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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애정하였던 그러나 눈밖에 나기도 했던 방랑식객 임지호님이 세상을 떠났다.
누구나 바라는 잠을 자다가 스스륵....이라지만 이름하여 심장마비.
그렇게 소리소문 없이 세상과 작별하게 된다는 것은 웬만한 공덕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속설이 있지만
남겨진 이들과의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홀로 세상이별을 한다는 것, 많은 생각이 오간다.
잠을 자다가 그냥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모든 이들의 바람이긴 하지만 그래도.....라는 말이 하고 싶다.
혼자 스르륵이었을지 아니면 혼자서 고군분투와 사투를 벌이다 하늘 여행을 떠났을지 모를 일이나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확인되어진 바는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이다.
과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주무시다가 홀로 돌아가신다 는 가능한 일일까?
오래 전에 정말로 아끼던, 사랑하는 이를 그렇게 보냈다.
어제까지도 만나서 웃고 떠들며 출판제작 회의까지 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회의 하러 가는 길에 날아든 비보에 운전대를 놓칠 뻔 하였다.
고속도로 한켠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흐느끼다가 여기저기 확인 전화로 체념 상황이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를 떠나보내는 날, 장례식장에서 너무 울어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었지만
관계치 아니하고 울다 지친 나머지 멍 했던 기억이 있다....그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으므로.
그렇게 어제 만난 사람을 이별하는 방식이 청천벽력같은 일방적인 죽음 통고 형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며칠간의 시름시름을 함께 견디며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고 그제서야 이별을 준비하면서
세상 속의 세속적 분리됨을 미리 인지하는 것이 아무래도 좀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 이 아침.
엊그제 자연요리사, 치유의 음식 달인, 방랑식객....온갖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사람좋은 웃음을 날리던 그가
"임지호" 라는 이름 석자의 주인공이 잠자다가 하늘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에 망연자실 하였다.
거친 세상 속에 저홀로 부표처럼 떠돌며 자신의 삶자락엔 연연해 하지 않던 이의 마지막이 "그답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갖지 않은 자연인 그 자체로 삶을 마감하는 것, 별별 생각이 머리 속을 헤집는다.
그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또 어찌보면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던 그의 과거력이
지금에서는 또 한창 사연거리가 되고 있다.
세분의 어머니...기구한 인생, 방랑객의 이유 등등 이지만 굳이 그런 사실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가 무위자연인으로서 탐하지 않고 살아온 인생에 타이틀을 붙여준 사람들이 그저 이러쿵 저러쿵인 것일 뿐.
그가 도전하고 지녀온 인생 철학에 색을 입히고 뭔가를 덧 씌우고 그를 조용히 내버려두지 못했던 사람들이
지금쯤은 애닳아 하고 있을라나? 모르겠지만 쥔장 역시 그와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양평에서 한번 일면식이 있었을 뿐이고 강화도로 그가 거주지를 옮긴 후에는
시요일 멤버들과 그의 음식점에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였을 뿐인 고로 개인적인 친밀감은 없다.
단지 방송에서 보여지고 들려지는 부분으로 인해 엄청 친한 사이처럼 여겨지는 효과에 잠식당하고 있었을 뿐.
어쨋거나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개인적으로는 고 "임지호" 같은 분이 어쩌다가 자연사이긴 하지만 세상 속의 손을 놓았을까 이다.
많은 이들에게 음식으로 치유의 순간을 나눠주셨던 분으로서
절실하게 그의 세상 속으로 함몰되기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두고
어찌 그리도 황망하게 세상을 접으셨는지 참으로 애통하다.
그가 일궈내는 세상에 그가 지치고 힘들고 치였을까나?
그 역시 또다른 방법으로 스스로를 치유할 생각이 없었을까나?
고단하고 지난했던 자신의 삶을 오래도록 이어갈 마음이 없었을까나?
그리하여 그냥 손을 놓고 싶다는 생각을,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을까나?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신경이 쓰여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가 화단 경력 삼십년이 넘었다는 사실도 마음이 힘들다.
그가 붓질로 표현해내는 세상 속은 또 다른 세상을 갈구한다.
그만의 방식으로 요리와 접목된 세상을 가는 거다.
그를 이해할 또 다른 방식인 셈이다...암튼 오늘은 그의 발인이다.
남겨진 사람들을 비롯하여 그를 좋아하고 애정하였던 사람들을 위해서도
가시는 걸음걸음이 힘들지 않았으면 한다.
쥔장 또한 마음 자락을 걷으며 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애정의 끈을 내려놓는다.
아랫글은 고 임지호님의 오래 전 인터뷰 글이다.
혹시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면으로 빌려왔다.
그를 좀더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지면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버린 세상에 꾸역꾸역 발을 딛고 살면서 고 "임지호"님의 하늘여행을 배웅하며
그와의 이별을 고한다.
산당 임지호-두레 이숙희 '비빔밥 구로다'에 답하다 구로다 日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비빔밥이 한식 세계화의 대표선수로 적당한가요?" 산당(山堂) 가는 양평 가도(街道)는 멀었다. 두레 가는 길은 골목을 굽이쳐야 했다. 임지호와 이숙희의 삶이 그랬다. 불행이 운명에 화인(火印)처럼 찍힌 세월이다. 세상은 한식 세계화로 떠들썩하다. 그들은 "마음이 그릇이요, 천지(天地)가 밥"이라고 말할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상은 가장 팔자 센 사람들이 만드는 모양이다. 한 일본인이 나섰다. 침묵하던 그들이 우리 밥상의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 신당 임지호 "비빔밥은 절차와 법도 뛰어넘은 자유""일식은 전부 줄이는 것… 한식은 하늘 감동시키는 자연" ■가출 생모는 지호의 아버지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석 달 된 그를 아버지 품에 넘긴 날 사고로 사망했다. 본가(本家) 어머니는 그 몇해 전 외아들을 홍역으로 잃었다. 임지호(林�M鎬·55)가 집안의 대(代)를 잇게 된 사연이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집 밖을 떠돌았다. 어른들은 그걸 보고 수군댔다. "얼마나 구박이 심하면 저리도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할까" "새엄마가 박대한다며"…. 무심코 한 말들이 소년의 가슴에 돌팔매처럼 박혔다. 소년은 일본으로 밀항해 돈을 벌어보겠다는 야망을 품고 가출했다. 11살 때였다.기차 훔쳐타고 도착한 부산에서 그는 며칠 만에 거지꼴이 됐다. 소년은 거기서 목포로, 다시 제주도로 흘러갔다. 몇끼 굶자 발걸음이 수제비집으로 향했다.뜨끈한 국물이 뱃속으로 넘어가자 눈이 뒤집혔다. 두 번째 그릇을 비우고서야 '아차!' 싶었다.식당 아줌마가 잠시 눈을 돌렸다. 소년은 냅다 밖으로 뛰었다. 거렁뱅이 소년은 돈은 벌긴커녕 아귀탕집 배달을 하게 됐다. 심부름하다 다시 부산으로 와 중국집 주방에 취직했다. 남도(南道)를 헤매다 고향 안동 땅을 다시 밟았다. 2년이 훌쩍 지났다. ■감각 임지호는 그림을 정리하고 있었다. 12일 종로구 인사아트센터에서 끝난 '음식 4차원으로의 여행'전(展)에 내놓을 그림들이었다. 1주일 동안 그는 그림을 앞에 놓고 즉석 음식 퍼포먼스를 폈다. '생명의 느낌' '영혼의 고통'…. 이런 주제의 개인전에 소설가 이외수(李外秀)가 엽서를 썼다. "이분을 부처의 뼈를 우려 사골탕을 끓이는 분이라고 남들에게 소개하길 서슴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욕 같은데….('요리로 한 소식을 했다는 뜻도 담고 있다'는 부분을 말하자) 아! 그럼 칭찬이네요." ―무슨 좋은 음식을 대접했길래. "몇년 전 두세끼를 해줬습니다. 몸이 완전히 망가진 것 같길래. 그 분 레시피는 보태고 비우고 하는 것이었어요. 겉으론 샥스핀 같은데 안에 많은 게 들어가 있습니다." ―요리사가 왜 그림은. "3년쯤 됐어요. 음식 구상할 때 드로잉(drawing)을 했는데 음식과 그림이 똑같잖아요. 색상도, 디자인도." ―그림도 음식처럼 빨리 만듭니까. "하룻밤에 150점 그린 적도 있어요. '불멸의 소나무'같은 건 6개월 걸렸고요, 이번에 출품한 '드뷔시'는 한 달 만에 완성했지요." ―밤을 8시간으로 잡으면 1시간에 20점인데 가능합니까. "음식도 그림도 다 감각(感覺)입니다." ―그림이 팔립니까? "지금까지 7~8점 팔았지요. 그 돈으로 학생들 장학금도 주고 작년 추석 때는 주변 81가구에 쌀도 보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올 6월 프랑스 행사의 '전초전'입니다." ―프랑스엔 왜? "6월 5일 센강 유람선에서 그림 퍼포먼스를 하면서 음식을 만들고 다큐멘터리 촬영도 합니다. 7월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궁의 초청을 받았고 영국에도 갑니다." ―한 방송에서 '방랑식객' 연작(連作)도 방영중이죠. "작년에 1, 2편이 나갔습니다. 2월 7일에는 백두산(白頭山)에서 나는 걸로 음식 만드는 내용이 방영됩니다." ―백두산에서 뭘 가지고…. "낙엽이요, 우울증 치료에 최곱니다. 3년 전 낙엽으로 차를 끓여보니 효과가 좋더군요. 그거 마시면 확 풀려요." ―세상이 낙엽 천지인데, 특허라도 받지. "자연과 같은 게 최고 보약입니다. 전 돈 벌 생각 없어요. 혼자만 공유해서 뭐해요." ▲ 임지호씨가 미술전시회 '음식, 사차원으로의 여행'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는“비빔밥을 양두구육이라고 하는 건 본질을 몰라서 하는말”이라고 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방랑 2년 만에 고향에 온 그는 다시 집을 나섰다. 타고난 역마살 때문이었다. 이번엔 서울로 갔다.도마, 칼과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곰탕집·일식집·로바다야키집·철판요리집·라면집 주방을 종횡했다. 사주(四柱)는 유전될까? 그는 큰아들(임윤현)도 자신을 닮았다고 했다. 초당대 요리학과를 나와 스물여덟에 아이 둘을 두고 요리하며 산다. 그는 아버지처럼 한식을 하다 지금은 이탈리아 요리를 하고 있다 .―왜 이탈리아 요리를. "한식 하면 생활이 안 돼요. 월급이 적거든요. 재료비가 많이 들잖아요. 파스타나 피자는 마진이 크지요." ―아들도 가출하던가요 ."아주 어릴 때 가출했어요. 한번 붙잡아서 반 죽도록 두들겨 팼더니 다음부턴 안 하더군요, 히히. "―수십 군데 음식점을 돌아다녔으니 고생도 많이 했겠지요. "일식집에선 주방장 하다 쫓겨났어요. 활어회는 생선을 썬 뒤 식초 한 방울 뿌리면 움직일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걸 못했어요. 주방 보조로 생선 써는 법부터 배웠지요." ―첫 음식점은 어디서. "다대포 코오롱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함바집을 했습니다. 함바집 1년 하면 집 두 채를 산다는 말이 있지요. 전 빚만 8000만원 졌어요." ―솜씨가 없었나요. "한 끼 값은 300원인데 재료비를 1000원씩 썼거든요.전 소고기 수프도 한우를 사다 끓였어요. 남들은 토막 내 주는 고등어구이를 한 마리씩 줬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리곤. "에버랜드에서 곰탕을 8개월 동안 끓이다 동료가 하던 통닭집을 인수했죠.1주일 동안 닭을 한 마리도 못 팔았어요. 업종을 닭꼬치로 바꿔 대박 쳤는데 또 망했어요. 일수를 썼거든요. 그 뒤 한방삼계탕, 찻집, 고기뷔페를 하다 1983년 사우디아라비아로 갔지요." ―사우디는 왜? "건설근로자 밥 해주러요. 다란에서 라팔바틴까지 1200㎞인데 중간에 근로자들이 쉬어가는 빌라가 있었습니다. 요정(料亭) 음식처럼 만들어줬지요." ―사막에 그런 재료가 있습니까. "수입하니 재료는 많아요. 전 '기능공들 잘 먹이려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일했습니다." ―열심히 하니 보답이 오던가요. "100일간 하루 3000끼를 만드니 총(總)주방장으로 승진시켜주더군요. 부하가 45명이나 됐어요. 당시 우리 1인당 일년 GNP를 월급으로 받았어요." ―3000끼가 가능합니까? "현대건설은 1만8000명이나 됐는데요. 3000끼는 약과죠." ■서광(曙光) 사우디에서 돌아온 그는 서린호텔에 들어갔다. 임지호는 첫 아내와 식당에서 만나 가난 때문에 갈라섰다. 지금 아내도 전남 영광에서 영산대와 성지고 학생에게 밥 보시(布施)하며 만났다. 음식점 자리는 동갑 아내(강정애)가 잡았다. 2000평 터를 본 아내는 "풍수가 좋아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주효했을까, 자꾸 비껴만 가던 돈과 명성이 들어왔다.삶에 서광이 비쳤다. ―평생 요리하며 살기로 결심한 게 언젭니까. "30대 때 '이번 생(生)은 남에게 밥 먹이며 살자'고 결심했어요. 요리사를 천하게 여겼는데 집안에선 셋째누님만 격려해줬어요." ―이번 생이라니, 다음에도 인간으로 태어날 자신이 있습니까. "여자로 태어날 것 같아요. 사람은 꿈꾸는 대로 된다잖아요." ―10대 때부터 음식을 만들었는데 왜 결심은 늦게. "술 마시고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요리사들이 많았어요. 어릴 때는 말술이었는데 지금은 소주잔에 맥주 따라 마십니다." ―정착한 뒤 방랑벽이 없어졌나요. "전국에 장 보러 갔다가 그곳 할머니들 밥해주고 오고, 뭐 그렇게 삽니다." ―장 보다 왜 밥을 해줍니까. "한곳에서만 재료를 사면 싫어합니다. 저는 쭉 돌면서 다 사요. 다 가져올 수 없으니 즉석에서 도마 깔고 음식 대접하지요." ―그 즈음부터 해외에도 알려졌지요. "2003년과 2006년 뉴욕의 '코리안 푸드 페스티벌'에 초청받았습니다. 독일 건강박람회에도 갔고 한·아르헨티나, 한·베네수엘라 수교(修交) 기념식에도 초청받아 갔고요." ―식당 하면 그런 인연이 따라옵니까. "우연히 들렀던 외교관들이 연락이 와서…. 그걸 다른 데서 보기도 하고요." ―음식 재료를 현지에서 구하는 걸로 유명하지요. "샌프란시스코에 청화스님이 지은 삼보사가 있는데 한식을 만들어달라더군요. 전 재료를 현지에서 구해요. 그 사람들의 체온이 녹아 있잖아요. 캘리포니아 주목(州木)이 아메리카 삼나무인데 그 가지에 그곳 물로 밥 짓는 게 이치에 맞지요. 한식 세계화를 우리 것 가져다 먹이는 걸로 아는데 그럼 누가 좋아하겠어요." ―2006년 12월 미국 '푸드 아트'지(誌) 커버 모델로 등장했습니다. "코리안 푸드 페스티벌 때 그 회사 오너가 요리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센트럴파크에서 풀 뽑고 열매 주워 디너를 해주니 입이 쩍 벌어졌지요. 경찰이 알면 붙잡혀갔겠지만." ―유명해지니 좋던가요. "예전의 빚쟁이들만 줄줄이 찾아오더군요." ■산당의 한식본인만의 영양식을 묻자 뜻밖의 답이 나왔다. "들기름에 조선간장, 매운 고춧가루 넣고 비벼 먹는 게 최고지요." 그럼 최고의 재료는? "엿기름이지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단맛이어서 품위가 있습니다." ―한식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방법이 잘못됐어요. 한국 재료를 그 사람들에게 먹이면 받아들이겠어요? 현지 재료를 우리 식으로 만들어야지요." ―우리 방법이란 뭘까요. "우리 음식에는 조상의 지혜가 숨어 있지요. 생식(生食)·화식(火食)·발효식품으로 구분되잖아요. 해삼(海蔘)을 외국에선 '바다오이(Sea cucumber)'라고 부릅니다. 본질과 외형의 차이지요." ―한식이 너무 비쌉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다 들어가니까요. 그 안에 만물의 운행질서가 담겨 있고 그게 교육도 되고." ―음식이 많이 남아 낭비도 되고 '재활용' 논란을 낳기도 합니다. "양을 줄이는 대신 다양성을 담으면 되지요. 다만 10~20년 내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산당의 책을 보면 한의사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공격적이거나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 단 것을 좋아합니다. 건강하면 신 게 당기고요. 무쇠처럼 단단한 성품의 소유자는 쓴 걸 좋아합니다. 40년 경험이에요." ―구로다란 일본인이 비빔밥을 양두구육이라고 했는데. "본질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린 예부터 음식도 집에도 모든 게 다 들어갑니다. 나물·야채·뿌리처럼 사계절이 조화를 이룹니다. 그걸 개니 양이니 하다니.더구나 제사에서 비롯된 비빔밥엔 조상을 기리는 마음도 있어요." ―한정식이 한식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는데. "한정식은 절차와 법도입니다. 비빔밥은 그걸 뛰어넘은 자유고요. 뭐가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할 순 없어요." ―일식과 한식의 차이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일식은 전부 줄이는 겁니다. 국화꽃 같다고나 할까. 한식은 하늘을 감동시키는 자연입니다." ―인터넷을 보니 산당에 대한 불평이 꽤 되더군요. "음식점에 오는 분들은 편히 쉴 권리가 있습니다. 그걸 방해받으면 곤란하지요. 전 웃으면서 더러운 방석 내놓진 않습니다." 조선일보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
추신: 오래 전에 인터뷰 한 채승우 기자의 글이 고 "임지호"님을 아는데 보탬이 될 듯하여 옮겨왔다.
저작권에 문제가 생기면 삭제할 예정이다.
그래도 혹시나 임지호님에게 애정을 가졌던 채승우 님이라면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싶긴 하다.
첫댓글 아깝고 아까운분이네~!
안그래도 소천 소식을 인터넷으로 접하고
일식면도 없이 그저 메스콤 통해 몇번 뵌적
있었지만 우리음식을 저렇게 주변 하잖게 생각하던 것들로 멋들어지게 차려내는 것을 보고 감동하곤 했었는데, 물론 그 푸근한 인상도 너무 좋았고~!
진짜 아까운분이 가셨네요.
그러게요.
어찌 오래 함께 하고픈 사람들은
그리도 빨리 하늘여행을 선택당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