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정현숙은 판검사가 되고 싶었다. 그 꿈이 김제여고 2학년 때 '가수'로 바뀌었다. 학교 배구선수끼리 벌인 장기자랑에서 노래를 불러 1등을 한 것이다. 정현숙은 1978년 가수가 되겠다며 무작정 상경했다. 펄펄 뛰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는 딸에게 돈 1만원, 쌀 한 말, 김치 한 통을 쥐여줬다.
정현숙은 뚝섬에 있는 친구 언니네 집에 머물면서 청계천 오아시스 레코드로 출퇴근하며 노래 연습을 했다. 차비를 아끼려 청계천에서 뚝섬 집까지 걸어다녔다. 밥은 굶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녀는 데뷔곡 '정말로'가 대박을 치며 '정말로' 가수가 됐다. 바로 지금의 가수 현숙(49)이다.
그로부터 3년은 현숙의 전성시대였다. 내놓는 곡마다 인기를 끌었다. 82년까지 3년 연속 10대 가수가 됐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뒷바라지를 위해 상경한 어머니가 90년 중풍에 걸리더니 이듬해 아버지마저 치매 증세를 보였다. 17년에 걸친 현숙의 부모 뒷바라지가 시작된 것이다.
1991년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어떤 분이 현숙씨 아버지라고 하는데 맞으면 모셔가라"는 것이었다. '우리 딸이 가수 한다'며 좋아하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밥 달라"고 고함을 지르고 수발드는 딸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간병인은 안 쓰고 제가 집에서 돌봐 드렸어요. 낮에 두 분만 둘 수 없어서 차에 모시고 다녔어요. 공연할 때는 제일 앞자리에 돗자리 펴고 자리 봐드렸죠. '엄마, 여기가 한강이에요. 아빠, 여기가 여의도 방송국이야' 하고 알려드렸어요."
여섯 형제가 돌아가며 부모님을 지켰지만, 밤 수발은 그녀의 몫이었다. "낮에는 돈 벌러 다니고 밤에는 부모님 안아드리고 기저귀 갈아드렸죠." 그 세월을 현숙은 어떻게 견뎠을까. "속상해서 집 앞에 앉아 혼자 운 적도 많아요. 아파서 변기 붙잡고 쓰러진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억지로 일어나 찬물에 밥 말아 먹으면서 버텼어요. 죽을 힘을 다해 살았어요."
1996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현숙은 마지막으로 남은 어머니에게 더 매달렸다. 어머니의 코에 꽂고 있던 호스가 빠져 병원으로 달려가거나, 감기가 심해져 응급실로 뛰어가는 일도 있었지만 그녀는 "데뷔 초기에는 가난해서 제대로 못 해드리고 돈 벌었을 때는 부모님께서 편찮으셔서 잘해드리지 못했던 일이 너무 후회됐다"고 했다.
딸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작년 6월 한양대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중환자실 입원하시기 직전까지도 압구정동의 한 미용실에 모시고 가 머리 잘라 드렸어요. 자존심 강한 우리 엄마가 남한테 덥수룩한 머리 보여주기 얼마나 싫어할까 싶어서요. 제일 좋은 미용실에서 제일 예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사망한 후 현숙은 한동안 방황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친구 집을 떠돌았고 넉 달간 폭음했다. 잠이 안 와 와인을 박스째로 사두고 여러 병 마신 후에야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4㎏이 쪘어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퉁퉁 부은 얼굴을 거울로 보니 가관이더군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엄마를 위해서라도 내가 사랑받는 가수가 돼야 되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어요."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현숙을 '효녀 가수'라 불렀다. "자주 두 분을 모시고 산책하러 다녀서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어요. 부모님께서 걸음이 불편하셔서 제가 양쪽에서 부축해서 다녔죠. 그러다 방송에도 나가게 되고 '효행 연예인'으로 국민포장을 받았어요."
양친의 불편한 모습을 감추고 싶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원래 어머니께서 집에서 빈대떡만 몇 장 부쳐도 윗집 아랫집 다 나눠주던 분이라 이웃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현숙을 어떤 이들은 '부모님 팔아서 가수 한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저는 '효녀 가수'라는 말이 듣기 싫었어요. 잘한 것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가슴이 미어져요. 그래서 좋은 음악 만들려고 남보다 10배로 노력했어요. 아무리 늦게 귀가해도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메이크업하고 연습했어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앨범도 부지런히 냈어요. 지금까지 낸 앨범이 28장이에요."
오는 8일은 현숙이 부모 없이 맞는 첫 어버이날이다. 그날 현숙의 스케줄은 서울에서 울산시까지 꽉 차있다. 그에 앞서 6일에는 강원도 정선으로 이동목욕차량을 끌고 갈 예정이다.
현숙은 씻겨드릴 때마다 아기처럼 좋아하시던 부모 모습이 떠올라 몇 년 전 한 대에 4500만원인 목욕 차량을 사서 고향 김제에 기증한 적이 있다. 지금은 그녀가 기증한 목욕 차량 4대가 김제, 울릉도, 경상도, 충청남도 청양을 달린다. 더 많은 곳에 목욕 차량을 보내기 위해 현숙은 한 달에 400만원 정도 저축한다. 들쭉날쭉한 수입 때문에 때로는 마이너스통장에서 꺼내 보탠 적도 있다.
최근 새 앨범 '그대는 내 사랑'을 내놓은 그녀는 대한치매학회가 위촉한 '치매홍보대사'가 됐다.
"저는 지금도 아빠가 쓰던 숟가락으로 밥 먹어요. 부모님이 절 지켜주는 거 같아요. 돈 많이 벌어서 많이 도와주는 게 꿈이에요. 저는 하나도 안 가질 거예요. 내 집도 내 몸도 힘들고 어려운 분들 다 주고 갈 거예요. '돈 벌어서 효도해야지'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 전화 한 통 드리는 게 효도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