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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묵상글 (9/20. 22:25, 05:35 - :40.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9/20. 22:25, )
2차 공유할 묵상글< 04 ~ 05시,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05:3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40 추가.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아직.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8월 15일 이후에도 당분간 현재와 같이 운영*하며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인계, 인수는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위 사항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는 11월 대림시기(11/29) 부터는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하고, 카페의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키고, 적당한 때(2027년 상반기 또는 그 이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 * 위에 따르며 가능하면 1차 공유는 전일 22시전까지 2차 공유는 04시- 05시까지, 안되면 07시쯤(이후) 할 계획입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2026. 09.04.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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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그리스도께서 사도로,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에페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복음<“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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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9.20 20:37
2026년 9월 21일 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9,9-13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한 사람을 보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입니다.
세리는 로마를 위해 동족에게 세금을 걷던 사람으로,
‘민족의 배신자이자 죄인’으로 손가락질받던 이였습니다.
권력과 재산은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단 한마디를 건네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놀랍게도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흥정도, 미룸도 없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이 순간을,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과
‘저요?’ 하는 마태오의 놀란 얼굴로 그려 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바리사이들이 못마땅해하자 말씀하십니다.
“의사는 병든 이에게 필요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리게네스가 즐겨 읽었듯, 이 부르심은
‘아무도 부르심 밖에 있지 않다’는 복음의 심장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이, 그래서 하느님을 더 절실히 찾는 이 ―
바로 그런 이를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특히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이 부르심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돈을 ‘세던’ 그 손이, 훗날 붓을 들어
‘마태오 복음서’를 썼습니다.
신약성경의 문을 여는 그 복음서, 이천 년 동안
온 세상이 ‘읽고’ 기도해 온 바로 그 책입니다.
세리의 장부를 적던 손이 복음을 적는 손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화 주간’ 첫 평일의 뜻이 있습니다.
문화 주간은 음악·미술·시·‘독서’로 영혼을 살찌웁니다.
그런데 그 문화의 가장 높은 열매 가운데 하나(복음서)가,
‘부름받아 회개한 한 죄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참된 문화는 재능의 과시가 아니라,
주님을 만난 사랑이 넘쳐흘러 빚어지는 열매입니다.
마태오의 회개가 한 편의 복음서로 피어났듯,
우리의 작은 회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나를 따라라” 하시는 부르심에 ‘일어나’ 응답하는가?
나는 ‘내가 앉아 있는 세관(옛 삶·집착)’을 떨치고 일어서는가?
나는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도리어 그분을 더 찾는가?
나의 회개는 어떤 ‘좋은 열매(문화·섬김·글)’로 흘러넘치는가?
주님,
“나를 따라라” 하시는 부르심에 곧바로 일어나게 하소서.
옛 자리를 떨치고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마태오처럼 그 사랑이 좋은 열매로 넘쳐흐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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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38?referrerAllArticles=true
2026.09.20. 20:46
비폭력적 저항!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복음과 교회는 모두 하느님의 평화를 따르는 비폭력적 저항을 가르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비폭력: 그리스도인 소명
비폭력적 저항!
2026년 9월 20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본질적인 응답은 비폭력적 저항이라고 성찰합니다:
모한다스 간디(1869–1948)는 모든 세계 종교가 예수님께서 비폭력을 가르치셨고, 비폭력적으로 사셨으며, 비폭력적으로 죽음을 맞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그리스도교만은 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너무 가까운 진리이기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큰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적게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마치 산상수훈이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예수님의 비폭력적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관상적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계산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하느님과 세상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참여적 신비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악의 무거운 짐과 영광의 무게를 함께 지니고 살아갑니다.
군사적 해결책은 오늘날 당연한 필요로 받아들여지지만,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참으로 끔찍한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국가를 결합시켜 버렸고, 성체를 모시는 감실 곁에 국기가 놓여 있는 경우도 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신앙과 국가가 거의 분리되지 않는 듯합니다.
복음과 교회는 모두 비폭력적 저항을 가르칩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온유한 단호함'이라 부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이는 절대적 평화주의를 뜻하지도 않고, 정당한 자기방어의 권리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악에 맞서는 데에는 창조적이고 끊임없는 단호함이 요구됩니다. 우리 각자는 악과 폭력, 해악의 신비에 일정 부분 연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쟁을 정당화하며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무엇보다 먼저, 바로 너 자신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버리고 죽으라고 가르치십니다(루카 9,24 참조). 이 과정은 세상의 죄와 고통의 짐을 우리가 기꺼이 함께 짊어지도록 요구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민족들 모두가 그분 앞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분께는 아무것도 아니며 헛것으로만 여겨진다."(이사야 40,17)라고 말합니다. 땅 위의 경계선은 영원히 새겨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첫 충성은 민족과 경계를 넘어선 그 보편성에 있어야 합니다.
관상적 기도의 여정은 우리를 보편성의 감각으로 이끌어, 자기 나라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폭력과 짐을 함께 짊어지고 저항하도록 인도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온갖 모순과 부조리, 온갖 종류의 죽음, 온갖 종류의 생명을 함께 받아 안는 큰 곡예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 보편적인 하느님 체험의 깊이로 인도되어, 영과 마음과 정신 안에서 세상의 폭력에 대한 복음적 응답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려면, 비폭력을 우리의 이상으로 삼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점점 더 용서가 두려움, 수치, 분노, 증오, 고립,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모든 것을 포괄하는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Martin K.
Reference
Adapted from Richard Rohr, Healing Our Violence Through the Journey of Centering Prayer, Richard Rohr, Thomas Keating (St. Anthony Messenger Press, 2002).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분열을 드러내는 벽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다양한 색과 아름다움을 품은 벽처럼, 우리는 한쪽을 고르지 않고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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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21 05:01
-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은 없고 사랑일 경우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오늘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데 이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께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며 저도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라면 마태오를 사도로 뽑았을까?
이것이 마태오 사도 축일을 지내는 오늘 제게 든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주님은 마태오 사도를 신중하게 뽑으신 걸까?
깊은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뽑으신 것은 아닐까? 그것입니다.
자문자답 곧 저의 인간적인 의문에 대한 저의 신앙적인 답은
잘못 뽑으신 것도 아니고 충동적으로 뽑으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태오를 뽑으신 것을 인간적으로 판단한다면
길을 가다가 뽑으신 것도 잘못 뽑으신 것이고,
죄인을 뽑으신 것은 더 큰 잘못일 것입니다.
사실 유비가 제갈량을 뽑으신 것과 비교하면
주님께서도 그를 찾아가서 뽑으셨어야 하지 않냐고,
왜 지나가시다가 뽑으셨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에
주님의 기준 곧 신앙적인 기준으로 볼 때 잘못 뽑으신 것이 아니고,
그러니 충동적으로 뽑으신 것도 아닙니다.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당신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 때문이고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대사회적인 선포였으며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리고 먼저 당신을 의사에 비유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니까 ‘고객 먼저’와 같은 정신입니다.
의사나 선생의 존재 이유가 병자와 학생이고,
명의와 명사의 존재 이유가 중환자와 말썽꾸러기이듯
구원자이신 주님의 존재 이유는 죄인이요 죄인 가운데서도 최고의 죄인입니다.
요즘은 자기 돈벌이로 병자를 대하는 의사가 있기도 하지만
원래는 의사를 위해서 병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에게 원래 그래야 한다고 높은 기대를 요구하면
왜 그래야만 하냐고 되물을 의사들이 많을 것입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은 사랑 때문일 경우뿐입니다.
부귀영화가 나의 목적일 경우에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고,
그를 낫게 해야겠다는 사랑이 목적일 경우에만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오와 같은 죄인인 우리는 그래서 오늘 그의 축일에
죄인인 나도 사도로 뽑힐 수 있음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그 주님의 사랑에 마태오처럼 합당하게 응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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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21. 05:01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해석을 엮어 보면, 마태오 사도의 부르심은 단순히 직업을 떠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한 사람을 세속적 질서에서 복음적 질서로 불러내신 전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사도의 이런 전환 혹은 회심이 중요한 이유는 마태오의 삶의 전환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이런 전환을 이루라는 초대를 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마태오가 재정 문제를 정리하느라 다른 제자들보다 늦게 부르심을 받았다고 보았고, 6세기의 어떤 저자는 오히려 그가 장부를 정리하지 않고 무질서한 채로 떠났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숫자와 균형을 다루던 세리에게는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을 겁니다. 사실 그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는 말씀을 몸소 증언한 셈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마태오가 당시 "아직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부르심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안정에서 불안정으로, 부에서 가난으로, 권력에서 무력으로 옮겨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업의 일부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수님께 내어 맡기는 결단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유다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라는 표현을 16번이나 사용합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 약속의 완성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의 세금 장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이에 마태오가 응답하는 사건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복음을 따르기 전에 우리의 '장부'를 모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불균형과 미완성 속에서도 주님을 따를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리가 당신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지 아닌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한없는 부족함과 결핍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하해 같은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에게도 복음이 그야말로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정을 이끌어가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변모의 시작점입니다.
이 사랑 안에 머무는 것, 이 사랑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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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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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 2026.08.30. 05:42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2026.09.02. 06:35 )
http://www.ofmkorea.org/ofmkfb/584513
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 2026.09.04. 19:57 )
http://www.ofmkorea.org/ofmkfb/58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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