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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방원 제138편: 민무회 사건의 서막
( 영이 서지 않은 지방관리들, 부정부패에 얼룩지다 )
권력은 잡는 순간부터 부패한다고 했던가. 대의를 명분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이방원. 그가 이저, 이거이의 옥사와 이무를 참하며 군기를 잡고 처남 민무구, 민무질에게 칼바람을 일으키며 대소신료를 떨게 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기강이 느슨해졌다. 중앙권력은 그런대로 서슬이 살아 있었지만 지방은 영(令)이 서지 않았다.
황주의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 나득경이 기생을 거느리고 성전(聖殿) 근처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목격한 해주목사 염치용이 힐책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성스러운 공자님 사당 근처에서 이 무슨 해괴한 망동이오?"
"목사님은 아관을 힐책할 자격이 없수다."
꾸지람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코웃음을 쳤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는 가장 보수적인 계층이며 미래지향적인 집단이다. 차세대를 이끌어갈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자를 시대의 지킴이, 시대의 마지막 보루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변에서 바라보는 기대 또한 크다. 어느 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육자가 부도덕하고 부패하면 미래가 없다.
계집종을 바치고 관직을 꿰어 찬 관리:
염치용은 자신의 가비(家婢)에 인물이 뛰어난 계집종이 있었다. 이를 먼저 맛을 보고 상왕전에 바쳐 정종의 시첩(侍妾)을 만들었다. 여기에도 하륜의 작용이 컸다. 그 끄나풀을 이용하여 해주목사를 꿰차고 앉아 재물을 긁어 모으고 있으니 지역 관리는 물론 백성들이 존경할리 없었다.
염치용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유학교수관 나득경 역시 반성하기는 커녕 해주목사 염치용의 비리 10여 가지를 풍해도감사 민약손에게 고했다.
염치용을 불러들인 감사가 안핵(按覈)하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알을 부라렸다. '질책하는 당신은 뭐 잘한 게 있느냐?'하는 투다. 연쇄반응이다. 그 길로 한양으로 올라온 염치용은 상왕전 환관과 시첩(侍妾)에게 해주감사를 참소하고 자신의 처를 시켜 사헌부에 고발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풍해도 감사 민약손의 비리를 조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염치용의 가비(家婢)가 상왕전에 들어가 시첩이 되었는데 염치용이 등용된 것도 상왕의 청한 때문이었다. 그의 소위(所爲)가 이와 같으니 염치용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염치용으로서는 혹을 떼려다 붙인 격이 되었다. 해주가 발칵 뒤집혔다. 조용하던 고을 해주에 사헌부 관원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해주 바닥을 샅샅이 뒤진 사헌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황주목사 염치용이 국고의 쌀과 콩 3백석을 빼돌리고 제 마음대로 임지를 떠나 한양 나들이를 했습니다. 풍해도 감사 민약손은 한창 농사철에 각 고을 수령과 함께 기생을 거느리고 풍악을 울리며 연회를 즐겼으며 술에 취하여 창기를 역마에 태우고 달리다가 창기를 말에서 떨어뜨려 죽게 하였습니다.
경력(經歷) 오을제는 감사의 행동거지를 바로 잡지 못하였고, 황주판관(黃州判官) 양여공도 목사의 비행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며 찰방(察訪) 김경은 법령을 범하여 연회에 나갔고, 내관(內官) 김희정은 마음대로 역마(驛馬)를 내주었으며 지봉주사(知鳳州事) 송남직은 그 관중(官中)의 저화(楮貨) 미곡(米穀) 어물(魚物)을 사사로이 기관(記官)과 여기(女妓)에게 주었습니다. 청컨대, 모두 죄를 주소서."
해주지방 관리가 줄줄이 연루되었다. 모두 잡아 올려 순금사(巡禁司) 옥에 하옥시켰다. 해주가 초토화 된 것이다. 실력으로 관직에 나간 사람도 있지만 뇌물을 바쳐 직책을 꿰어 찬 지방 관리가 토호세력과 유착하여 분탕질을 치고 있을 때 허리가 휘는 것은 백성들뿐이었다.
한명회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장자방, 또 다시 등장:
태종은 분노했다. 중앙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서 관리들의 부패가 이지경이 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염치용의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하나 한 등을 감하여 그에게 자자(刺字)하여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고, 민약손은 장 80대, 오을제, 양여공, 김경, 송남직도 장을 쳐 파직하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하륜이 예궐하여 청하였다.
"염치용은 소신 외손의 양부(養父)입니다. 남은 곡식을 관중(官中)의 용도로 하고 자기에게 들이지 않았다 하옵니다. 청컨대, 용서하소서."
부정부패에는 하륜이 연결되어 있다. 태종재위 18년 동안 그가 죽어 관직을 놓은 16년간은 태종시대가 아니라 가히 하륜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비첩이 낳은 자식의 양부 변겸이 그랬듯이 이번에는 외손의 양부다. 사돈의 팔촌을 넘어 양부(養父)라 칭한 자들 행태가 이 정도였으니 직계 친인척은 얼마나 부패했을까 미루어 짐작이 간다.
어설픈 이무기, 천기를 누설하다:
조선 5백년을 통틀어 장자방으로 말하면 한명회와 쌍벽을 이룬다. 하륜은 경제 전문가답게 재물을 좋아했고 신체적인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한명회는 명예를 좋아했다. 딸 넷 중 둘을 왕후로 만들고 나머지 둘은 세종의 부마 윤사노가(家)와 신숙주가에 시집보내 부귀영화를 누리던 한명회도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했으니 그 명예의 순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륜의 청을 받은 태종은 염치용에게 내렸던 자자형을 면제해주었다. 하륜의 얘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어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자(刺字)는 죄인의 팔뚝이나 이마에 홈을 내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던 형벌이다.
얼마 후, 안동에 안치되었던 염치용이 유배에서 풀렸다. 뒷배를 봐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례적인 일이다. 한양에 올라온 염치용은 도성을 휘젓고 다니며 자신이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드디어 일을 냈다. 민무회를 찾아간 염치용이 폭탄발언을 한 것이다. 임금이 관련된 내용이었다. 어설픈 이무기가 용의 발톱을 건드린 것이다. 민무회 사건의 서막이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39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