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삶 / 홍속렬
이제 2024년 2월이 되면 난 팔십 세가 된다
팔순이 되는 때 난 내 가족이 기뻐해 주거나 잔치를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 집 가풍은 생일잔치나 어떤 행사를 하는 걸 거의 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어릴 적 동무들을 초대 함께 식사라도 하며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는 건 이제 나도 많이 늙었다는 징조다
내 인생은 진짜 파란만장이다
철이 들 때쯤 한국전쟁 6,25가 터졌고 전쟁의 공포는 어린 나를 비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버렸다
어머니의 부상 다리 하나를 잃으셨고 집은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데 집 안에 할아버지가 계셔 시신도 수습 못한 비참한 상태였다
폭격으로 인한 수많은 죽엄과 값싼 인간의 가치 그리고 내일의 삶이 어찌 진행될지? 불확실성과 내일의 양식 걱정? 먹는데 식구가 많으면 힘들었던 버거운 생활?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고 다리 하나 없는 목발 짚은 어머니와 걸어 의정부 까자 나가 만원 기차를 피난길의 혼란과 배고픔의 고통 일곱 살 어린아이가 겪기로는 너무나 버거운 짐 인생의 짐?
그리고 외갓집에 얹혀살며 살림에 보태기 위해 가을이면 벼 동냥을 다녔고 된장 고추장 동냥을 다니며 어린 마음에 받은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는 아직도 내 영혼 깊숙한 곳에 깔려있어 필요 이상의 자존감으로 작용 분출되게 되면 큰 환란으로 나타나곤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이 안 돼 어린 나이에 소년병으로 입대 군인이 되었고 육군대표 감독직을 수행하며 학력이 필요해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 체육대학에 진학 교사 자격증까지 스포츠에만 4가지 자격증을 소유했다.
책을 많이 읽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금의환향을 하는 게 목적인 삶을 산다
그 꿈은 군대에서 대 육군대표 축구 감독을 하면서 이루어 냈고 자가용으로 가족과 함께 (1남2녀) 귀향하면서 지극히 가난한 시골 가정을 방문 하곤 했었다
음악을 좋아해 두 아이는 음악을 전공시켰고 두 아이는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이제 현역에서 은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선교사로 과테말라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는데 보람도 되고 가난한 마을에서 비젼과 꿈을 이루어 내는 희망을 말씀과 함께 심어준다
지독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희망과 꿈을 갖는데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면 공무원 군인 경찰 축구선수 코치 신앙지도자 등 많은 직업군에서 적성에 맞는 일을 골라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교육한다.
2024년 목포를 정하고 시방 하고 있는 축구 선교에 힘을 쏟아붓고 후계자를 키워 내어 물려 주고 돌아갈 생각이다
아직도 건강하여 하루 3시간 운동 가르치는 덴 부족함이 없고 다만 혼자 지내며 삼시 세끼 밥해 먹는 일이 좀 부담스럽긴 하다
그러나 그 일도 넉넉히 잘 감당해 낼 수 있다.
난 특수부대 출신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
무적이 사나이 난 아직 안 늙었다 다만 나이를 많이 먹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