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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야호♬ (lil_ili@hanmail.net)
친정 ★ 야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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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법칙>
법칙 32. 로비?
시끌벅적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촬영장을 쳐다보았다. 미술팀이 꽤나 고생했을 법한 세트가 으리으리하게 서있는 곳에 거하게
차려진 상이 놓여졌다.
내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싱글벙글하하호호능글능글 웃고 있는 돼지 머리를 쳐다보았다.
유진태 감독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돼지 머리 앞으로 나오더니 큰 절을 올렸다. 이내 그는 ‘돈! 돈내야죠 돈!’하고 외치는
스탭들을 얄밉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능청스레 물었다.
“카드는 안돼? 무이자 3개월 어때.”
“안돼요, 안돼! 감독님이 현금 결제 하셔야 우리 영화가 대박나죠! 시작부터 할부 처리 하시는 겁니까? 예?”
“맞아요! 감독님 치사하게 그러시기에요?”
여기저기서 스탭들의 아우성이 빗발치자 유진태 감독이 결국 하하하 웃더니 알았다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의 지갑에서 나온
것은 빳빳한 새 돈 뭉치였다.
“저희 영화 대박나게 부탁드립니다! 좋은 감독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유진태 감독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 갈채가 터져나왔다.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박수치지마요~’하고
말하는 유진태 감독의 앞으로 기자들이 몰려들어 찰칵거리며 난리를 피우는 모습에 피식 웃었다.
“넌 절 안하냐규.”
독고산하는 어디에 있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다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러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용케 날 찾아낸 모양이었다.
다솔이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반응을 보이자 다솔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너도 촬영 감독이잖아. 가서 큰 절하고 돈 내야하는 거 아니냐규.”
“돈 없어서 피해있는 중이시다.”
“독고산하 피해서 숨어있는 거 아니고?”
예리한 년.
다솔이의 질문에 난처해져 베시시 웃으며 ‘비밀이거든?’하고 대답하니 다솔이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그래, 내가 가소롭다는 거냐.
“당당하게 나가시겠다며? 안포기하겠다고 했다며? 근데 왜 이러고 있냐규.”
“야, 말이 쉽지. 그게 막상 두 번이나 차이고 나니까…”
“두 번이나 차였어? 너 이번에 처음 차인 거 아냐? 나 너 차였다는 얘기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아, 젠장.
말 실수 했다는 걸 깨닫고 다솔이를 쳐다보았으나 다솔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뭐야? 어떻게 된 거야?’라고 가재미 눈을 한 채
추궁하듯 날 쳐다보았다.
저번에 차인 얘기까지 해줘야하나 싶어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빛을 띄워보았으나 다솔이에게선 일절의 양보가 없었다.
기어코 듣고 말겠다는 눈빛이로구먼. 그래, 누가 내 친구 아니랄까봐 너도 의지의 한국인이다.
“아니, 그게…”
“독고산하다! 독고산하씨, 아프셨다고 하던데 지금은 몸이 괜찮으신건가요? 하루 쉬었다고 하던데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요?”
“이번 영화에 대한 부담감이 크신가요?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돈은 얼마나 내실 건가요?”
별 질문을 다하는구먼. 독고산하가 무리를 하든,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얼마를 내든 그건 지 맘이지.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기자들이 우르르 한 곳으로 몰려갔다. 찰칵이는 소리와 플래쉬 빛이 정신없다 생각할 때쯤 아니나 다를까
독고산하가 난처한 얼굴로 세트장에 들어섰다.
“아까 벤에선 기자들 보기 싫다고 투덜거리더니 얼굴에 가면을 쓰셨네, 쓰셨어.”
“기자들 보기 싫대?”
“응, 코디해주느라 벤에 같이 있었는데 기자들 보기 싫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배우는 배우다, 보기싫은 티 하나도 안내잖아.”
내게 질문하던 것을 새카맣게 잊은 듯 다솔이가 독고산하의 등장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첫 촬영에 필요한 새카만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독고산하는 기자들에게 친절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일일이 대답까지
해주었다.
저런 걸 이미지 관리라고 하는 건가 싶어 물끄러미 녀석을 쳐다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넋을 놓아버렸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구나, 멋있긴 진짜 멋있구나…… 배우는 아우라가 다르다던데 독고산하를 보니 그게 절실하게 와닿는다.
“이번 영화 대박나서 ‘독고산하가 첫 촬영 날 아프더니 영화를 말아먹었다!’ 같은 얘기 안나오게 해주세요.”
독고산하가 능청스레 웃으며 돼지 머리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는 넙죽 큰 절을 올리자 여기 저기서 스탭들이 ‘기럭지봐…’라며
하하호호 웃으며 박수를 쳤다.
기자들도 ‘좋은 기사 써줘야겠는데?’라고 말하며 여기저기서 플래쉬를 터트렸다.
이내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돼지 입에 흰 봉투를 물렸다. 현금으로 바로 지갑에서 꺼낼 줄 알았는데 미리 액수를 정해 준비를
해 온 모양이었다.
“어제 무단 결근했으니 오늘 회식은 제가 책임 지겠습니다.”
독고산하가 돼지 머리에 흰 봉투를 물리며 말하자 여기저기서 기쁨을 넘어선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뒤에서 아들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던 김수옥씨가 ‘어머, 오늘 아들 덕에 기름 칠 좀 하겠네? 호호호!’라고 말하며 웃자 다들 맞장구 치며 웃었다.
아마 웃지않는 건 나정도?
“근데 우리 촬감은 어디 계시길래 안보이나?”
첫 촬영을 펑크낼 수밖에 없었던 독고산하의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쉽사리 웃음이 터지지 않았다. 게다가 독고산하가
나를 거절한 것이 곽하주 때문이라는 생각이 자꾸 꼬리표처럼 날 쫓아다녀서 짜증까지 날 정도였다.
애초에 곽하주에게 복수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니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매번 날 잡아끄는 곽하주가
얄미워서 꿀밤이라도 놔주고 싶었다.
이마에 벌집이 생길 때까지. 아주 왕창!
“촬감 여기 있어요!”
날 찾는 유진태 감독의 목소리에 일부러 대답하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는 나를 보기 좋게 무시하며 다솔이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깜짝 놀라 다솔이를 쳐다보자 다솔이가 ‘훗’하고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야! 너 미쳤어?”
“너야 말로 미쳤어? 촬감이 돈도 안내고, 절도 안할 셈이야? 니가 그렇게 존경하는 유진태 감독 영화, 니가 말아먹을래?”
“누, 누가 말아먹는데?”
“그럼 가서 절하고 당당하게 돈 내고, 영화 잘 되게 해달라고 빌어. 이 지지배야.”
다솔이가 등 떠밀다 시피 날 스탭들이 한가득 서있는 세트장 앞으로 내몰았다. 웃느라 여념없던 영화사 사장 오빠가 날 발견하고
냉큼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나도 아직 절 안했는데, 같이 하자 초하야.”
“어? 어어.”
아씨, 지갑에 돈 없는데.
돈 걱정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려보았으나 사장 오빠는 원래 지구가 태어나기도 전에 눈치를 말아먹은 사람이라서 내 지갑 사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주뼛주뼛 사장 오빠를 따라 돼지 머리 앞으로 다가갔다.
허허허- 하고 넉살좋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돼지 머리를 보고 있으려니 주머니 속 지갑이 엉엉- 목놓아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망했다.
“부디 영화가 대박 흥행해서 투자하신 분들 손해보는 일 없도록 해주시옵고! 저희 영화사의 자랑스러운 영화로 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영화사 사장 오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대에 찬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하지만 지갑 사정을 걱정하는 내게 그 시선들이 느껴질 리 만무했다. 이제 어쩌지, 하고 물끄러미 돼지 머리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사장 오빠가 힐끔 주위 눈치를 살피며 내 옆구를 툭 찔렀다.
“초하야, 너 말할 차례야.”
“어? 어. 해야지, 방금 하려고 했어.”
얼떨결에 대답하고 침을 꿀꺽 삼키며 돼지 머리를 쳐다보았다. 거참 허허실실 잘도 웃고 있는 얼굴이로구먼.
“…그러니까…… 영화가 잘 돼서… 제 지갑이 좀 넉넉해지도록…… 아니, 아니지 내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거야?”
“니가 말 해놓고 날 쳐다보면 어쩌냐?”
“아, 몰라! 오빠 때문이야!”
왜 지갑이 튀어나온거야. 이 망할 놈의 주둥이 같으니라고.
한 손으로 입을 찰싹찰싹 때리며 사장 오빠와 투닥거리자 여기저기서 스탭들이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자 다솔이는 엄지 손가락을 내밀고 있었고, 유진태 감독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독고산하는…….
“…배우가 영화 안에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촬영하는 촬감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껍데기 촬감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돼지 머리를 향해 말하는 건지 독고산하를 향해 말하는 건지, 아니면 나 스스로를 향해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새 내 시선은 돼지 머리 근처에 서있는 독고산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녀석도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으나, 나와 시선이 닿자 먼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가볍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꼴이… 나, 지금 비웃음 당한 거니?
“이야, 우리 촬감님 덕에 분위기 진지해졌네. 초하씨한테 안지려면 나도 정말 좋은 감독이 되야겠어요.”
“촬영팀 최고다!”
“봉투봉투 열렸네~ 우리 촬감님 봉투봉투 열리셔야죠~ 영화사 대표님도 봉투봉투 열리셨으려나~?”
망할 것들.
주위에서 봉투봉투 제창하는 스탭들을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지갑을 꺼냈다. 등에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힐끔 사장 오빠를 쳐다보니 오빠는 아예 작정을 하고 온 듯 지갑에서 하얀 수표를 꺼내들었다.
…왜 나한테 같이 절하자고 했어! 왜!
“초하야, 너도 내.”
“…오빠.”
“응?”
“밤골목 조심해.”
두 눈을 부릅뜨며 사장 오빠를 쳐다보자 오빠는 그제야 내가 지갑 사정을 어렴풋 눈치챈 듯 ‘헉!’하고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돈 없어?”
사장 오빠가 살짝 몸을 숙여 소곤거리며 물었다.
“…오…”
“오만원 있어? 에이, 그거면 충분…”
“백원.”
오백원.
내 지갑엔 오백원 뿐이야. 오백원. 오만원? 후, 후후. 오만원이 있다면 내가 지금 왜 지갑 꺼내면서 손을 벌벌 떨었겠어?
오백원 밖에 없다는 내 말에 소곤거리며 나와 대화를 나누던 영화사 사장 오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하는 표정으로 보건데 내가 오백원을 내면 이 분위기가 어떻게 변할지 대충 짐작한 눈치였다.
“나도 수표 한 장만 넣고 왔는데… 어쩌냐?”
“몰라, 나 이제 생매장 당할 거야. 당당하게 오백원 내겠어. 후후후.”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지갑을 든 채 돼지 머리 앞에 섰다. 오백원을 꺼내기 위해 지갑을 여는데 돼지 입으로 누군가 빳빳한
만원짜리를 두툼하게 끼워넣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옆을 쳐다보니 독고산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도, 독고산…”
“가만히 있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뭐? 뭐를?
놀란 얼굴 그대로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더니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의아한 듯
우리를 쳐다보는 스탭들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띈 채 말했다.
“촬영 감독님 말씀이 어찌나 감동적인지 제가 안내드릴 수가 없잖아요. 게다가 저번에 제가 촬감님께 돈 꾼 것도 있고 해서,
오늘 촬감님 봉투는 제가 대신 열어드리기로 했거든요.”
독고산하의 말에 다들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뭐야? 촬감한테만 잘보이면 다야? 조명은? 음향은? 연출부는?’하고 짓궂게
물어왔다.
장난기 가득찬 그들의 목소리에 독고산하가 난처한 듯 웃으며 시선을 옮겨 날 쳐다보았다.
‘뭐해? 반응보여.’라는 눈빛을 보내는 독고산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독고산하가 천상 배우라는 것도 알겠고, 연기를 무척 잘한다는 것도 알겠지만 왜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해 돈을 대신 내줬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난 멍청이니까.
“…야.”
나지막이 독고산하를 부르자 녀석이 ‘야?’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날 쳐다보았다.
어디서 말을 함부로 놓느냐는 눈초리인데, 난 어제 분명히 말 놓겠다고 선전포고 했으니까 절대 높여서 너 안불러.
“니가 어제 나 찼거든? 그래서 나 내심 그거 신경 좀 쓰여.”
“…….”
“근데 니가 이렇게 나오면 나 좀 착각하게 되거든? 니가 날 좋아하는거라고.”
돼지 머리 있는 곳에서 살짝 비켜나며 중얼거리다시피 말했다. 자연스레 독고산하의 옆자리에 서서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하자 녀석이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마.”
나지막이 내뱉어진 독고산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살짝 고개를 꺾어 녀석을 쳐다보자 녀석이 물끄러미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말했다.
“이건 순전히 촬영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대신 내준거니까. 왜 ‘로비’ 같은 거. 그래, 로비. 그거 좋네.”
“로비?”
“촬영 잘 좀 부탁한다고. 니 말대로 내가 널 차서 니가 욱한 마음에 날 못나게 촬영하면 내 손해니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로비.”
처음 수영장에서 내가 녀석을 빠트렸을 때 들었던 것과 비슷한 목소리이다. 짜증이 섞여있고, 꽤 날이 선 목소리.
내가 공들여 누그러트린 분위기들이 모두 산산조각 난 것 같은 기분에 피식 웃었다.
그래, 어느새 아무것도 아닌 ‘로비’로 한정되는 사이가 되버렸어.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 거야.
아니, 애초에 독고산하에게는 나와의 모든 시간이 처음일지도 모르지.
“어떻게든 돈 돌려줄게.”
“됐…”
“갚을거야. 널 좋아하는 이상 ‘로비’ 따위로 한정되는 사이 되긴 싫어. 그런 거 내가 안 받아. 그리고 너.”
독고산하의 시선이 또렷하게 내게 닿았지만 피하지 않았다. 팽팽하게 부풀어지는 분위기를 느끼며 한순간 터질 것 같은 불안감도
느꼈다.
하지만 진심을 전하기 위해선 시선을 피해선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손을 꽉 쥔 채 녀석을 쳐다보았다.
“나 우습게 생각하지마. 아무리 내가 촬영감독으로 이제 막 데뷔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프로의식은 있어. 공과 사는 구분해, 나도.
니가 날 찼다는 이유만으로 널 못나게 촬영하진 않아, 그건 나 스스로가 용납 못해. 내가 한 말 못들었어? 배우가 영화 안에서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촬영하겠다고 했잖아. 그게 니 눈엔 헛소리 같았어?”
빠르게 내뱉어진 내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참아야 한다고, 더이상 울면 눈이 더 괴물처럼 부어버릴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인지 금세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독고산하가 당황하는 것이 언뜻 보였지만 한번 터져버린 억울한 마음은 아무리 억눌러도 억눌러지지 않았다.
내가 고작 녀석에게 그따위 촬영감독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억울했다.
녀석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내심 ‘우리 사이는 남들보다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남는 것은 이렇게 눈물뿐이라고 해도.
“돈은 갚을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 갚을테니까 로비 어쩌고 하지마.”
툭- 하고 떨어지는 눈물을 냉큼 손등으로 닦아냈다.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며 두 눈을 쓱쓱 비비자 독고산하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럼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할 거야. 너 좋아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돈 갚는 것도 내 마음이야. 알았어?”
“하?”
“그리고 한가지만 더 충고할게.”
독고산하를 향해 짜증을 내고 있는 내가 밉지만 자꾸만 속에서 열불이 난다. 억울하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을 좋아하는
것이 화 나기도 하고.
어쩌다가 진심이 되어버린 걸까. 독고산하따위 곽하주에게 복수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버리면 속 편했을 텐데…….
충고 운운하는 나를 쳐다보는 독고산하의 눈초리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꽤 귀찮은 눈치이기도 했고.
“너 나 사랑할 수 없다고 했지? 나보고 더이상 흔들지 말라고 했지?”
“…….”
“그럼 너도 태도 확실히 해. 내가 계속 너 좋아하겠다고 한 거 너도 들었잖아. 근데 지금 누가 누굴 흔드는 것 같아? 내가 너를?
아니, 니가 나를 흔들고 있는 거야. 밀어낼 거면, 거절할 거면 니 태도부터 확실히 해.”
더이상 녀석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좀 해야할 것 같아 녀석을 지나치며 나지막이
뒷말을 보탰다.
“이 멍청아.”
재빠르게 내뱉고 걸음을 옮겼으나 독고산하가 움찔하며 날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몇 번을 되세겨 생각하며 화장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녀석을 지나치는 순간부터 억누르고 억누른 울음이 결국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서 주체하지 못할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끅끅거리며 울음 소리만 겨우 참아 화장실로 들어와 세면대 찬 물을 틀었다.
거울 속에는 눈이 퉁퉁부은 여자가 못생긴 얼굴을 하고 또또또 눈물을 흘리며 엉엉대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니가 날 찼어도, 난 널 좋아해요!’라고 눈 반짝거려도 모자랄 판에, 온 몸에서 핑크빛 아우라를 뿜어대며 하트를 남발하기에도
바쁠 판에 내가 지금 뭐라고 쏘아붙이고 온 거야?
입이 방정이지, 입이 방정이야.
돈 내줘서 고맙다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장난스레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을 내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거니.
찬물을 몇번 얼굴에 끼얹고 나서야 정신이 맑게 돌아왔다.
난 대체 뭐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나만 계속 독고산하를 신경쓰며 안절부절 했다는 사실? 녀석은 내가 내지 못할 돈을
대신 내주며 능청스레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
…아, 정말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제 진짜 쳐다도 안보면 어떡해! 아, 짜증나! 입을 꿰매야지, 꿰매야 돼! 아이고!“
눈물도 안나온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 스스로가 독고산하에게 ‘너 나 찼지? 그럼 나한테 쌀쌀맞게 굴어. 잘해주지 말라고!’따위의 말을 내뱉다니, 돌았지. 돌았어.
게다가 이렇게 10분, 아니 1분도 안돼서 당장 후회할 걸 대체 왜 욱했던 거야.
……내가 내뱉은 말들은 모두 독고산하가 날 좋아하지 않으면 콧방귀 뀌고 넘어갈 말들이잖아. 씨알도 안먹히는 거라고.
“아, 진짜 쥐구멍이라도 만들고 싶다.”
세면대에서는 찬물이 넘쳐흐르고 난 후회가 넘쳐흐르나니 빌어먹을 입방정.
*
“크레인 괜찮아? 살수차 점검은? 물줄기는 어떤 것 같았는데?”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오니 볼이 뽀득뽀득하다 못해 쫘악 땡기는 느낌이다. 가볍게 두 손으로 양 뺨을 두드리며
촬영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금세 돼지 머리를 치원 촬영장은 첫 촬영을 앞둔 분주함으로 정신없어 보였다.
구석에서 짐을 끌어안고 꾸벅꾸벅 자는 다솔이를 힐끔 쳐다보다가 유진태 감독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첫 촬영부터 비오는 장면이 있어서 점검하느라 바쁜 유진태 감독 옆에 슬쩍 자리를 잡자 무언가를 체크하던 그가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초하씨. 어디에 있었어요? 찾았는데.”
“죄송해요, 화장실에 좀 다녀오느라고… 것보다 무슨 일이신데요?”
“첫 촬영 준비 잘 했나 확인 좀 하려구요. 마음 단단히 먹었죠?”
“당연하죠.”
“씬 설계는 잘 했어요? 오늘부터 초하씨 손에 우리 영상이 달려있는데.”
유진태 감독의 말에 나지막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촬감님! 여기 계셨네. 한참을 찾았잖아욧!”
무언가 할말이 더 있는 듯 첫 촬영에 관해 적어둔 종이를 내게 내보이는 유진태 감독의 행동에 유심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촬영팀 막내가 씩씩거리는 콧김까지 뿜어대며 날 쳐다보고 있었다.
“첫 촬영 어떻게 진행할지 마지막 체크 해야하니까 모여야 하잖아요! 퍼스트 선배가 한참 찾았단 말이에요.”
“아, 그랬지. 미안미안. 화장실에 있었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막내가 아예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빨리 와요! 조명팀하고도 상의 해야하는데!’하고 바득바득 이를 간다.
멋쩍게 웃으며 유진태 감독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가 가보라는 듯 웃어보였다.
첫 촬영부터 정신이 없네,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촬영팀 막내를 따라 이동한 곳엔 촬영팀과 조명팀이 전부 모여있었다.
“촬감님!”
“없어진 줄 알았잖아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하죠.”
촬영팀이 정신없이 내뱉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트고 앉았다. 첫 촬영에 대해 씬 설계 해놓은 것을 바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오는 골목을 뛰어가는 장면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거리를 전부 비춰야하니까 스테디 캠(촬영기사의 몸에 부착하는 카메라)이 좋지 않을까 하는데.”
내가 나지막이 말을 내뱉으며 주위를 천천히 살피자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얘기를 듣던 퍼스트가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어받았다.
“와이어 캠(카메라를 와이어에 매단 것)이 낫지 않을까요? 나중에 공중에서 거리를 다 담아야하는데.”
“아니야, 처음에 주인공이 골목을 뛰어가는 장면은 와이어캠으로 찍으면 느낌이 덜 해.”
“그럼 플라잉캠(모형 헬리콥터 안에 카메라를 설치한 것)은 어때요?”
“그것도 별로야. 일단 가까운 거리에서 주인공을 촬영하다가 점점 높아져야하는데… 나눠서 촬영하긴 힘들겠지?”
“어색하지 않을까요?”
은근슬쩍 말을 놨는데 모르네. 앞으로 계속 말 놔야겠다.
힐끔 퍼스트를 쳐다보니 그는 곰곰이 촬영할 씬을 살피며 이것저것 체크하고 있었다. 세컨과 서드, 그리고 막내 또한 답이 있다면
내놓고 싶은 눈치였으나 나와 퍼스트가 하는 고민과 오십보백보인 듯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촬영팀과 거의 한 몸으로 회의하고 결정내리는 조명팀을 슬쩍 살피니 그들도 조명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중인지
썩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와이어에 매달리는 건 어때?”
해답이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툭 내뱉듯 던진 말이었다. 어차피 오늘 촬영 중에 독고산하가 와이어에 매달려 촬영해야 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와이어를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되겠지? 하고 촬영팀을 슬쩍 살피니 그들이 꽤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들 그렇게 쳐다봐?”
“촬감님…”
“으응? 이상해? 아니, 이상하면 다른 방법을…”
“머리 완전 좋으신데요? 역시 촬감은 그냥 되는 게 아닌가보네, 고민 많이 하셨나봐요! 진작 그런 방법을 말씀하시지!”
“응? 어, 어 그래! 나 머리 좋지? 어때? 괜찮지 않아? 와이어 매달고 뛰다가 줄 잡아 댕기면 위로 올라가면서 촬영할 수 있잖아!”
미안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어.
심지어 회의 미리 해두라는 유진태 감독의 말도 한 귀로 흘려먹고 촬영 당일 아침에야 부랴부랴 정하고 있는 나인걸.
“그럼 전 와이어 사용 여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전 장비 체크 하고 올게요. 스테디 캠 맞죠?”
“저, 저도 가서 렌즈 체크 하고 올게요!”
막내와 세컨드, 그리고 서드가 차례대로 내뱉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신 난 얼굴로 빠르게 움직였다.
남은 건 나와 퍼스트.
“퍼스트.”
“네?”
“넌 뭐해? 내 오른팔이 쉬고 있으면 되겠어? 가서 포커스랑 노출 체크해.”
“아, 네!”
퍼스트까지 분주하게 움직이게 만들고 나서야 다시한번 촬영체크를 했다. 앵글(각도)은 생각해둔 것이 있으니까 테스트할 때
체크해보면 될 것 같고, 촬영도 어떻게 할지 정해졌으니 뭐…… 이제 움직이는 일만 남은건가.
힐끔 조명팀을 쳐다보니 그들도 어떻게 할지 방법이 정해진 듯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탭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며 기지개를 켜자 조명감독이 슬쩍 다가왔다.
“정했어?”
“네. 어느정도는요. 조명팀은 어때요? 어두운 골목이라 조명 까다로울 것 같은데.”
“어렵지 어려워. 눈에 보이는 빛하고 영상에 표현되는 빛은 미묘하게 차이가 있거든. 그게 참 어려운 감각이란 말이지.”
“그래도 자신 있으시죠?”
“당연하지. 나 한 실력 하는 사람이야. 것보다 촬영팀은 자신 있는거야?”
“네. 안되면 몸으로 덤벼보는거죠, 뭐.”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조명감독이 껄껄껄하고 웃는다. 저만치에서 촬영팀 막내가 ‘와이어 사용 가능!’이라며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테스트때문에 와이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겁지 않게 가는 겁니까?”
“응,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갈 수는 없지. 일단 처음엔 시나리오 느낌으로 가고 두번째엔 산하씨 느낌으로 가봐요.”
독고산하와 유진태 감독.
걸음을 옮기다말고 그 두사람이 시나리오를 들고 꽤 진지한 얼굴로 회의하는 모습에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힐끔 살펴보았다.
독고산하가 유진태 감독을 그다지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촬영을 앞두고 툴툴거릴 녀석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유진태 감독의 말을 경청하는 듯 했다.
물끄러미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는데 유진태 감독이 느닷없이 고개를 드는 바람에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초하씨!”
“아하하. 회의 중이신가봐요.”
그덕에 독고산하까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으, 몰래 훔쳐보고 얼른 촬영 테스트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얼굴 보기 민망해!
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지나가려는데 유진태 감독이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하는 수 없이 주뼛주뼛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시나리오를 손에 든 독고산하가 무심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촬영팀 체크는 끝났어요?”
“네. 스테디 캠으로 촬영할 건데, 제가 와이어에 매달리려구요. 점점 높아지는 장면을 와이어에 매달린 채 촬영하면 될 것 같아서.”
“음, 좋네. 괜찮은 생각 같은데요? 근데 안위험하겠어요? 촬영도 좋지만 몸 조심해야지.”
“괜찮아요. 손발만 잘 맞으면 문제 없으니까. 와이어 담당하는 스탭들한테 잘 보여야겠죠, 뭐.”
“그래요. 그럼 이따 촬영 기대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 독고산하를 쳐다보자 녀석은 별 관심없는 눈초리였다.
그래, 내가 그렇게 쏘아붙였는데 관심보여줄 턱이 없지. 나같아도 그랬을 거야. 근데, 조금 섭섭한데? 걱정도 안해주냐? 앙?
입을 삐죽거리며 촬영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진태 감독이 원하는 골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거액을 들여 실제 골목과 똑같이 만든 실내 촬영장이었다.
조명팀이 분주하게 조명을 체크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들다가 크레인에서 시선을 멈췄다. 살수차를 매단 크레인은 꽤나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아찔한 느낌까지 들었다.
“실내에 골목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유진태 감독님도 미쳤죠?”
“네? 아, 네.”
현장 회계를 맡은 스탭이었다. 스탭들의 계약서를 모두 챙긴 채 촬영장 앞에 서서 흐뭇한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는 그녀를 보다가
나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표정을 따라해본 것뿐이었는데 어쩐지 나도 모르게 흐뭇한 기분이 들어서 결국 나중엔 진짜로 흐뭇한 표정이 되었지만.
“촬감님 아까 하신 말씀 정말 와닿았어요.”
“저요? 제가 뭘요?”
“배우를 살아 숨쉬게 하시겠다는 거요. 아마 촬감님이 촬영하시는 영상은 정말 매력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 고, 고마워요.”
저쪽에서 퍼스트가 ‘촬감님 체크!’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천천히 옮기자 현장 회계 스탭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내 영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어쩐지 굉장히 가슴이 설레이는데?
히죽 웃으며 촬영팀을 향해 달려가자 와이어 장비와 스테디 캠이 모두 체크된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스테디 캠이랑 와이어 복장이랑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좀 불편할 것 같은데 감수해야지.”
머리를 긁적이며 와이어 장비를 착용했다. 뭐랄까, 굉장히… 신경 쓰이는데? 불편해! 몹시 불편해!
“이거 원래 이렇게 아파? 신경쓰여.”
“날아가면 더 아프대요.”
“진짜? 우왁! 최악이야! 지금도 신경쓰이는데 그럼 촬영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감수하셔야죠.”
내가 한 말을 고대로 따라하는 퍼스트가 얄미워 가재미 눈을 하고 있다가 스태디 캠을 부착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뛰어가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건 와이어에 매달린 상태로 허공에 뜨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내가 이 아이디어를 왜 냈을까.
“아, 아파! 아프다고! 아악! 악!”
“촬감님 시끄러워요!”
“악! 아픈데 어떡해! 진짜 아파! 정신없어! 못해! 못하겠어! 이건 아니야! 악!”
“영상은 괜찮게 나오는데요?”
“당연하지! 내가 촬영하는데! 근데 아프다니까? 악!”
“괜찮은 것 같아요, 이대로 가죠?”
퍼스트, 이 말아먹어도 모자랄 놈. 니가 촬감이냐? 내가 촬감이지. 그걸 왜 네가 정해! 너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거지? 그치?
입 안에서 그 말이 맴돌았지만 내가 봐도 영상이 무척 쓸만했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고통은 잠깐이요, 영상은 평생이니까.
“와이어 팀한테 내가 허공으로 올랐을 때 저 크레인보다 높지 않도록 신경써달라고 전해줘. 잘못하면 살수차까지 찍히겠어.
그리고 너무 높으면 내가 좀 위험할 것 같아.”
“그래요?”
“응. 실내라서 조명이 아슬아슬해. 잘못하면 크게 다칠지도 몰라. 신경쓰라고 꼭 전해줘.”
막내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총 걸음을 옮겨 와이어 팀에게 다가갔다. 어느정도 해결된 것 같아서 ‘괜찮은데?’하고
스스로 흡족해하는 찰나, 유진태 감독이 호탕하게 웃으며 촬영장으로 걸어왔다.
“다들 준비 됐나? 우리 진짜 1회차 촬영 들어가는 겁니다.”
유진태 감독의 말에 여기저기서 ‘네!’하고 우렁찬 대답들이 들려왔다. 다들 기대에 부풀었구먼.
피식- 웃으며 와이어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촬영장으로 들어갔다. 시나리오를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며 읽던 독고산하가 길게
두 눈을 감았다 뜨더니 천천히 촬영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잘부탁한다는 인사를 대신했다.
아무리 내가 싸가지없이 쏘아붙였다지만 너무 갑자기 쌀쌀맞게 대하는 거 아냐? 못된 놈.
독고산하의 냉랭한 태도는 시나리오 상 주인공이 가지는 무미건조한 표정과 맞물려 굉장히 먼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씬 원, 테이크 원.”
“액션!”
독고산하에게 집중하던 신경이 파삭- 무너졌다. 정작 중요한 촬영 시작이라는 소리를 못듣고 멍하니 녀석만 쳐다본 탓에
바로뛰어가야 하는 촬영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쳐다보자 유진태 감독이 특유의 눈웃음을 보이며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초하씨, 처음이니까 눈 감아주는 거에요. 필름이 얼마나 비싼데. 다음은 없어요, 알죠?”
“네, 죄송해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할게요.”
미쳤지. 미쳤어.
이번엔 제대로 해야해. 카메라에 집중하고 쳐다보니 독고산하가 가볍게 헛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렇게 한심했나?
머쓱한 기분에 온 신경을 카메라에 집중하자 뒤에서 ‘씬 투, 테이크 투’하는 소리에 이어 곧바로 ‘액션!’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이다!
“하아… 하아하아…….”
독고산하의 숨소리가 살수차가 만들어내는 빗줄기를 뚫고 날카롭게 귓가로 박혀들었다. 영상 안에서 살아 숨쉬는 녀석의
표정은 날카로운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인간 독고산하와 민초하의 교감은 개판일지 모르지만 배우 독고산하와 촬영감독 민초하의 교감은 완벽하게 맞물렸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녀석이 뿜어대는 에너지는 영상에 숨결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배우다. 나는 지금 그 에너지를 담고 있어. 이걸 관객에게 모두 전해줄 수 있다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표현해낼 수만 있다면!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온 신경을 카메라에 집중했다. 골목의 중턱에 다가설 쯤 독고산하의
달리기가 천천히 멈춰졌고 와이어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야!
“흡!”
있는 힘껏 발을 굴러 세트장을 박차고 올랐다. 와이어 줄이 당겨지는 느낌과 함께 불편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카메라를 꽉 쥔 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카메라에 담기는 골목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독고산하의 모습이 작아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기분이 안타까워 입맛이 씁쓸해질 쯤, 갑자기 뜨거운 느낌이 뒤에서 덮쳐오듯 느껴졌다.
…어라?
“와이어! 와이어 내려! 뭐하는 거야!”
“살수차 꺼! 발전차도 꺼! 조명 터지잖아! 뭐해!”
“촬감부터 챙겨! 와이어 내려!”
아래가 소란스럽다 느껴지는 순간 독고산하가 놀란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얘가 촬영 중에 왜이래? 하고 생각하며 뜨거운 느낌에
고개를 살짝 돌린 순간 환한 빛이 보였다.
높게 매달아놓은 조명이었다.
조명에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싶더니 곧 무언가가 깨지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 같은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얼굴을
숙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와이어 줄이 촤르르- 소리를 내더니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민초하!”
날카롭게 귀에 박히는 익숙한 이름과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 아래를 쳐다보려는 순간, 위에 매달려있던 조명이 나보다 먼저 아래로 떨어져내리며 터지는 불꽃이 보였다.
아차 하는 순간 와이어 줄이 심하게 요동치는 느낌과 함께 무언가에 부딪히는 충격이 가해졌다.
아득히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내 이름과 당황한 듯한 비명소리들 뿐이었다.
***
아니. 이럴수가. 오늘 글을 쓰다가 무심히 타자를 살피고 있었는데 스페이스바가 손가락 모양대로 살짝 파여있는 걸 발견했어요.
맙소사.
엄지손가락의 옆부분이 닿는 위치대로 살짝 파여있더군요. 감촉도 다르고.
오............................................................................................................나 뭔가 대단한데-.,-? 라고 순간 생각했습니다만,
정말 순간이었어요..........-.,-이히;
읽어줘서 고마워용. 꼬리말 달아준 그대들은 고맙고땡큐하고알라뷰쪽쪽!
야호♬ 올림.
(+ 어머 말머리 잘못 체크된 걸 이제야 확인했네요. 얘기해주신 분 고마워용ㅜ.,ㅜ)
첫댓글 초,초하!! 어떻해요 !! 막막 다음편은 천국에서의 편이 되는건가요ㅠㅠ!! 악악 !! 절대안되!!!!!!!!
어머안온사이에벌써만이연재되어잇엇네요!!!!!!!!잘읽구가용ㅎㅎ
★
초하야 ㅠㅠㅠㅠ너막 그렇게다치고그럼안되 ㅠㅠ알지??응?ㅠㅠㅠ
초하가 다친걸까요. 역시 재밌다는! 건필하세요~
헉!! 초하 다치면안대 ㅜㅜ
※ 오마이갓 사랑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호님 사랑해요 와나..돌겄따 산하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떡하니 엉???잔윈하게 쳐내려했찌만 저런모습보니까 미치겄지? 돌겄지? 걱정되서 돌아버리겠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연히 그렇게 크겐 안다치겠지만! 이번이사건으로인해 산하가 자기의 마음을 좀더 확실히 깨닫게됬으면...하는 바램이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악 너무너무 다치진않았으면!! 산하가 초하를 부를때 왜이렇게 마음이 쿵. 했는지 ㅜㅜ....흑흑..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넘잼네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잘읽고가여~
ㅜ.ㅜ 끌려서1편부터 쫙읽어왔습니다 !!!!!ㅠㅠ 3시넘었어요 .. 아무튼 홀딱 빠져버렸어요! 새벽3시임에도 불구하고 윗글 클릭이안된다는게 어찌나 서럽던지 .. 초하 다치는건가요.. 음 맨날다치네요 호호 아무튼 산하가 가슴이쿵덕쿵덕할정도로 멋있네요! 아....저런남자없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다 독고산하 떄문이야...=_=;;;;ㅋㅋㅋ
헐초하..........다쳣는데왜웃기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초하가 도도하게나왓으면좋겟어요!일명 밀고당기기 랄까.
긴장감><너무재밋어욤!!!
오마나... 초하가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오오올 역시 뭔가 터질꺼같았어용 !!!! 또 산하가 도와주는거? ㅋㅋㅋ 짱재미써용
산하의 목소리겠죠?ㅋㅋ 그래 좋아. 계속 신경쓰여봐. ㅋㅋ
으앗, 초하 괜찮겠죠? 괜찮아야할텐데..걱정이...담편도 기다릴께요-
아으 너무 재밌어요 열심히 감상중ㅋ
이번화는진짜계속웃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