다.
그 옛날 나자렛의 마리아가 그랬듯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다가오는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그랬듯이 안락한 삶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가 그랬듯이 본능과 이기심, 자기중심적 삶을
철저하게도 배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안개 자욱한 낯선 길을 떠나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안에 잉태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과 멸시를 꿋꿋이 견뎌내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잉태하고 낳아 기르겠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과제이자 세례를 통해 받은 책무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강론>
(2024. 4. 8. 월)(루카 1,26-38)
<순종>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0-38).”
1)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구약성경에 있는 다음 말씀도 ‘하느님의 뜻’을 잘 나타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인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선포는(마태 4,17) ‘하느님의 뜻’은 곧 ‘인간 구원’이라는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2) ‘성모님의 순종’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의 도구로 봉헌하신 일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씀은, “저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뜻이고, 자신을 도구로 쓰시라고 하느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우리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실행해야 할 첫 번째 ‘순종’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에,
그 뜻에 순종하는 첫 번째 방법은 곧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순종은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어야만
다른 사람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 두 번째로 표현하긴 하지만,
중요도를 생각하면, 두 가지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3) ‘순종’을 ‘허락’이나 ‘수락’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순종’은 ‘사랑’입니다.
4) 아무 일에나 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남용하는 잘못된 일입니다.
전쟁, 질병, 자연재해, 독재 정권, 식민지배...
그런 일들이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라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병’이 정말로 하느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병의 치료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가 되어버리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실제로 어떤 고통과 불행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고통과 불행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장상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혼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장상의 명령이 하느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일이거나, 선과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 잘못된 명령에 복종하면 안 됩니다.
명령하는 입장에서도 자기 개인의 명령을 주님의 뜻인 것처럼 내세우면서 순종하라고 강요하거나 압박하면 안 됩니다.>
5) “성모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자.” 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구원의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되는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이 상황을 피해서 멀리 달아나서 숨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선’과 ‘사랑’과 ‘구원’이 실현될까?”를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선(善)은 ‘하느님의 선’을 뜻하는 말이고, “나 한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일’, 즉 ‘공동선’을 뜻하는 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